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패밀리 전경

나는 배웠다.
‘기도해 보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의논해 보겠습니다.’ 이런 말이 긍정이 아닌 부정의 언어라는 것을. 
나 역시 누군가의 면전에서 ‘노’(NO)라는 말이 죽기보다 어색하지만 안 될 때는 안 된다고 말하기로 했다. 그게 얼마나 좌절을 안기는 ‘희망고문’이라는 것을 알아서다. 그 때 나는 다시 배웠다.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약해서’였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입당예배나 건축예배를 드리고 나면 후원금(헌금)이 뚝 끊어진다는 것을. 
이순신장군이라도 ‘건물 완공되었다는 것을 절대 알리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맞다. 그래서 인생은 언제나 ‘서두름보다 기다림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어떤 사업을 일으키건 간에 초기투자가 고갈되는 ‘죽음의 계곡’이 있음을. 
살아남기 위해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내 인생의 빙하기였다.
아직도 ‘살아남는 자가 독종인 것인지’ ‘독종이어서 살아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배웠다. 
“사실을 내게 말하면 나는 배울 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나는 믿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스토리를 말해주면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인디언의 속담이다. 건축은 벽돌로 쌓여지는 건물이 아니라 이야기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스코틀랜드 과부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빡빡하다. 어느 날 밀통을 긁다말고 흐느낀다. 곁에 있던 다섯 살 난 아들이 엄마 옷소매를 붙잡고 말한다.
“엄마, 왜 우세요. 하나님이 엄마가 밀통 긁고 있는 소리를 못 들으실까 봐서요.”
밀린 공사비, 직원들의 월급 명세서, 지인의 부고장 까지 받아들고 주머니를 박박 긁었다. 여행 끝에 남은 달라 한 장까지 긁었다. 그러다가 눈물을 쏟아냈다.
그 때 과부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인 것을 알았다. 결심했다.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만방에 선포하리이다.”(시편 118편17절~18절) 
그리고 난 배웠다. ‘소망은 고난보다 장수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긁다긁다 잊고 있었던 연금이 생각났다. 깨끗이 털기로 했다. 아내가 말했다.
‘하늘나라 연금으로 갈아타는 것 아니에요.’
그 때 난 배웠다. 여자가 남자보다 강하다는 것을. 그리고 옥합은 깨뜨려야 보배가 된다는 것을. 그렇게 또 한 달을 넘겼다. 그리고 난 배웠다. 
“인생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 고비 지나면,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문병란)는 것을.

난 배웠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겉모양만 보고 온갖 입방아를 찧어댄다는 것을.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골육종에 걸려 세상을 떠나야 했던 홀리 부처의 한 마디가 용기를 주었다.
“자신의 뉴스피드(newsfeed)에 자신을 ‘디스’하는 내용이 올라오면 그냥 지우세요. 친구든 아니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자비해지세요.”
그리고 난 배웠다. 진짜 용기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는 것임을.

배고파서 울었고 서러워서 울었다. 외로와 울었다. 내 신음소리에 울고 또 울었다. 세상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맞다. 맞다. 몰라주니까 리더가 된 거다. 리더의 그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내 마음을 이미 알았다면 그가 리더가 되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내 마음이 리더의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 그 때 나는 배웠다. 때로 짜디 짠 설움의 눈물이 내 삶의 평형수가 된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또 배웠다. 하나님은 나의 신음소리조차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가장 아픈 것은 돈이 아닌 한 순간 등 돌리고 떠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배워야 했다. 
“사람 때문에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 모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 마음 도려낼 것도 애쓸 필요도 없다. 몇 사람은 흘려보내고 또 몇 사람은 주워 담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나의 마음이 안녕하기)인 것을.
하나님은 욥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재산, 명예, 건강... 심지어 자식까지. 그러나 끝내 건드리지 않은 것 하나가 있다. 아내다. 때로 악한 소리를 해도 신성불가침으로 남겨둔다.
나는 배웠다. 인생은 마지막까지 곁에 붙어 있는 그 한 사람 사랑해 사는 것만도 벅찬 것임을.

나는 배웠다.
오마르 워싱턴 시인의 시를 흉내 내다 보면 나도 언젠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난 배웠다.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박수를 받는 것만큼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고.(바베트의 만찬 중) 

그리고 최선을 다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말할 것이다. “나를 올라온 높이로 재지 말고 헤쳐 나온 깊이로 재달라”고.

페북에 실린 송목사의 글은 많은 독자들이 공감을 표시했다. 더구나 같은 길을 걷는 목회자들에게 말이다.

A: 수많은 등록금을 주고도 배우고 깨달울 수 없는 귀한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B: 공감과 인생살이의 찡함이 매서운 추위와 맞물려 시리고 아품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C:  하나님께서 욥의 아내를 그대로 두셨다는것은 처음 듣는 그래서 확인해본 내용입니다. 욥이 욕창까지 나서 고통중에 가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기와로 긁을 때에 저주하고 죽으라고 악담을 퍼부었던 아내였는데...그 아내가 욥에겐 큰 트라우마였을것 같아요 그 한사람을 그래도 욥은 사랑하며 살았던가요?

D: 쉽게 .... 기도하겠습니다, 고민해보겠습니다, 이런 책임지지 못할 말 앞으론 남발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봅니다...감사합니다

 

이하 생략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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