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교회의 주도성과 만세운동 전후의 과정 속에 한국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

김동춘(SFC대표간사, 연변대 역사학박사, 만주사전공)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행사도 진행되고 있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만주에서의 3.1운동은 국내 3.1운동 전,후에 큰 영향을 끼쳤고, 특히 3.1운동이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과 연결된 점에서 만주 3.1운동은 특별히 고찰되어야 할 필요성을 가진다. 3.1운동이 실시된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그것이 이후 한국독립사에 어떤 결과나 열매가 없었다면 달리 생각해 볼 점이 많았을 것이다. 물론 3.1운동이 상해임시정부로 연결된 점을 부각하지만, 상해임시정부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1년 뒤인 1920년에 있었던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등을 생각해보면 3.1운동만을 떼놓고 고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특히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만주기독교와 그 피해의 정도가 엄청났을 만주교회에 대한 강조점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고찰을 통하여 선조들에 대한 조그만 위로라도 전해줘야 되지 않을까? 그런 까닭에 본 고에서는 만주3.1운동이 한국3.1운동과 어떤 관계성이 있는지, 그 차이점이 어떠한지,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사, 만주기독교의 특이점과 만주교회의 역할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만주 교회의 3.1운동 준비 과정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기 전 만주에 있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식민지국가들이 독립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만주의 교회에 알려왔다. 이것은 만주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자주독립할 수 있다는 큰 희망을 갖게 하여, 만주의 교회 지도자들은 함께 모여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만주의 교회들은 국권회복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1918년 9월 말부터 11월까지 함북노회 특별회를 4차례나 개최하였다.

함북노회 제3회 회의록에 의하면, 특별회에 참가한 만주 교회는 국자가교회, 장암동교회, 와룡동교회, 동불사교회, 명신동교회, 천보산교회, 두도구교회,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 태양동교회, 명동교회, 용정교회 등이었다. 북간도의 전 교회는 반일독립운동에 매진할 뿐만 아니라 그 중추세력이 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만주지역 특히 북간도교회의 효율적인 행정체계- 간동시찰회, 간북시찰회, 간서시찰회-는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아주 유리하였다. 이들 시찰회들을 중심으로 북간도의 목사, 장로, 선교사들은 협력하였고 선두에 나섰으며 각 교회들에게 독립시위운동을 홍보하기 시작하였다.

1918년 12월에는 캐나다장로회의 선교사들과 간도교회의 대표자들로 발기인을 구성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연합할 것을 결의하였고, 성탄절을 맞이하여 전 간도교인들이 함께 하는 연합기도회를 용정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이 기도회는 전 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이 철폐되고 불평등조약이 폐기되고 영토 침략주의가 종식되어 자유, 평등, 박애의 기독교적 이념의 사회가 구현될 것을 축복하자는 의미로 개최되었다. 이 기도회에서 부두일 선교사는 ‘파리강화회의’에 재미 한인 대표들이 미국정부에 탄원하여 미국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참석하도록 허가를 얻었다”는 소식을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한편, 제창병원 원장 민산해(Martin) 선교사도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대한 다과회에서 “강화회의는 자유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진행될 것이므로 영국에 있어서 인도의 문제와 일본에 있어서 조선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견해를 들은 북간도교회 지도자들은 조선의 독립문제가 파리강화회의에서 결정된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런 때에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준비사항이 통보되었다. 즉, 미국에서는 안창호 이승만, 연해주에서는 이동휘, 동청철도연선 대표자로는 백순, 이들의 수행원으로는 명동학교 교사를 지낸 박상환이 추천되었고, 시베리아 대표자로는 러시아의 ‘연추한족회’ 회장인 최재형이 추천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곧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어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기로 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러시아 연해주에서 열리는 회의에 간도 대표자를 선출하여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이에 따라 간도에서도 즉각 대표자를 선출하기로 결정하고 1919년 1월 25일 국자가(연길) 소영자에서 20명의 각 지역위원들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러시아 연해주 회의에 파견할 6명의 대표자가 선임되었는데,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장로), 용정교회 정재면(전도사), 국자가 이중집(장로)이 뽑혔고, 그 수행원으로 국자가 와룡동 창동학교 교사 정기영(집사)과 훈춘지역의 대표 2인으로 황구교회 양하구(장로)와 박태환(전도사)이 선정되었다. 이들 6명은 2월 2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열리는 “전로국내조선인회의”에 가기로 결정되었다. 계봉우의 〈북간도 과거와 현재〉에 의하면,

