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가 활개 치는 역사 앞에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

명성교회 세습 합헌 결정이 났다. 총회 재판부는 8:7로 김하나 목사의 위임이 정당하다고 판결을 했다. 소위 명성교회 세습은 절차적 정당성을 얻었다. 그러면 전부인가? 절차적 정당성에 하자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은퇴한 목사"와 "은퇴하는 목사"가 세습 방지법의 취지에서 그렇게 다른가 이다.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위에 서 있다

교회는 복음 위에 서 있다. 교회의 시행 세법은 복음적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고, 그 절차적 정당성을 통해서 복음에 근거한 교회적 질서를 구현한다. 그런데 이번 결정이 복음에 합당한 결정인가를 질문해 본다. 아들 김하나 목사가 아버지 교회를 이어서 목회하는 것이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교회의 창립자이자 머리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교회의 모습이 명성교회 세습에 뿌리를 박고 있는가? 복음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김삼환 목사는 2015년 35주년 기념행사에서 지게를 지고 머슴의 복장으로 강단에 올라서 무릎을 꿇었다. 섬김의 목회가 그의 지향점이고, 그것이 그에게 십자가를 지는 삶이었다. 옳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지게를 진 섬김의 삶이다. 그런데 아들에게 세습하는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물의들을 짊어지는 것이 과연 십자가를 지는 것인가? 그것이 복음의 정신인가? 김하나 목사는 공석에서 세습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발언을 했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십자가를 지는 복음적인 모습이 명성교회 담임목사의 청빙과정에 과연 개입이 되었는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로마가 지배하는 시대에 로마의 질서(Pax Romana)에 배반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명성교회가 김삼환 목사의 아들인 김하나 목사를 청빙하는 과정이 과연 세상의 질서와 단절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질서를 수용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코닷연구위원장, 미포사무총장)

복음은 역사적 현실에 적응해서 이해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그 복음이 역사의 현장에 자리를 잡을 때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고린도교회가 도와야 한다고 말할 때, 복음은 이렇게 상황 속으로 내려와서 이해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예수님의 성육신의 복음은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하심으로 상황으로 내려왔다. 예수님의 복음은 이렇게 역사 현실 속에서 이해되어 왔다.

빌립보 교회가 순두게와 유오디아가 두 여인의 다툼으로 인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바울은 복음을 이 역사 현장으로 내려 보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빌립보 교회에게 말한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의 현장 즉 다른 마음을 품었기에 바울은 같은 마음을 가지라고 권했다(빌4:2). 그런데 같은 마음은 둘이 타협하는 것인가?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복음의 마음이다. 복음의 마음은 이 역사적 현실에서 자기를 상대방보다 낮추어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자신의 삶의 현실에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가 고기를 먹는 문제와 날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로 분쟁이 있는 역사 현장에 해결의 방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서로 뜻이 같기를 구한다(롬15:5).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남의 약점을 비방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의 약점과 비방을 짊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남의 약점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비방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약점을 비방하는 현장을 복음으로 수습한다.

금수저 상황에서 복음적 적용의 길: 거룩한 분리와 공평

과연 명성교회 세습과 그에 따른 일련의 교회적 결정(당회, 공동의회, 그리고 노회와 총회 재판부에 이르기까지)이 복음을 잘 적용한 것일까? 오늘 이 시대에 세습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명성교회는 복음적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복음과 십자가를 지는 머슴의 섬김은 역사성을 가져야 한다. 명성교회의 현실이 재벌들의 세습과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다양한 구조적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러나 똑 같다고 보는 현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청년실업 비율이 상당하다. 그리고 많은 청년들이 알바를 하면서 삶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반대로 금수저라는 이름으로 사는 반대편의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복잡하게 살지 않을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것만해도 시간이 모자란다는 메시지의 광고가 있다. 교회는 이런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는 결정과정을 거치는 것이 바로 복음에 배반하는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과 명성교회의 결정이 무엇이 다른 길을 가는가? 복음의 십자가를 지는 섬김(머슴)의 길은 이 시대의 길을 역행해야만 한다. 과연 명성교회 세습이 금수저의 길을 역행하고 있는가? 명성교회 담임을 하는 것이 최고로 어려운 짐을 지는 것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복음이 가져야할 역사적 책임성을 철저히 외면한 결정이다. 예장 통합측 교회는 복음이 가진 역사성을 외면하지 않는 교회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철저히 세속적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이 가진 거룩성 즉 세상과의 차별성과 분리가 없다.

단순하게 세상과의 분리가 없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세상과의 분리를 된 십자가의 길로서 복음의 길은 세상에서 게토가 되기 위한 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세상을 위로하기 위해서 분리를 추구하는 것이 십자가의 거룩성이다. 세상과 다름으로 세상 속에서 지친 인생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소망을 주는 것이 교회가 가진 복음의 역사성이다.

교회의 거룩한 분리, 차별성, 다름이 세상에 왜 위로가 되는가? 세상이 금수저를 소망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88세대라는 말로 표현되는 청년들의 현실을 반대로 말해주고 있다. 재벌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즉 금수저를 물었다는 말로 표현되는 시대의 아픔에 오늘의 교회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승하는 과정에서 복음의 질서가 어떻게 자리 잡아야 하는가를 외면한 것이다. 교회의 결정은 이런 차별과 불공평과 불공정이 있는 역사 현실에서 복음이 가진 초월성으로 시대와는 다른 길을 걸어감으로 세상과는 차별되는 의로운 질서가 확보되어야 했다. 그래야 세상이 교회의 다름을 통해서 복음이 가진 위로와 격려를 소망으로 보게 된다.

차별은 게토화를 지향하는 삶이 아니다. 머슴으로 섬기는 십자가를 지는 복음의 길과 결정들은 성공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다른 길을 걷는 것이며, 그 길에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와 인자하심이 담기게 된다. 세습적 길이 아닌 것을 통해서 교회는 공의롭고 인자한 하나님의 복음의 길을 보여주고 섬기게 된다.

명성교회의 세습과 예장 통합 교회의 결정은 이 시대 속에서 복음의 빛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지난 시대 속에서 머슴같이 섬기면서 시대를 짐진 것이 새로운 시대적 과제 앞에서 무릎을 끊은 것이다. 참으로 아픈 결정이다. 역사 속에서 복음이 자기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는 일을 게을리 할때 역사적 소임이 끝나게 된다. 촛대가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늘 역사 앞에 반성하면서 회개하면서 스스로가 복음 앞에 서 있는 가를 질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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