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득 교수, 이단(異端)에서 단(端)의 의미

옥성득 (UCLA, 한국기독교 석좌교수)

9월 11일부터 열리는 예장고신 68회 총회에 이단성을 조사해 달라는 2건의 안건이 상정되었다고 한다. 이 글은 안건 자체를 논의하는 대신 다음 세 가지를 질문하고 간단히 답하려고 한다. 첫째, 이단이란 무엇인가? 둘째, 한국 교회에는 왜 이단이 많은가? 셋째, 이단 고발이 고려파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될까?

이단에서 端의 의미

교회에서 이단을 설명할 때 그 한자(漢字)의 의미로 설명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단(異端)이란 다를 이(異), 끝 단(端)으로 하여 ‘끝이 다른’ 교리나 그 교리를 신봉하는 집단으로 설명한다. 즉 “이단이란 출발은 동일하였으나 어느 순간 정통에서 떠나 잘못된 길로 빠져 끝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정의 때문에 그동안 한국교회에서는 교리나 신학이 약간만 다르면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단의 ‘단’(端)은 끝부분(결론, 마지막)이 아니라 단서(端緖)라는 말에서 보듯이 실마리(출발, 시작) 곧 근본이나 근원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맹자의 사단(四端) 첫 구절은 “惻隱之心仁之端也.” 측은한 마음이 인의 근원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에는 하늘이 준 인의 근본이 있어서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면 건져 주는 착한 일을 하게 된다는 성선설을 주장했다. 인간 본성이 발현될 수 있는 실마리(端緖)가 있어서 사람은 짐승과 근본이 다르게 된다. 여기서 성선설은 논외로 치고, 사단(四端)이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단’의 의미는 끝부분이 아니라 시작되는 근원 부분을 말한다.

성경으로 가 보자. 이단에 대해 언급하는 요한일서2:18~19절이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은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여기서 요한은 적그리스도에 속한 이단 집단이 외형은 비슷하나 그 뿌리가 적그리스도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근본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짐승과 인간(맹자의 설명을 빌리자면)의 차이요,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요한의 설명)의 차이가 난다.

통일교 이후 여러 이단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몰래 숨어 있다가 양들을 훔쳐서 나간다. 그들은 같은 뿌리, 같은 영에서 출발했다가 어느 순간 샛길로 빠져 끝이 다른 이단이 된 것이 아니라, 첫 출발부터 근원 동기와 목표가 다른 집단이기에 이단이다.

출발 지점에서는 각도 1도 차이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달까지 가는 우주선을 그 각도로 잘못 쏘면 그것은 영원한 우주의 미아가 될 것이다. 출발선에서는 그것이 마치 미세한 차이로 보이지만 그 우주선 끝(端)이 향하는 목표 지점은 수 백만 광년의 차이가 날 것이다. 이단은 교회와 그렇게 다른 집단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변에서 신학의 끝부분, 곧 교단 밖이나 안에서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 차이나 교리--개혁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 은사 중지론과 은사 지속론과 같은 성령론의 문제, 침례만 옳은가, 유아세례를 줄 수 있는가, 예배 시간에 기타를 쳐도 되는가 등과 같은 의례의 문제, 혹은 여성 안수 문제 등--때문에 서로 이단으로 몰아가는 ‘마녀사냥’이 있다면, 이는 ‘이단’의 ‘단’자를 오해한 것이다.

한국 교회에는 왜 이단이 많을까?

이것은 왜 한국 정치에는 대립과 분열이 많은가와 비슷한 질문이다. 지난 100년간 식민지, 분단과 전쟁, 압축 성장, 정체 등을 경험한 한국은 합리적, 점진적, 안정적인 사회가 아니라 열정적, 돌변적, 동적인 사회이다. 그 극한 변화와 경쟁 속에서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나 모두 상처와 한과 고난이 많고, 여유와 쉼과 배려가 적다. 고함치는 극단 노선이 이기고 조용한 중도 노선은 설 자리가 없다.

그런 세월을 보낸 한국의 중노년 남성들은 마음이 굳어 있다. 삶에 재미가 없다. 모노톤 목소리에 동일 패션에 불변의 머리 스타일이다. 집중하고 몰두해야 느낄 수 있는 재미와 희열과 성숙이 없다. 여행을 가도 사진 찍고 다음 장소로 가는데 바쁘고 차에서는 자고(주마간산도 아닌 走馬熟眠) 호텔에서는 논다.

