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하 목사(참빛교회 담임)

<데드맨워킹>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한 수녀가 흉악한 범죄자를 만나서 그를 구원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헬렌 브렌젠’이라는 수녀가 범죄자 ‘메튜’를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감옥 검색대를 통과할 때였습니다. 헬렌 수녀의 가슴에 달려있는 십자가 목걸이 때문에 금속탐지기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나게 됩니다. 이 영화의 중요한 코드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비명 소리가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하고 장식으로 걸어두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 십자가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이 땅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진정한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그리고 그 십자가의 비명 소리를 세상에 들리게 한다면 우리 사회는 매우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이고 그 십자가의 모습이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소리가 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가 죽어갑니다.

나아가서 십자가의 현장인 교회마저도 어느 사이에 십자가의 소리가 다 사라져 버리고 세속종교의 모습만 남아 있는 듯합니다. 교회는 항상 의와 사랑이 하나로 나타나야 하는 곳입니다. 사실 의와 사랑이 하나 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의를 세우려면 사랑이 없다고 말하고 사랑을 세우려면 의가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공의가 물같이 흘러야 하고 사랑이 충만해야 하는 곳이 교회요 성도의 삶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 둘이 하나로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까?

이 둘이 서로 적대하지 않고 하나 되는 길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받은 자들인데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구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의 아들을 우리의 죄 값으로 지불하고 계십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무시하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온전하게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공의를 이루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 칼 발트는 “예수를 믿은 후에 두 가지를 깨닫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냐”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발트는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예수님께서 저렇게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을 감당하셨을까?” 이것을 깨달아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나 같은 존재가 무엇이기에 날 위해 예수님이 생명까지 바치면서 구원해 주셨을까? 그 소중한 의미와 가치를 깨달을 때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온전히 깨달은 자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십자가가 그대로 구현되어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외치고 고백하지만 실상 우리의 삶에 십자가는 쓸모없는 허상처럼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는 공의를 세우기 위해서 내가 죽고 사랑을 위해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누군가 그 문제를 위해서 스스로 죽으면 됩니다. 너의 잘못을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비난하고 싸우기 시작하면 십자가는 사라지고 교회는 무너져 내립니다.

“내 잘못 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이런 진솔한 고백이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소리로 들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십자가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 되고 평화와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 파멸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책임지고 내가 죽으면 그곳에 십자가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기적을 위해서 가슴에서 비명소리가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비명 소리가 교회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복음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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