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먼저 생각하라

정양호 선교사(우간다, KPM)

생물들의 생존 방식은 자신 보다 약한 것을 희생시켜 최적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 정설로 되어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세계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은 어떤 면에서 동식물계의 그것보다 더 치열한 것 같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정치권에서 급조된 ”국정농단“(國政(壟斷)이라는 단어가

”다 잡아 넣겠다."

"다 죽여버리겠다“

라면서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번뜩이고 있다. 언론이 폭로한 것은 이른바 비선실세( 秘線實勢)의 국정농단에 놀아난

”대통령의 국정 무능, 대통령 퇴진“

이라는 이른바 딱지붙이기 선동 프로파겐다의 무비판적 거센 바람을 타고 광화문 촛불을 활할 태우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사실이 하나하나 까발려지면서 국정 농단의 실상은 다름 아닌 인민재판식 보도의 언론, 마녀 사냥식 특검, 졸속 탄핵소추의 국회가 짜맞추기식 국정농단을 한다며 촛불에 대항하는 태극기 시위로 치열한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진보 세력이 주도한다는 촛불 시위에서,

“자본주의 아웃, 사회주의가 답이다”

“북한이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이다”

라고 외치는 저들의 모습에서 두말할 필요 없이 진보(進步)라는 그럴듯한 명찰로 본색을 감추었던 주도 세력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촛불 세력의 반동으로 잠자던 무능, 무조직의 한국 사회의 애국 우파주의 세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막무가내의 좌익 세력을 견제하고 일어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위에서 살펴본 정치스펙트럼의 결과에서 시위운동(示威運動)이 공정 게임이라는 생존법칙에 긍정적 이미지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자칫 개인의 기회와 능력을 무시하고 무조건 가진 자, 기득권자를 무조건 타도하려는 좌파적 평등개념을 사칭한 파괴적 공정 게임일 수 있음도 간파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미국같은 선진국에서는 합법적인 로비스트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2013년 스노든((E.J.Snowden)의 폭로로 밝혀졌었지만 미국의 국가안보국(NSA)에서는 국가 안보를 위해 개인의 이메일까지 무차별적 도감청 하고 있음에 최근 불거진 문체부의 블랙리스트를 보고 세계 유일의 준전시 분단국가라는 측면에서 호들갑을 떨 필요까지는 없다. 동성애자들은 양성평등(兩性平等)이라는 사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현대 민주주의 사상에서 보는 상대적, 비례적, 기회적 평등이 아니라 무조건 절대 평등, 결과 평등으로 접근함으로 좌파적 평등개념을 그대로 주장하는 실정이다.

한 건물 건너 교회 간판이 널려있는 한국 교회의 경쟁을 보고 누군가는 그 도를 넘어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위한 적자생존이라고 꼬집는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타문화권 선교현장에 뛰어든 선교사들 공동체에도 이 약육강식의 법칙은 예외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동료를 무고하고 모함하는 것은 다반사요,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작은 숲 속에서 승자독식(勝者獨食) 법칙만이 난무한다면 햇볕과 물과 영양분을 위해서 서로 경쟁하고, 키가 더 큰 나무는 더 키가 작은 나무가 햇빛을 받는 것을 막으며 자신만 받아 더 번식해야만 한다. 그러나 최근 과학자들은 정글의 진짜 법칙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라고 한다. 나무의 뿌리는 토양으로부터 수분과 영양분을 흡수하고 곰팡이들은 뿌리사이에서 자라면서 나무가 만들어내는 수액과 다른 탄소 화합물을 먹고 자란다. 그 보상으로 곰팡이들은 땅속에 있는 영양분들이 나무들에게 이용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협력 정도의 수준을 넘어 나무들 서로 간에도 공생(共生)의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이러한 상생(相生)의 팀 사역은 같은 종은 물론 서로 다른 종의 나무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일부의 나무들이 햇빛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다른 나무들은 노출시킨 조건 통제의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서로 다른 탄소동위원소로 나무들에 꼬리표를 붙였을 때 놀랍게도 햇빛을 받는 나무에서 만들어진 탄소화합물이 햇빛을 받지 못하는 나무에서도 발견되었다. 서로가 다른 종의 나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무들은 본능적으로 상생협력(相生協力)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상적인 관찰로는 적자생존인 것 같지만 생물 간의 이러한 상호협력은 사랑이 많으신 창조주에 의해 정교하고 조심스럽게 최고로 디자인된 인간 삶의 상호관계를 시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절대 진리에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고 성경적 원리에 따라 살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교회 안팎의 공동체에서 질그릇 속에 담긴 또는 담겨질 보배이신 우리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좀 부족하고 허물이 보여도,

“하나님이 왜 동생 제사만 좋아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를 잡아 먹겠다!”

라는 세속적 질투와 욕망으로 사랑하는 아우 형제를 무참히 살해하는 엽기 가인을 경계해야한다.

참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을 자랑”하는 죄의 삼위일체 본능을 더 이상 학습하거나 동조, 옹호해서도 결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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