그래서 적을 만들고 공격할 때 집중하게 되고 희열을 느끼는 중년 남성들이 많다. 그들이 한국 종교와 한국 정치를 분열시키고 있다.

한 쪽에는 130년이 지나자 제도 종교로 굳어진 교단 지도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고난 속에서 여러 종교들을 선택적으로 의존하는 민중이 있다. 후자 가운데 일하고 치유하고 도와주려는 목회자는 신학적 혼합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21세기 한국 종교문화는 전근대-근대-탈근대가 공존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이 복잡한 상황을 손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근본주의적 이분법이다. 아군(정통)과 적군(이단)으로 나누고, 적을 공격하는 흑백논리는 구세대에게 어울리는 사고방식이다. 19세기 말 정통주자학에 젖은 유생들이 위정척사(衛正斥邪, 정통 방위와 이단 척결)를 내세운 것과 같다. 한 시대에 적절했던 이념도 새 시대에는 불통이 된다. 성리학이 비록 도덕성과 예의염치는 주었으나, 새 학문에 새 노래를 부르며 새 박자에 새 춤을 추는 재미는 주지 못했다.

왜 한국교회에 이단 시비가 많은가? 그 근저에는 새로이 집중 몰두할 대상이나 화두가 없어서 신앙생활에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개똥벌레 나는 숲속 길을 걸어가 모닥불을 피우고 삶과 예수를 이야기하던 청춘 때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유튜브 틀어놓고 매일 같은 목소리 같은 내용을 들으며 자판이나 치면 삶에 싱싱한 활력소가 빠져나간다. 정통론에 빠지는 이유는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의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적을 만들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이단 고발이 고려파 정체성 확립과 교회 생태계에 도움이 될까?

얼마 전 김순성 교수는 전국장로부부수련회에서 “고신 영성과 고신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강의했다. 그는 고려파 영성의 특징 6개 중 첫 번째를 말씀 공부와 기도를 통한 체험적 영성으로 꼽았다. 성령 충만하면 기쁨, 평안, 감격, 감사, 눈물이 있는데, 고신이 이 영성을 회복할 때 재미있는 교단, 삶에 생기가 넘치는 교단이 될 것이다.

고려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그런 생체험이 넘치는, 싱싱한 비늘이 파닥거리는 물고기와 같은 교단이 되면 좋겠다.

갓 의대를 나온 인턴이 더러운 담요를 덮고 자는 거지를 보고, 더러운 담요를 덮으면 병에 걸린다고 설명하고 담요를 걷어 가지고 갔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책에서 배운 대로 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거지는 밤새 떨면서 자다가 얼어 죽었다. 더러운 담요를 걷어가는 것보다 새 담요를 주어야 한다. 거지에게 새 담요의 좋은 점에 대해 강의를 하거나, 새 담요의 생산 과정과 유통 과정을 설명하지 말고, 새 담요를 주어야 한다.

부부가 생각이 다르고 싸운다고 이혼하는 것은 아니다. 책 한 권, 비디오 몇 개를 보고 이단 심사하자고 하는 것은 신혼부부가 다투었다고 이혼하자는 꼴이다. 시찰에서 그런 안건이 올라와도 노회에서 기각시키는 안목이 필요하다. 총회가 남의 사생활까지 판단하는 곳이 되면, 교단의 위신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생태계만 어지럽게 만들 뿐이다.

총회가 강도 만난 한국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는데, 모여서 겨우 교리논쟁 이단규정 정통놀이나 하자는 것인가? 고신이 정통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교리적 문제도 없는데 타 교단 목사를 이단으로 잡는다면 비웃음만 살 것이다.

고신이 지켜야 할 정통은 신사참배 거부 전통에서 보여준 '하나님 앞에' 선 자유로운 단독자로서의 주체성이요, 개혁신앙 수호 운동에서 보여준 세속주의와 싸우는 전투적 개혁성이요,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며 체험이 있는 영성을 바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봉사성에 있다.

총회는 과유불급인 이단조사 안건을 기각하고, 대신 고려파 정체성 확립과 영성 성숙 방안을 숙고하라. 죽어가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 개혁안에 집중하라. 사회적 약자를 돌보기 위한 방안 마련에 몰두하라. 그리하여 재미있고 살아있는 고려파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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