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중심으로 산 수석대표 윌리엄 캘리 해리슨 장군을 기억하며

한국전쟁 정전협정 64주년에 즈음하여

수석대표 윌리엄 캘리 해리슨 장군: 가장 중요한 주제는 성경

이병길 목사

 

 

 

 

올해는 한국전쟁 67주년, 정전협정 64주년이 되는 해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27일(유엔군 참전의 날) 오전10시,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용리(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용리) 판문점에서 유엔 사령부 수석대표 윌리엄 켈리 해리슨 주니어(Willam Kelly Harrison, Jr. 1895-1987) 미 육군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북한 ‘인민군’ 대장 남일(南日, 1913-1976)이 협정 문서에 각각 서명함으로써 공식 효력을 발생했다.

이로써 1951년 6월, 당시 소련 측이 제안한 정전협정은 역사상 가장 긴 2년17일에 걸친 전체 765차 협상 과정을 거쳐 모두 매듭지어 진 것이다. 협정의 요점은 남·북한은 ‘최종 평화적 해결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to find a “final peaceful settlement)라는 목적과 ‘모든 무력행사를 종식시킨다’(ending all acts of armed force)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2013년 핵무기 실험과 관련하여 유엔의 제재 조치가 가해지자 ‘정전협정 무효 선언’이라는 카드를 뽑아들었다. 정전협정 후 북한은 60주년이 되는 해까지 무려 43만여 건의 협정을 위반했다니 ‘무효선언’이 사실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정전협정 다음날 양측은 모두 88,556명의 포로를 서로 교환했다. 미군은 한국전쟁 초기 미군으로서는 가장 먼저 투입된 제24보병사단 사단장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rishe Dean, 1899-1981) 소장(1950. 8. 25포로)을 포함한 3,597명, 한국군 7,862명, 영국군 945명, 터키군 229명, 기타 140명 등 12,773명, 그리고 인민군 70,183명, 중공군 5,640명 등 75,823명(Routledge)이 판문점을 통해서 남과 북으로 서로 엇갈린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전쟁 포로 교환에 이르기까지 공산 측과 힘겨운 줄다리기 협상을 해 온 유엔 수석대표의 그 ‘힘’이 어디서 왔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미국 극동사령부(FECOM) 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의 최후 로마 정복자’NYT) 별명을 가진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Gen. Mark Wayne Clark, 1896-1984)이 해리슨 장군을 정전회담 수석대표에 지명하면서 그는 ’노련한 기병대 인‘(An Old Cavalry Man)이라고 소개했다.

미국 육군 기병대는 전쟁의 기선을 제압하는 이동성, 화력, 결전력(決戰力)을 가진 부대로서, 미국 혁명전쟁은 물론, 특히 1863년 시민전쟁 중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에서 3,000명의 북부 연합군이 로버트 리(Robert E. Lee, 1807-1870) 장군이 이끄는 60,000명의 남부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남부군을 제압하고 최후의 결전을 이끌어낸 아주 유명한 부대다. 지금은 말(馬)보다 더 빠른 기계화로 발전했지만, 19세기 상항에서 말(馬)을 이용한 기병대는 평원에서 신속한 이동과 밀림을 헤치고 적진에 기습 공격으로 치명적 충격을 가하는 가공할 전력 부대다.

윌리엄 K. 해리슨 주니어 장군은 제1, 2차 세계대전과 맥아더 사령부 참모 등을 거치면서, 제8군 사령관 재직(1951. 12) 중 극동사령부(FECOM) 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에 의하여 정전회담 수석대표에 지명되었다. 해리슨 장군은 1917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용맹스러운 기병대 수료와 동시에 캘리포니아 제1기병대(1st Cavalry) 캠프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진 미 육군의 강골(强骨)이다.

윌리엄 켈리 해리슨 주니어 장군(중앙) 출처: http://www.koreanwaronline.com/history/TruceTent/Frames/157.htm

이런 해리슨 장군을 공산주의자를 상대한 협상 테이블의 적임자임을 클라크 장군이 확인시킨 셈이다.(NYT) 클라크 장군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한국전쟁 정전회담을 이끌 적임자 인선에 깊은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그러면서 클라크 장군은 ‘그러나 나는 공산주의자를 황소(Bull)의 눈으로 바라보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라는 말을 덧 붙였다. 클라크 장군은 협상 대상이 공산주의자라는데 대한 강박적 의식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클라크 장군은 공산주의 대상과 협상에서 일단 강직성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졌다.

