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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교수, 3.1운동과 기독교한목협 2019 신년 열린대화마당 발제 글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이성구 목사)는 지난 18일 ‘2019 신년감사예배와 제38차 열린대화마당'을 연동교회 본당에서 열었다. 발제자로 나선 이만열 박사(前 숙명여대 교수, 現 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회장)는 “3.1운동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이 강의했다.

3.1운동과 기독교

이만열[김교신선생기념사업회 회장]

 

1.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지방의 7개 지역에서〈독립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작하여, 그 뒤 1년여에 걸쳐 우리나라 안과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까지 확산된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일컫는다.

 

A. 민족사적 의의

가. 한말 이래 민주주의운동은 위정척사운동, 개화운동, 민중운동 등으로 나눠져 침략세력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3.1운동을 계기로 이들 제 세력이 통합되어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때에 와서 종교, 이념, 지역, 신분, 혈통, 남녀, 노소를 뛰어넘어 민족독립이라는 대의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단결된 민족운동 역량이 큰 호수를 만들고 거기서 다시 독립운동의 큰 물줄기를 내뿜을 수 있었다.

나. 한성·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와 함께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 해 4월 11일 창건되어, 일제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을 추진할 수 있는 거족적인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다.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무장독립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3.1운동을 전후하여 북간도에서는 국민군회,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대한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거느린 독립군 부대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500여 명을 사살했고, 같은 해 청산리전투에서는 김좌진 장군과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 1,200여 명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한편 국내의 민족운동에도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한국인의 고등교육을 위한 민립대학기성회의 조직을 비롯하여 한국산 물품 애용과 근검·절제운동 등의 실력양성운동을 일으켜 백성을 깨우치고 독립을 준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라. 특히 3.1운동은 항일독립운동 못지 않게 민주운동사상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것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 이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그 뒤 대한민국의 국가적 이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손병희·이승훈 등이 일본 재판장의 신문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전까지는 독립운동을 해도 옛 왕조를 회복하겠다는 정도의 '복벽운동'(復辟運動)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3.1운동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도자들은 그 다음 단계인 국가 수립의 단계에서 민주공화정 국가를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이념이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에 '민주공화정'으로 정착하였다.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 3.1운동 전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민 지도자가 거의 없었는데, 3.1운동을 계기로 이 땅에서 양반 귀족지도자 대신 평민지도자가 민족운동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 3.1운동 지도자만 해도 귀족이나 명망가가 아니라 평민 출신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것이다. 3.1운동은 이렇게 한국 사회에 지도자를 교체시키고 있었다.

바. 강점 후 일제는 한국민을 두고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 하지 않는 나약한 열등민족이라고 했는가 하면,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열복(悅服)한다고까지 세계에 선전했다. 3.1운동은 우선 일본의 이러한 선전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3.1운동을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집약하여 한국 민족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삼았던 것이다.

 

B. 세계사적 의의

가. 세계는 당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00여일 만에 일어난 것으로 베르사이유 체제가 출범하려 하였다. 이는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전승국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를 재편성하려는 움직임으로 여기에는 패전한 나라들의 구식민지에 대해서는 민족자결권을 허락하는 듯했으나, 전승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민족자결권을 암시하지 않아 계속 피압박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당시 전승국 대열에 끼어 있는 일제에 항거함으로 1차 세계대전 후의 전승국 중심의 침략·강권 질서를 비판하였다. 바로 이것은 피압박민족의 입장에서는 세계 최초의 항거였다. 이렇게 함으로 1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 중심의 침략·강권적인 국제질서 재편성에 도전하였다.

나. 우리의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세계의 피압박 약소국가들은 그들의 해방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해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5.4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한국을 본받자는 구호를 외쳤다.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를 중심으로 비폭력·무저항의 '샤타 그라하'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영국에 대한 독립운동이었다. 필리핀·베트남·이집트 등지의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다. 3.1운동은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를 강조하고 있다. <3.1독립선언서〉에는 '민족의 자주·자존'을 강조함과 동시에 '민족주의'가 빠질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목이 보인다. 민족의 자주·자존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하면 다른 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이기 쉬운데, 우리의〈3.1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동양의 평화,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의 틀 속에서 강조하고 있다. 또 우리의 적대국이었던 일본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공존(共存)과 호혜(互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시 피압박 상태에 있던 우리 민족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3.1운동에서 한국 기독교의 역할

A. 준비(점화) 단계

가. 평양의 선우혁과 서울의 이갑성에 의해 기독교 중심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이 준비되었으며, 이것이 1919년 2월 달에 들어 기독교 지도자인 이승훈 장로에 의해 천도교·불교와 합류,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대 발전하게 되었다.

