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5년 11월 기독교보의 시론에 올린 글이다. 해외에서 12년간 지내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6년을 지나고 있는 시점에서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며 쓴 글인데 이 글을 여기에 게재하는 것은 이 글에 책임을 지는 한 행동으로 코닷의 대열에 섰기 때문이다. 코닷 안에서도 이 같은 정신으로 섬길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고지론(高地論)과 미답지론(未踏地論)”


몇 년 전에 의식 있는 기독청년들 사이에서 고지론과 미답지론의 논쟁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고지론은 보다 높은 자리 혹은 한가운데로 가면 갈수록 더 큰 영향력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고 미답지론은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자리가 고지나 중앙이 아니라 낮은 자리나 변두리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고지론과 미답지론 중에서 하나님과 성경이 어느 것을 더 선호하는가 하는 쪽으로 논쟁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고지로 올라가도록 하시며 어떤 사람에게는 미답지로 가게 하시는 것 아니냐고 적당하게 타협하는 쪽으로 가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다시 고지든 변두리든 있는 자리에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소명이라는 지극히 관습적인 전통으로 회귀했다. 어떤 주장이 잠시 반짝이는 것 같지만 그것도 역시 그렇고 그런 것이며 결국 어느 것도 해 아래 새 것이 아님을 수긍했다.

정말 그 정도로 결론을 내리면 풀리는 문제인가? 논쟁의 기가 한풀 꺾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양자간에는 갈등과 대립이 남아있다. 긍정적으로 얘기하면 둘 사이에는 창조적 긴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을 바르게 살고자 생각하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이 두 가지 견해 사이에서 어느 정도 불편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요한복음 5장의 기사는 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다. 치유의 장소는 베데스다(자비의 집) 연못의 행각이었다. 거기에는 온갖 병자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본문의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으로 이동된다. 이유는 예수님으로부터 고침 받아 건강하게 된 그 남자가 성전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원했던 38년만의 방문일까? 어쨌든 당당한 방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만나 조심하라고 하셨다. 성전에 오른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더 큰 이유는 성전에 버티고 있던 종교 권력자들이나 성전에 오르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유대인들처럼 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자로 있을 때보다 건강할 때가 더욱 죄 짓기 좋을 때며 베데스다보다 예루살렘 성전이 더욱 죄에 오염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문은 아주 대조적으로 두 장소를 독자들에게 차례로 비추어준다. 베데스다 행각과 예루살렘 성전.

갈릴리에 비하면 예루살렘은 고지요 중앙이다. 소위 출세하려면 예루살렘에 입성해야 한다. 하지만 예루살렘에도 중앙이 있고 변두리가 있다. 예루살렘 수도에도 예루살렘 성전과 베데스다 행각이 공존한다. 예수님께서 두 곳을 의도적으로 방문하셨다. 누구나 가고 싶은 고지도 오르셨고 가족이라도 멀리하고 싶은 미답지도 방문하셨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변두리에서 주로 시간을 많이 보내셨다. 대신에 이스라엘의 중앙이었던 예루살렘에는 가끔씩 방문하셨다. 이것이 고지와 미답지 중 어디가 더 중요한 곳인지를 결정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에게는 두 곳 다 중요한 곳이었다. 그 곳에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 사명지에서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사명은 달랐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성전과 베데스다 연못을 방문하신 그 목적에 차이가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것은 경고와 심판을 선언하시기 위해서였다. 대신에 베데스다 연못을 찾으신 것은 치유와 희망을 선포하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 축제의 피크였던 안식일에 자칭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들의 죄를 폭로하고자 성전으로 오르셨다. 그러나 성전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죄와 질병으로 주눅 들어있는 한 영혼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야외병동으로 가셨다. 많은 병자들이 그곳에 즐비했건만 한 사람만 고치신 것은 육신의 질병을 고친다고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선에 질병부터 고쳐놓고 보자는 식으로 예수님은 사역하지 않으셨다. 온전한 치유가 목적이셨기에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셨다. 아주 비효율적으로!

더구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셔서 참된 안식을 주신 것 때문에 그때부터 건강한(?) 유대인들로부터 핍박 받기 시작했다. 안식일 날 성전에서 성전의 주인 되신 주님이 핍박을 받으셨다는 것은 정말 큰 아이러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은 바로 그 성전 가까이에서 심문을 받아 죽을 죄인으로 선고 받고 성문 밖으로 내몰려서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예수님처럼, 고지(중앙)에 진입하는 자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곳이 정말 위험천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질 대로 높아진 이론들과 교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순교할 각오하고 들어가야 한다. 대신에 변두리 쪽은 개척자로 가야 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실패한 자들에게 격려와 희망을 주기 위해 가능한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들어가야 한다.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예수님처럼, 고지로 가더라도 자주 미답지를 들러야 한다. 미답지로 나아가 거기서 산다 해도 때로는 고지를 방문해야 한다. 특히 고지에 마냥 앉아 기득권에 길들여지고 있는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 마음의 방향을 미답지로 거세게 돌이켜 모험과 개척의 길을 가려고 부단히 애써야 한다. 싸워야 할 때와 격려해야 할 때, 선지자가 되어야 할 때와 제사장이 되어야 할 때,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할 때와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야 할 때를 잘 알고 때마다 일마다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 더욱 영적인 분별력과 불굴의 용기가 필요한 때다. 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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