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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종수 목사님의 두 번 사과
故 박종수 목사

故 박종수 목사님이 두 번이나 필자에게 사과를 한 것이 새삼 기억난다. 그분은 까마득한 후배에게 사과를 하시는 큰 어른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1987년 인천에서 온유한교회를 개척했을 때였다. 당시는 경인노회로 분리되기 전이었기에 경기노회에 개척설립을 허락받기 위해 청원을 했다. 그때는 교회 명을 지역명으로 하는 것이 추세였기 때문에 조금 이상한 이름은 상당한 견제를 받았다. 당시 ‘시냇물흐르는교회’ ‘예수의능력을제한하지않는교회’ 등의 이름들이 간간이 등장하던 때여서 교회명에 상당한 신경을 세우고 있었던 때였다. 온유한교회라는 이름이 노회에 등장하자 어른들이 봇물처럼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박종수 목사님이 나오시더니 “어느 교회는 온유하지 않아서 그 교회만 온유한교회로 했느냐? 그렇게 교회 이름을 지을 것이 없더냐?”는 발언을 하셨다. 뭇매를 맞고 있던 목사 초년병인 필자가 손을 들고 나갔다. 잘못하면 교회 이름은커녕 개척설립허락도 못 받을 수도 있는 긴장된 발언대였다.

“네, 선배 목사님들의 충고,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인천 만수동에 개척을 하러 갔더니 만수교회, 만수동교회, 만수제일교회, 만수중앙교회, 만수장로교회, 만수감리교회, 만수성결교회, 만수침례교회 등등 만수라는 이름이 만수 판이었습니다. 우리 옆 동네는 장수동입니다. 장수(長壽)가 뭐냐 우리는 만수(萬壽)한다 해서 지은 만수동 보다는 온유한교회가 더 성경적일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지역 이름 중에 샤마니즘적인 이름이 많습니다. 꼭 그렇게 고집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들어서 좋은 성경적 이름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박종수 목사님이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어 다시 나오셨다. 모두가 침도 한 모금 삼킬 수없는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어른이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까? 그런데 박종수 목사님의 발언의 참으로 의외였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제가 잘 몰랐습니다. 제 발언에 대해 천 목사님께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과연 어른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박 목사님의 그 발언 한마디로 교회 명에 대한 논란은 모두 종결되었다.

세월이 흘러 필자는 부산 연희교회에 부임하여 어른교인이 열손가락에도 들지 않는 학생들이 주를 이룬 상황에서 박종수 목사님을 부흥회 강사로 초청을 했다. 박 목사님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응답해 주셨다.

부흥회 이튿날 저녁에 박 목사님은 설교 중에 예화를 하나 하셨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를 하신다. 그런데 뭔가 팩트가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다음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면서 물어보았다. “목사님 어제 저녁 하신 예화는 어디서 들은 것입니까?” “응 무척산 기도원의 표지현 원장이 어느 집회에서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목사님 그것은 사본이고 원본이 있는데 조금 다릅니다.” “응, 원본?” “네 제가 원본입니다.” 목사님은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그 원본에 대해 듣기를 원하셨다.

무척산은 방학이면 단골로 가는 기도원이었다. 명향식 선생이 원장으로 있을 때부터였다. 표지현 원장이 부임하고서도 계속 방학이 되면 올라갔는데, 하루는 나보고 한 시간을 맡아 달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은 구하시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하여 주신다는 말씀을 전하면서 이런 실제 일어난 이야기를 했다.

창녕에서 장마제일교회 개척을 시작해놓고 신대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등록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기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지도 않은데서 거두기를 원치 않으셨다. 어느 수요일 어떤 지나가는 전도자가 와서는 이 동네에 전도를 해도 좋겠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해놓고 수요기도회 시간이 되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감기몸살로 일어날 수가 없어서 그 전도자에게 수요기도회를 좀 인도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교인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부탁한 뒤 아침은 꼭 집에 와서 드시라고 했다.

그야말로 소찬이었다. 식사를 하고 이제 떠나야 하는 시간이 왔다. 그런데 내 양심에 자꾸 부딪힘이 일었다. 네 대신 동네에 전도를 하고 수요기도회도 인도했는데 어찌 빈손으로 보내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분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일어섰다. 그가 나간 뒤 황급히 지갑을 열었다. 천 원 짜리 5개가 들어 있었다. 전 재산이었다. 봉투를 꺼내 삼천 원을 넣었다. 그런데 마음에 이런 음성이 들렸다. ‘야 3/5을 주어버리면 넌 어찌 살 건데?’ 실은 나도 대책이 없었다. 봉투에서 천원을 꺼내 내 지갑에 도로 넣었다. 그러자 ‘야! 이 도적놈아 넌 삼천 원을 가지고 전도자에게는 2천원을 주냐? 그가 너보다 더 가난한데?’ 그래서 다시 지갑에서 천원을 꺼내 봉투에 넣었다. 그러자 다시 ‘넌 어쩌려고?’한다. 그래서 항의를 했다. “도대체 나더러 어쩌라고요?” 그러자 음성이 들렸다. “네가 필요한 돈이 얼마쯤 되냐?” “몰라서 묻습니까? 등록금과 기숙사비 등 30만 원이 필요합니다.” “그럼 무얼 그리 고민을 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얼른 봉투에 삼천 원을 넣고 전도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봉투를 건네면서 부탁이 있다고 했다. 그것의 백배만 축복해 달라고 했다. 그는 ‘아니다 나는 백배는 해본 적이 없다. 만 배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니다. 나는 백배만 필요하니 꼭 백배만 해 달라고 했다. 그는 내 청을 들어 물질로는 백배를 축복해 주시고 영적으로 9,900배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떠나갔다. 하나님은 정확히 30만원을 채워주셨다. 등록하기까지 25만원을 주셔서 일단 등록을 하고 학교를 다니면서 “하나님 아직 5만 원 못 받았습니다.” 기도하기를 한 달 만에 더도 덜도 아닌 그 5만원도 채워주셨다. 3천원을 심고 30만원을 받은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박 목사님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천 목사님의 이야기를 잘못 전했습니다.”하면서 사과를 하시면서 참으로 만족해 하셨다. 아마 그 이후로 제대로 된 예화를 자신 있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희교회는 박 목사님의 부흥회 이후 씨를 심는 자들이 일어났다. 교회당을 새로 짓는 일을 위한 씨앗헌금을 하는 것이었다. 정말 어림도 없는 액수이었지만 여기저기서 헌금이 올라왔다. 그 첫 단추는 사직동교회 김철봉 목사님의 어머니 한권사님이었다. 자녀들이 주는 용돈을 고이고이 모아두었다가 교회당 건축헌금으로 씨앗을 심으신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담임목사의 마음을 결단하게 하여 교회당 건축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당시는 당회가 없어서 목사가 혼자 결정하고 건축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모두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하자고 했다. 중고등학생들도 할 수 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신문을 돌리면 한 달에 10만 원을 헌금할 수 있고 1년이면 엄청난 액수가 된다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 막내아들부터 시작하여 학생들 몇몇이 신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질적으로 가난하기 짝이 없는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지금의 연희교회당(한마음)을 증개축(신축이나 다름없는) 하였다.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박 목사님은 씨를 심도록 마음을 불러 일으켜 주신 분이었다. 천국에서 뵈올 날을 기다려 본다.

 

천헌옥 목사(코닷 편집인)

 

천헌옥  choug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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