그래서 클라크 장군이 엄선한 윌리엄 K. 해리슨 장군은 미국 제9대 윌리엄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Jr., 1773-1841) 대통령의 친손자이며, 1917년 마크 ‘웨인’ 클라크 장군, 극동사령관 리지웨이(M.B. Ridgway, 1895-1993) 장군 등과는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를 함께 졸업했으며, 후에 클라크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시절부터 잘 아는 해리슨에게 그 역사적인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이다.(NYT)

해리슨 장군은 침례교 신자로서 한 때 직속상관 더글러스 맥아더와는 달리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매일의 중심 주제는 ‘성경’이었다고 한다. 극동사령부에 근무할 당시에도 젊은 병사들에게 신앙적 모범을 보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라’라고 할 만큼 자기 신앙 관리에 철저했으며(follow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 ‘나는 아직도 군사 주제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주제인 ’성경‘(the most important subject, the Bible.)을 공부한다.’(I still study not only military subjects but what I consider the most important subject, the Bible.)라고 할 만큼 신앙 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신앙인 해리슨 장군은 휴전 협상에서 공산측 대표들이 가장 상대하기 힘든 상대로 명성을 얻었다. 공산 측 대표 남일(南日) 역시 ‘그는 매우 힘든 사람이었다’(He was a ver toughy man.)는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Daily Telegraph)는 협상 진행 ‘기간 동안 그의 인내와 결단은 솔즈베리의 후계자에게 칭찬을 받았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윌리엄 K. 해리슨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시절 ‘생도 기도문’(Cadet Prayer, 이 기도문은 Calyton E. Wheat 대령 1918-1926이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인 ‘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 당신은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자시오니, 우리가 성실하고 진리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O God, our Father, Thou Searcher of human hearts, help us to draw near to Thee in sincerity and truth)로 시작되는 기도문을 실제로 44년간 군 생활에 실천한 장군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1954년~1972년까지 장교 크리스천 펠로우십(OCF, 1943년 설립)의 회장을 맡아 적극적인 기독교 신앙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해리슨 장군은 ‘전 세계 기독교 학교 교육의 선도자’ 작가인 디 브루스 노커(D. Bruce Locker, b.1935)가 집필한 '명령 받은 남자‘『A Man Under Order』(1979)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 캘리 해리슨 장군을 기억하는 웨스트포인트 추모 글에는 이렇게 기억하며 적었다. “그는 포인트(West Point)의 이상을 수행한 아카데미 졸업생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우리는 그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를 가진 그의 완벽한 성격이 아니었고, 다만 그의 주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관되고 확고한 신앙에서였다. 그는 항상 그의 많은 축복을 믿었다.” (He was one of those Academy graduates who did fulfill the ideals of the Point. But we who knew him best knew where his real strength lay. It was not in his irreproachable character, which itself was genuine, but it was in his consistent and determined faith in his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whom he always credited for his many blessings.) 그는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성경을 읽고 신선한 통찰력을 얻기 위하여 매일 기도’한 장군으로 기억되고 있다.

‘약5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던’(HC) 한국전쟁은 아쉽지만 거의 2년간의 협상 끝에 평화협정(A Formal Peace Treaty)이 아닌, ‘정전협정’(Korea War Armistice)으로 일단 총성이 멈춘 상태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傷痕)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특히 장진호전투에서 희생된 800여 명의 카투사(KATUSA)의 생사 확인이 아직도 역사의 변두리에 방치된 것이 너무 안타깝고 가슴 저린다.

역대 어느 정권이 이들의 생사 여부 확인과 그들의 유해 봉환을 위해 노력을 했던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듣는 바에 의하면, 북한 정권 유지에 수많은 돈과 물자를 퍼 날라주고도 우리의 젊은이들의 유해 봉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일이 과연 있었던가?

남북 관계 정상화, 금강산 관광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에 앞서 우리는 북한의 남침 사과와 그동안 북한이 저지른 정전협정 위반사안에 대한 사과를 반드시 받아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남북관계는 정상화 될 수 없으며, 퍼 다주는 관계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정전협정 이후 우리가 그렇게 속아왔기 때문이다. 북한은 앞으로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적화통일 목적 달성을 위한 ‘통일전선’ 전략으로 우리를 속일 것이다. 김일성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부산을 저만치 두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자 ‘한 방’을 아쉬워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한 방’이 바로 오늘의 북핵이 아닐까 싶다. 어쨌던 한국전쟁이 평화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이 된 것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정전회담 합의 사항을 가장 먼저 전 세계에 알린 기자는 당시 한국전쟁 취재 중이던 《Los Angeles Times》의 샘 서머린(Sam Smmerlin, 1928-2017) 기자이다, 그것도 단 15초 만에 전송... (다음 기회에).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