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아파한다. 대자연의 진노 앞에 인간이 공포에 떨고 있다. 수십만 명의 애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태풍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휩쓴 미얀마와 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대지진이 흔들고 간 중국 쓰촨성은 남의 일이 아니다. 대재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도 엄습할 수 있다. 늘 깨어서 경계해야 한다.

요즈음 우리는 조류인플루엔자와 광우병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생태계의 순환질서가 어긋나 생겨난 재앙이다. 땅과 물과 공기와 동물과 식물이 병들고 오염되어 신음한다. 자연 생태계의 파괴는 가히 목불인견이다. 이제 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다.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을 여행해 보면 무심하리만치 자연을 방치해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결코 나태함에서 나온 방치가 아니다. 지혜에서 나온 보존이다. 얼마 전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타고 남하하니 갖가지 천연 광물들을 함유한 울긋불긋한 돌산들이 그대로 있었다. 처음에 그들의 무지와 나태를 조롱했지만 도리어 그들의 미개발이 고마웠다. 자연을 착취해서 조금 잘 사는 것보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즐기는 것이 훨씬 더 값진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담론은 생명운동이요, 생태환경 보존운동이다. 여하한 생명경시 현상도 타파하고 일체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 여기에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다. 특히 인간의 젖줄인 자연 생태계가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자연의 무분별한 개발과 착취의 이면에는 유대-기독교의 인간중심적인 구원관이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자연을 줄기차게 정복하고 이용해서 인간은 눈부신 문명의 진보와 과학기술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제는 아니다.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창세기 1장의 서른 한 구절들 중에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겨우 한 번 나오지만 보시기에 좋으셨다는 말씀은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된다. 자연생태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흐뭇한 인격적 감탄의 대상이지 인간이 마음대로 훼손할 손쉬운 대상이 아니다. 자연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배(dominion)로서의 세계관은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연의 선하고 책임적인 관리자(stewards)가 되기를 원하신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우주적 구속론을 전개하듯이 자유와 해방을 기다리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피조 세계 전체가 구속을 기다리며 신음한다.

이탈리아 아씨시의 프란체스코는 해와 달과 새들과 짐승들과 꽃들을 형제자매로 불렀다. 아들과 딸로 하대하지 않았고 평등한 용어들만 골라 썼다. 자연만물이 하나님의 거룩한 몸인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신음하는 자연이 또 다른 프란체스코를 목메어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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