 “마침 이 때에 예수교 전도대회가 신년 1월 총회로 모여 국자가에 개최하게 되었다. 이런 때를 이용하여 신도 중의 일반 동지가 단합하여 충분한 계획을 의결한 후에... 강봉우씨는 내지로, 김약연 정재면 제씨는 러시아령으로 파견한 일이 유하였다.”

라고 하였다.

“전로국내조선인회의”에는 만주, 연해주, 조선국내에서 파견된 대표 약 80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단으로 연해주 대표로 이동휘, 동청철도연선 대표로 백순, 국내 대표로 이용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연해주를 방문한 상해의 신한청년단 대표인 여운형이 국제적 감각이 있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된 사실을 알려 오면서, 당초의 계획을 수정하여 “영어, 불어 등 외국어를 해득하고 다소 교육이 있어 세계의 정세에 통하는” 인물인 윤해와 고창일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3단계 독립운동방략과 “대한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창립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공포하고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연해주에 대표단이 출발한 바로 그 즈음인 1월 21일 사망한 고종의 소식이 북간도에 전해졌다. 고종독살설과 함께 듣는 모든 국민들이 분노했고 각 교회에서는 추도예배를 거행하였다. 이 기회를 통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선언서를 공표하며 각지에서 시위운동을 하자는 말들이 회자되었다. 이런 와중에 2월 1일 무오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국내외 명명가들 39명이 서명한 것으로 만주지역에서 발표되었다. 만주지역에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인 김교헌,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여준, 이동휘, 문창범 등이 포함되고 있고, 육탄혈전을 강조한 점에서 이후 3.1운동 이후에 대한 발판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2월 18일 연길(국자가) 하장리에 사는 연길도윤공서 외교과 직원인 장로 박동원의 집에서 결혼식 축하식으로 위장하여 15명이 비밀모임을 하였다. 20일에는 국자가 적암평 이동식의 집에서 각지의 대표들 33인이 모여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이 비밀집회에서 간도 시위운동을 위한 3가지의 구체적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제1. 간도 내 각 교회 및 단체는 서로 단결, 협력, 일치하여 독립운동에 전력을 다한다.

제2. 로령에서 독립선언서를 공표함과 동시에 간도 내 각 단체는 일제히 시위운동을 개시한다.

제3.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간도 내 각 단체의 대표자가 용정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의 기세를 앙양시킨다.

제1항에서는 모든 종파와 단체가 연합하여 반일시위운동을 벌인다는 것이고, 제2항은 러시아 연해주에 모인 “국민회의”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는 순간 간도에서도 일제히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제3항은 용정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는 대표자가 회집하여 연합시위를 벌인다는 것이다.

이 모임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할 기구로 “독립선언운동 의사부”를 결성하였다. 또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될 경우 희생할 각오를 가진 사람들이 주축된 결사대를 운영하기로 하였다. 결사대원들은 1918년 가을에 결성된 “철혈광복단”이 주축이 되었는데 많은 청년들이 결사대에 지원하였다. 또한 “철혈광복단” 회원들도 증가하였다.

만세시위운동은 차근차근 준비되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와 개회통지서를 등사하여 간도 각지에 보내는 한편,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만들어 교회조직을 이용하여 간도 전역에 수일 만에 전달하였다. 또한 용정의 목사대표단은 서고덕(Scott) 선교사를 방문하여 13일 용정촌에서 거행될 독립선언 축하회 및 시위운동 상황을 북경주재 미국공사와 상해의 외국인 기독교 목사단에 전보로써 통보하여 줄 것을 의뢰하였고 서고덕 선교사는 이를 승낙했다.