나. 2.8독립선언의 경우, 주체는 학우회(學友會)였지만 그 실체는 송계백·서춘·백관수·윤창석·김도연 등 기독교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재일한국 YMCA 총무 백남훈이 있었으며, 장소도 재동경(在東京) YMCA였다. 이 선언의 모체와 관련, 장로교·감리교는 YMCA를 중심으로 재일한인교회를 성립시켰음을 주목해야 한다.

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48인 가운데 24인이 기독교인이었다.

라. 선언서에 나타난 독립사상은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관과 인류공존을 지향하는 비폭력적 평화이다. 이러한 사상에 대해 독립선언 초안자인 최남선은 선언서의 내용이 기독교 이념과 관련됨을 증언하였다.

마. 자금문제로, 기독교가 5천 원을 천도교에서 빌려왔다. 당시 기독교는 분권적이며 민주주의적 조직으로 단시간에 자금 모금이 어려웠고 모금 과정에서 운동계획이 사전에 발각될 수도 있었다. 이에 반해 천도교는 중앙집권적이었으므로 모금관리가 용이하여 풍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5천 원은, 여행경비 3,170원(현순의 중국여행경비 2000원, 안세환의 일본 여행경비 700원과 지방 여행 경비 등), 수감자 가족 생계비 640원(이필주 박동완 신석구 박희도 각 100원, 이갑성 오화영 김창준 각 80원), 독립선언발송비 250원, 한강인도교 회합 식비와 교통비 80원 등 경비 확인된 것은 4,240원이었다. 원래 요청할 때에 의도했던 기독교 대표자들의 가족 생계비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대표파견 및 선언서의 인쇄·전달 등 독립운동비로 사용되었다.

바. 천도교와의 합작·불가의 문제로 이는 신석구 오화영 목사의 경우에 보이고 있었는데, 이런 점은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처음에 대표로 활동하던 오기선 목사는 이 문제로 참여하지 않았다.

사. 기독교인 민족대표 16인 가운데 4명은 선언식에 불참하였다. 정춘수는 애매한 이유로, 유여대 목사는 그 때 의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것 때문에, 길선주 목사는 부흥회 인도 약속 때문에, 김병조 목사는 서울에 오지 않고 거의 1개월 후에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고, 뒷날 상해 한인교회를 위해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아. '독립선언'인가 '독립청원'인가의 문제이다. 기독교 대표 중 독립선언의 입장을 취한 사람은 이승훈 이명룡 오화영 신석구였고, 독립청원론 입장을 취한 이는 길선주 양전백 김창준 이갑성 박희도 신홍식 정춘수 등 7명이었고 이필주와 박동완 최성모의 입장은 모호했다. 이렇게 기독교의 입장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2월 20일 이승훈 함태영 최린의 회합을 통해 독립선언으로 정리되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강점을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과 채찍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때문에 '독립청원'으로 할 것도 고려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세가 1920년대 국내에서의 기독교 민족운동의 방향이 실력양성·자치론의 개량주의(改良主義)로 빠지게 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 한계성이 지적되어야 한다.

자. 독립방법은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비폭력성이었다. 이는 평화애호로, 전략적으로도 이것은 많은 사람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운동방법의 비폭력성과 관련, 그것이 현실적으로나 도덕적 정당성의 측면에서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B. 전국화(거족적) 단계

가. 전국화 단계의 운동참가 통계에서 기독교계의 참여정도다. 일제의 불확실한 통계는, 운동의 참가자와 피해를 ① 1919년 3∼4월 1,214회에 110만 명, ② 1919년 3∼5월 1,542회에 202만 명, ③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2개 군, ④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45,562명), 피검된 자 46,948명(49,811명), 가옥 소실(燒失) 724채, 교회당 소실 59채, 학교 소실 2개나 된다고 보고하였다.

기독교계의 참여도와 관련하여 유의할 것은, 일제의 기독교 정책이 105인 사건이나 사립학교법, 혹은 포교법 등에서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기독교인이 신문(訊問)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춘 경우가 많았다. 뒷날 교회사 자료와 대조해 보면 기독교인이 신문과정에서 기독교인인 것을 감춘 경우가 더러 나오고 있다.

나.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3월 1일 첫날 서울 외의 7곳(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이 모두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하였다.

다. 운동의 주동세력이 뚜렷한 340여 회는 311개 지역으로 압축되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 78개, 천도교 66개, 기독교와 천도교 합작 42개 지역으로, 기독교가 25% 내지 38%였으며, 기독교나 천도교가 아닌 지역은 125개 지역이었다. 당시 일제 측의 전국적인 통계를 보면 주동세력이 기독교의 경우 耶(야)로 표시되어 있다.

