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문이 미국 버지니아대 문리대학장이 된 한인 교수를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딸이라고 보도했다가 정정기사를 내는 해프닝이 최근에 있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 실린 내용을 검증 없이 인용했다가 일어난 실수라고 했다. 사실이야 어떻든 오랜만에 신문지상에 오른 우장춘이란 이름은 긴 여운을 남긴다.

우장춘(1898∼1959)은 식물 종자를 개량하는 학문인 육종학(育種學)을 국내에 전파한 인물이다. 대한민국 건국 후 정부는 범국민적인 환국운동을 벌인 끝에 우장춘을 데려왔다. 그는 일본에 의존하던 배추와 무의 우량 종자를 개발해 자급할 수 있도록 했고, 제주도를 밀감 재배지로 만들었으며, 벼와 감자 종자 개량에 몰두하던 중 사망했다. 요컨대 한국 농업을 근대화시킨 인물로 부산에는 우장춘기념관까지 있다.

1950년 3월 가족을 일본에 두고 단신 귀국한 그를 이승만 대통령은 "오오. 네가 바로 우범선의 아들이냐"며 환대했다고 한다. 우범선은 대원군과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공모해 민비(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를 살해한 을미사변에 휘하의 훈련대 병력을 이끌고 가담한 인물이다. 후에 일본 망명 중 순종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우장춘은 그가 일본 여성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다.

조국에서 아버지 우범선의 전력은 우장춘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를 모르는 게 조금 불편했고, 1953년 노모가 위독할 때 그를 일본에 보냈다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우려한 한국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았고 결국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일이 차별이라면 차별일까. 신생 대한민국은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우장춘을 간절히 원했고 끝까지 그의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1948년 제헌국회는 신생국가의 국호와 정체를 정하는 헌법을 심의하면서 국회의원 어느 누구도 망한 조선 왕조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의 뒤를 이은 구한말 개화파의 막내였다. 대한민국은 1884년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난 지 64년만에 세워진 개화당의 나라였다. 동학에도 참여했고,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본군 장교를 맨주먹으로 살해한 백범 김구와 그의 정파는 총선거를 보이콧해 건국 과정에서 배제됐다.

대원군 시절에 시작된 개화냐 쇄국이냐의 갈등은 150년이 흐른 지금도 진행형이다. 박정희 시대에는 외자유치, 무역입국 노선과 반대측의 수입대체산업론이 맞섰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한·미 동맹파와 북한의 우리민족끼리 주장에 동조하는 자주파가 대결했다. 남과 북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남한은 개방, 북한은 쇄국 체제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 역시 개방이냐 쇄국이냐의 갈등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반대, 나아가 반미 운동의 일환이다. '한국인 94.3%가 인간 광우병에 걸릴 수 있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검증되지 않은 논문 한 편이 방송되자 중·고등학생들까지 학교 급식에 미국산 쇠고기가 나올 것을 우려해 촛불시위에 대대적으로 참가했다.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과정에서 중국 유학생들의 폭력 행사를 두고 중국의 민족주의 과잉을 나무란 게 우리다. 그 나무람은 불과 며칠 후 우리의 일이 되고 말았다. 도심에서 연일 벌어진 대규모 촛불 시위에 때를 만난 반미 단체들의 선동이 기름을 부었다. 고등학생이 발의한 인터넷 탄핵 서명 운동이며, '미친 소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겠다'는 지각없는 연예인의 발언까지 청소년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다. 여기에 야당까지 가세해 국론이 분열될 정도로 소동을 벌이는 한국인의 모습은 유별나고 비이성적이다.

올림픽 성화를 지키려 한 중국의 민족주의는 세계를 향해 발산되기라도 했지만 우리의 민족주의는 내부적이고 소모적이다. 우리는 중국만도 못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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