한편 북간도의 학생과 청년들도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준비하였다. 이들은 2월 15일 영신학교에 모여 “기독동지청년회”를 조직하고 각 학교의 학생대표를 선출하였는데, 명동학교 유익현, 국자가 도립중학교 최웅렬, 김필수, 국자가 소영자의 광성학교 김호, 정동중학교 송창문 등이었다. 학생대표들은 반일만세운동의 실행에 과한 구체적 행동을 협의하였고 명동학교 유익현을 북간도 한인 학생 대표자로 선출하여 16일 연해주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2월 28일 국자가 일본 영사관에 방화를 시도하였으며, 3월 1일에는 용정촌 기독교학교와 용정교회에서 3회에 걸쳐 만세운동을 벌였다.

 

2. 만주 기독교 3.1운동의 경과 및 의의

러시아 연해주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러시아, 중국, 조선에서 일제히 궐기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자는 계획에 따라, 북간도에서는 러시아에서의 선언서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독립선언서의 발표가 번역 등 준비관계로 늦어졌고,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이 이미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3월 7일에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용정, 국자가(연길)의 위원들은 북간도 각지 대표들을 소집하여 비밀회의를 열어 대책을 간구하였다. 이 회의에서 북간도 자체적으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여, 김영학을 대회장으로, 구춘선, 배형식을 정,부회장으로 하여 3월 13일 <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8일부터 북간도각지 교회에는 본격적인 집회준비가 시작되었고, 3월 10일에는 각 사립학교가 휴교 조치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연길의 행정책임자(도윤) 도빈에게도 경비를 부탁 교섭하였지만 10일에는 찬성하다가 11일에는 불허하기로 하였다는 통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3월 13일 용정의 장날에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3월 12일에는 독립선언 서명자의 이름으로 중화민국 외교부와 길림성장 앞으로 독립선언운동에 관한 통첩을 발송하였다.

3월 13일, 북간도의 모든 사회, 교육, 종교단체 지도자들이 망라된 ‘조선독립의사부’의 지도 속에, 2만 명 가까이 모인 한인들은 상부지(商埠地) 밖의 기독교학교인 영신학교 앞마당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위가 시작되자 중국 군경 맹부덕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군중들을 흩으려고 하였고 군중들은 결국 장소를 옮겨 동북쪽으로 수십미터 떨어진 서전벌(瑞甸大野)로 옮겨가 시위를 진행하였다. 용정 서전벌에 집합한 한인들은 조선민족 독립선언의 발표를 환호하였으며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명동중학교 학생들은 교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선두로 나섰으며, 그 선두의 선두에는 충열대가 깃발을 흔들며 나아갔다. 이들은 식이 끝나는 대로 일본영사관에 돌진하여 독립선언결의를 선포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충열대원 중 다수는 권총까지 휴대하였다. 당시 시베리아 지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 시위대가 간도일본총영사관을 지날 때 일본과 중국 군경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발사하였다. 불시에 발사된 총으로 인해 현장에서 10명이 즉사하고 중상을 입은 시위대원 9명이 후에 숨졌다. 3.13만세시위운동에서 총19명의 사망자와 46명의 부상자가 생긴 것이다.

용정에서의 독립선언식이 있은 후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등 북간도 전역에 교회나 학교가 서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독립운동의 시위가 있었다. 각 현별로 거행된 시위운동은 연길현을 위시하여 이도구, 두도구, 삼도구, 흑정자, 화전자, 국자가, 구사평 등지였으며, 화룡현에서는 양무정자, 토산자, 칠도구, 팔도구, 이도구, 하광포, 신흥평, 청산리에서 각각 시위운동이 있었다. 왕청현의 백초구와 수분대전, 라자구 등지의 한인들도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훈춘현에서는 동구, 황구, 남별리 등의 주민들이 3월 20일 모여 반일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날 훈춘현에서는 500여명이 무장을 갖추고 시위에 참가하였다.

