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고요 수목원에서....

사랑과 예의의 상관관계  /천헌옥

지하철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나이가 있어 그런지 지하철에 오르면 빈자리를 찾게 된다. 그것도 장거리를 이동하거나 사람이 많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다행히 앉았던 승객이 다음 역에서 일어날 때는 앞에 서 있던 사람에게는 행운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그날도 그런 행운을 얻어 목적지까지 편히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자유로운 상념에 묻힐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불편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앞에 서 있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계속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나를 아는 사람인가? 내가 뭐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지퍼가 내려가 있나? 그 아주머니의 고정된 시선은 별의별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두어 정거장 갔을 때 그야말로 청천병력 같은 호통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숙녀한테 자리를 양보하셔야죠.”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이 꽂혀 있는 사람이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런 이 무슨 해괴한 일이라던가? 지금까지 나이에 불문하고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30대가 70대인 사람에게....

그런데 마침 내 옆자리에 앉았던 승객이 일어나 내리는 바람에 그녀는 내 옆자리에 와서 앉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녀의 교훈성 연설이 시작되었다. “아저씨! 이 나라는 여성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이 나라의 여성이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이런 발전을 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여성들의 희생으로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으면 당연히 남자들은 여성을 우대해 주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발전의 영광을 모두 누리고 사는 30대 후반의 여성에게는 해당되는 말은 아닌 듯 싶었다. 그래서 조용히 물었다. “댁은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소?” “개인을 따지지 말고 여성 전체를 보세요. 그러는 아저씨는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는 쌀알 하나를 세며 밥을 먹었던 시절을 견디며 살아왔소. 지금의 북한보다 더 못하는 나라를 위해 우리 세대는 그야말로 희생해 버린 세대가 아니겠소?” 

“그리고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남성이냐 여성이냐를 따지기 전에 노인을 우선해야 하고 공로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전에 얼마나 보호의 대상이냐를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소? 차라리 아저씨 제가 지금 너무 피곤합니다. 자리를 양보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했다면 기꺼이 양보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오늘의 일을 곰곰 되씹어 보았다. 서울이다 보니 참 별난 사람도 있구나에서 시작하여 그녀는 과연 어떤 교육을 받았기에 저러는 것일까? 어떤 자신감으로 그랬을까? 이 시대의 예의는 무엇일까? 도덕의 가치기준이 그새 바뀌어 버린 것인가? 오늘 나의 행동과 말은 정당했는가?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하나님이 내 생각 속에 개입해 오셨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느니라.” 다시 사랑 앞에 섰다. 사랑의 범주가 갑자기 넓어졌다. 좁았던 시야기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너무나 커서 다 쳐다볼 수도 없었다. 날아다니는 잠자리도 피어 있는 들풀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언제 다투고 헐뜯었던가? 오히려 서로 연합하고 받치는 삶이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지금도 계속해서 사랑을 부어주시고 계시기에 벌 나비들은 날개짓하고 꽃들은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도 그녀도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작품들이고 그 사랑으로 버티고 사는 존재들인데, 사랑을 빼면 아무것도 아닌데, 과연 우리의 대화 속에 그 사랑이 전제되었으며 그렇게 받치는(배려하는) 행동이 있었더란 말인가? 

갑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진정한 예의는 사랑으로 행하는 것 외에는 형식이거나 외식일 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사랑으로 행하는 그것이 예의라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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