라. 또 운동이 격렬하여 체포·투옥시키게 되었는데,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고,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이 통계는 바로 기독교인의 운동량을 계량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숫자를 당시의 한국의 인구와 대비해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 때 한국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였는데, 1918년의 장로회 감리회의 교인은 212,703명(장: 교회 3,471, 교인 160,919/ 미감: 교회 655, 교인 41,044/ 남감: 교회 238, 교인 10,740)으로 나와 한국 인구의 1.5% 내외를 차지하였다. 거기에 비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세력면에서 25∼38%, 체포·투옥면에서 17∼22%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당시 1.5% 내외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다시 1919년 3월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법정 진술과 비교해 보다. 손병희는 천도교 신자의 숫자를 묻는 재판장 신문에 데헤, 명부등재자[錄名者] 300만 명, 의무 부담자 200만 명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숫자는 잘못 진술된 것이다.] 이는 기독교세의 10배에 달하는 교세다. 거기에다, 19세기 말 이래 민족주의운동의 중요한 흐름인 민중사상계[東學]를 이끌어 온 세력으로, 사상면이나 교세면, 그리고 민중동원 능력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3.1운동에서 활동한 역량은 그보다 10분의 1정도의 세력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보다 절대적인 수치에서도 뒤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반대로 기독교가 이 운동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 제암리교회당에서는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장로 134명 :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1024명 가운데 13%에 해당)이나 되었다. 총회에 보고한 노회의 보고는 '대한(조선)독립운동' 혹은 '독립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 그러나 운동이 전국화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갖는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4명이 불참하였는데, 그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당일 서울의 선언발표 장소를 명월관[泰和館]으로 옮긴 것이 선교사 베커(Becker)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 데도 교단적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하는 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다. 끝으로 당시 장로교·감리교 연합기관지인〈기독신보〉등의 보도 태도는 일제의 언론 검열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 대응이 대단히 미약했다고 지적된다.

 

3. 기독교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

A. 기독교계의 교단 조직화가 이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장로교의 경우,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하고,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하는 등 교단을 조직화하였다. 미감리회는 1908년에, 남감리회는 1918년에 각각 ‘연회’를 조직한 후 연회 산하에 지방회를 구축했다. 따라서 장로회가 총회→노회→시찰회→당회의 조직으로, 감리회는 연회→지방회→구역회로 연결되는 조직망을 갖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18년에는 일제가 조선기독교를 장악하기 위한 협의회를 조직하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연합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기독교계는 3.1운동에 앞서 전국적인 연락망을 구축하게 되어 3.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B. 일제 강점하에서 종교기관만이 유일하게 합법적인 집회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경계했던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이 역설적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C. 한말이래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민족운동의 전통이 3.1운동으로 발전해 갔다고 할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한말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3.1운동을 주도해 나갔다고 보여진다. 1905∼1910년 사이의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운동은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가톨릭)·우덕순(기독교)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는데, 이렇게 한말부터 기독교인들은 매국원흉 제거 등에 앞장섰다. 이런 전통을 이덕주는 독립협회→상동파 및 황성기독교 청년회→신민회→105인사건→신한청년당 및 송죽회로 이어지는 항일민족운동의 흐름을 거쳐 3.1운동을 열결된다고 보았다.

D. 일제가 강점한 후 기독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에 제재를 가하는 등 종교적인 자유마저 박탈하려 하였다. 특히 금주·금연에 관한 설교나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한 강론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다 강점한 지 얼마 안되어 벌인 '105인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려 한 사건이었다. 1915년에는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포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학교의 성경공부와 채플 등을 금지하고 선교를 방해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생존권의 위협에다 이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궐기치 않을 수 없었다.

E.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행동에서 그들은 신앙과 민족사랑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기독교인들은 모세·삼손·다윗·다니엘의 사적 등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동일시 하면서 민족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3.1운동의 만세시위가 한창일 때, 기독교회가 작성한〈독립단 통고문〉을 뿌렸다. 내용은, ① 매일 3시에 기도하고, ② 주일은 금식하고, ③ 매일 성경을 읽는데, 월요일 - 사 10(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화요일 - 렘 12(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 수요일 - 신 28(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 목요일 - 약 5(고난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 금요일 - 사 59(죄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예언), 그리고 토요일 - 롬 8(성령이 주시는 생명,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등이었다. 여기서 민족운동을, 신앙고백 위에서, 신앙운동과 함께 진행시킨,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킨 선인들을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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