한편, 서간도 지역은 통화현 금두화교회에서 처음으로 3.1만세운동이 시작된 후 1919년 4월 2일 대황구교회에 약 3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삼원보 부민단의 총기구입문제를 협의하고 성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예배를 마친 후 교회에서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투쟁에 대비하였다. 1919년 5월에는 유하현 삼원보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기독교인 안동식, 김창환 등은 한인의 교육을 통하여 신민회의 기본목표인 해외독립운동기지건설에 전념하였다. 통화현의 최봉석 목사와 흥경현의 오대규 목사 등은 급진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일제와의 투쟁을 준비하였다. 집안현의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연합하여 의용단, 청년회 등의 단체를 설립(총장-허선노장로)하여 이후 급진파와 연대하여 항일연합 전선을 구축하였다.

만주 교회의 3.1운동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장기간의 문화계몽운동을 통하여 만주의 한인들에게 반일민족의식이 크게 고취되었고,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반일운동의 선두에서 서서 대중을 이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 외에 만주3.1운동의 몇가지 의의가 있는데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립선언서의 발표는 만주지역 특유의 독특성이 있다.

이미 만주지역에서는 2월1일에 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북간도 3.1운동에서 발표된 선언서는 서울에서 발표한 3.1 선언서와 비교해 볼 때 유사성은 있지만 다른 내용이다. 3.13때 발표한 선언서는 <독립선언포고문>이며, 그 명의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이었다. 그리고 서명자는 김약연 등 북간도 대표 17명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다른 서명자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데 자신의 지역에 맞도록 지역의 인사들을 발기인으로 하여 각 지역마다 <독립선언서 발표축하회>의 형식으로 계속 시위운동을 하도록 하는 취지였다. 또한 북간도3.13운동은 소수가 먼저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과는 달리 대중적 반일집회를 열고 《독립선언 포고문》 발표 경축회 형식으로 만세시위운동을 한 것이다.

둘째, 북간도3.1운동의 진압을 중국 군경이 주도 한 것으로 지금까지 왜곡하였는데 사실은 일본이 진압을 주도하였다.

이전에는 시위를 무장으로 탄압한 것이 중국군경들이었다고 하였다. 일제 역시 그 책임을 중국군경들에게 떠넘겼었다. 그러나 간도총영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날 “일본경찰도 중국군경과 함께 시위대오를 제지하였다”고 하였다. 결국 3.13의 유혈 진압은 중국 군경과 일본 군경이 공동으로 하였다. 하지만 실탄 조준 사격은 일본 경찰이 자행하였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홍상표는 제창병원 민산해원장과 자신이 직접 본 바를 증언하였는데, 사망자에게 나온 총알은 일본경찰의 권총 탄환으로 중국 군경이 가지고 있던 장총 탄환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셋째, 시위에서 사용한 깃발은 태극기 뿐 아니라 중화민국 국기도 있었다.

비록 소수였긴 하지만 화룡의 시위대열이 용정 대회장에 들어섰을 때 중국 한족(漢人) 학생들도 한인학생들과 함께 시위행렬에 참가하였다. 이는 조선인과 중국인의공동투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울러 이런 대규모 시위운동을 목격한 중국 동북인들이 북경, 상해 등 본토인들에게 어떻게 전달했는가도 중요하다. 결국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전달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만주 3.1운동이 어떤 실마리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넷째, 시위를 주도한 집행부의 대부분이 기독교계 목사, 장로들이었다. 대회장에 김영학목사, 부대회장에 구춘선장로 등 집행부의 대부분이 기독교계였고, 시위를 주도한 청년들도 기독교계학교인 명동학교, 영신학교, 창동학교 학생이거나 출신이었다. 즉, 만주 3.1운동 모든 과정의 기조에는 만주기독교와 만주교회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3. 3.1운동 이후 일제의 박해와 만주 교회의 피해

1919년 3.1운동 당시 나왔던 연해주와 훈춘에서의 독립선언서는 당시 기독교가 독립운동에 얼마만큼 관여되었느냐와 당시 연해주와 북간도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 준다.

