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채 목사(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회장, 사단법인 여명 이사장, 바른교회 아카데미 이사장, 본지 발행인)

요즘 본보에는 인터콥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논란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은 소수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사람들은 매우 많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런 논란 속에서 어떤 이들은 코닷의 발행인인 필자가 인터콥을 두둔한다며 비판도 하고 비난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가운데서라도 이 논쟁이 감정적으로나 단순한 시비에 그치지 않고 찬반 간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다.

한국교회와 인터콥과의 관계에서 필자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신학을 취소하고 수정한다 - 다른 말로 하면 회개한다.”고 해도 이를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필자는 인터콥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 필자에겐 그럴만한 능력도 없고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다 - 잘못된 신학 사상을 취소하고 수정한다고 하였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끝까지 정죄하고 배척하는 자세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콥이 잘못된 것으로 지적받은 주장이나 사상을 단순히 말로만 취소하고 수정한다고 한 것은 아니다. 3년 이상 한국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인터콥을 지도하였고, 그 대표자로 하여금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도록 조치하고, 그와 그 단체의 신학 지도를 맡은 기관이 더 이상 신학적인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거기다 그 단체의 영성을 뒷받침하고 실제적인 일을 주장하는 이사장과 이사들을 교계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로 바꾸도록까지 했다. 인터콥은 이를 끝까지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여러 가지 이유들을 붙여 그들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인가? 뭘 어떻게 해야 용서하고 용납한단 말인가? 당시 필자는 이를 보면서 ‘이렇다면 과연 교회가 말하는 회개는 무엇이며 교회가 죄인들을 용서하고 용납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한국교회의 이런 태도를 보며 진노하시지는 않으실까?

한국교회사에서 지금까지 누가 잘못된 신학을 가르치고 주장하다가 교회의 지적을 받고 그것을 취소하고 수정하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나? 자기주장을 수정하겠다고 할 뿐 아니라 올바른 신학을 배우고 지도를 받겠다고 나선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나? 출판된 자기 서적들을 회수하여 폐기한 사람이 대관절 몇이나 되는가? 그런데 이 모든 조치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지도를 받은 사람을 끝까지 정죄하여 다시 내쫓는단 말인가?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의 회개와 아버지의 용서를 가르치시면서 동시에 큰아들의 잘못된 마음을 책망하셨다. 사실 이 비유의 초점은 여기 큰아들에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로 상징되는 큰아들은 그의 동생이 돌아왔을 때,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런 아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잔치를 베풀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며 아버지를 빈정대며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악함을 책망하셨다. 필자도 감히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가졌다고 생각한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왜 이웃에 창피하게 이 더러운 누더기를 입고 돌아왔느냐? 집에 돌아오려면 목욕이라도 좀 하고 오지 이 냄새 나는 몸뚱이를 그대로 갖고 왔느냐? 가져간 그 많은 돈은 다 어떻게 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이 뭐라고 용서를 비는 말을 했지만, 아버지는 그 말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하며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또 그에게 새 옷을 내다 입히고 신발을 신겼으며 손에는 가락지를 끼웠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배설하였다. 이 비유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에서 앞의 비유와 거의 같은 의미의 비유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는 쉽게 하면서도 남을 용서할 줄은 모르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거듭 책망하셨다. 곧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주인에게 애원하여 그 빚을 다 탕감받았다. 그런데 탕감받고 나가던 바로 그 길에서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고 닦달하고, 애원하며 빚을 갚겠다고 간청하는 그의 멱살을 잡아끌고 가서 기어이 그를 감옥에 처넣었다. 이를 들은 임금은 진노하여 일만 달란트의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 넘기라고 하였다.

필자는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들에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온갖 세속적인 사상에다 타락과 부패로 물들어 있는 지도자들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돌이키기는커녕 -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 세리와 창녀들이야말로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로 정죄하였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이 모습이야말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끌어와 감옥에 가둔 행위와 무엇이 다를까?

물론 필자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들의 연구보고서를 완전히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 연구내용이 최바울 선교사가 자기의 잘못된 신학 사상을 취소하고 수정하겠다고 한 내용을 중시하기보다 그 이전에 있었던 사상들에 더 무게를 두고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본인을 대면한 직접적인 심문이 없었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미 사이비 이단으로 객관적으로 드러나 사람이 아니라면, 그를 불건전하다고 판단하기 전에 직접 만나 심문해봐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교훈일 뿐 아니라 만국 통상규례가 아닌가?

예를 들어 신천지 같은 이단은 그 대표를 불러다 물어보거나 확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최바울 선교사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그가 면접을 거절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한국교회의 지도를 받겠다고 자원한 사람이며, 그것도 고신으로부터 신학적인 지도를 받기 원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와 그가 대표로 있는 기관을 불건전하다고 판단하면서도 왜 본인에게 소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신대원 교수들에게 수정된 인터콥 신학에 대한 재검토를 간곡히 요청하는 바이다.

그리고 인터콥 선교회 회원들이 선교현장이나 교회에서 소위 “말썽”을 일으킨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일찍이 필자도 이런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가 제대로 모르던 가운데 인터넷 집회에 참여하는 우리 교인들이 많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필자는 그때 새삼스럽게 인터콥에 관심을 가지고 최 선교사의 저술이나 가르침을 살펴보기 시작하였고, 거기서 신학적인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거기에 참여하는 일을 금하였다. 그때 필자의 지도에 반발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후에 최 선교사가 위에서 밝힌 내용처럼 잘못을 수정하고 돌이켰다는 말을 듣고, 교인들에게 과거에 인터콥의 잘못된 신학의 문제점을 교육한 후 참여를 허용하였다. 지금은 그들의 대부분이 교회에서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며 열심히 섬기고 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꾸준히 지도하고 교육해야 할 과제라고 본다.

또한, 필자는 최바울 선교사가 서영국 목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일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필자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최 선교사와의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해외에 체류 중이어서 제대로 접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취재한 바로는 그 고소를 최 선교사가 주도했다기보다 서 목사가 강의했던 영동교회(통합측)의 교인들(인터콥에 참여하는)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서 목사가 최 선교사를 “사이비 목사라도 되는 것처럼 비난하였으므로”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사이비 이단자를 따르는 불순한 사람들인 것처럼 명예훼손을 당했다는 이유에서다. 최 선교사가 귀국하면 이 문제로 접촉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필자의 주장은 하나다. 돌아온 탕자(최바울 선교사나 인터콥이 탕자란 말은 아니다)를 다시 쫓아내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를 맞아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고, 아들로 그 신분을 회복시켰던 아버지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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