“현금 조선에서 기독교는 거의 국민적 종교로서의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조선국민을 위한 기독교의 가치는 위대하다. 기독교는 서구의 민주적 사상인 자유와 동포주의 이상의 최량의 수입자이니 조선에서 기독교도가 압박을 받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바로서...... 야소교는 우리 민족문화사 일생명이거늘 일본은 이를 증오하여 박멸시킬 음모수단을 강구하여” (1919년 3월 17일 우수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

기독교에 대하여 이를 갈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일제는, 3.1운동 후 만주교회 및 학교, 단체를 강력하게 핍박하였다. 3.13운동 후 처음으로 열린 함북노회 제4회(1919년 9월 13일, 와룡동교회) 모임에서 ‘북간도의 세 시찰회’에서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간북시찰회는 사망자 3인, 중상자 3인이요, 옥중에 있는 자 10인, 구속되었다 풀린 자 12인이며, 장은평교회, 구세동교회, 영생동교회, 천보산교회가 속해 있는 간서시찰회에서는 사망자 3인, 중상자 2인, 감금자도 수인이며, 명동교회, 용정교회가 소속된 간동시찰회는 사망자 2인, 갇힌 자 32명 중 6인이 구속”이라고 하였다. 간북, 간서, 간동시찰회의 보고와 함께 총회록에도, “금년 봄 독립만세사건으로 교인 중 총과 창에 별세한 이가 9인인데 그 중에는 교사와 학생이 많다. 중상자는 10인이요, 일 년 반 이하 징역으로 선고 받고 감옥 중에 있는 이가 아직도 30여인인데, 그 중에 명동교회 김약연 장로는 국자가에 갇혔고, 또 얼마동안 감금되었다가 태형만 받고 석방된 자가 용정 등지에서 여러 사람이요, 훈방 조치 당한 자도 회령, 용정, 두도구, 국자가 등지에 백 명 가량 된다.” 이처럼 죽거나 구류 감금된 교인과 수난의 교회 모습은 당시 기독교가 3.13운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하다.

한편, 3.1운동과 봉오동, 청산리전역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네 개 사단을 동원하여 이른바, "경신년대토벌“을 실시하여 가는 곳마다 삼광(三光)-죽이고(殺光), 태우고(燒光), 빼앗는(抢光)-을 행하면서 반일 인사 및 일반 백성들을 참혹하게 살해하였다. 이때 북간도의 4개 현(연길, 화룡, 왕청, 혼춘)에서 5,058명이 체포되고 3,500여명이 피살되었으며, 28개 교회당, 36개소의 사립학교가 불에 탔거나 혹은 파괴되었다. 그 중에 명동촌, 창동, 길동 등 기독교학교가 있는 곳 혹은 기독교가 활발한 항일 정서가 있는 마을의 피해가 가장 컸다.

함북노회 제7회 회록에 기록된 교회의 피해 상황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 경신년 대참안으로 피해를 받은 교회

교회 명

피해 상황

청산리교회

영수 1인, 교인 14인 피살, 교인 가옥 소실

장암동교회

교인 14인 피살, 교회, 학교, 교인 집 충화

양무정자교회

교회소각, 학교 소실

금당촌교회

영수 1인, 전도인 2인, 교인 7인 피살

혼춘 남별리교회

교인 50명 피살, 감옥에 갇힌 자, 징역선고 받은 자, 유리자, 행방불명자 불가등수.

명동교회

명동중학교 소실, 교인 집 소실

장은평교회

교인 가옥 소실, 구속된 자 10여인

합마당교회

교인 가옥 소실 3동, 피살자 3인

구세동교회

교회 소실, 교인 가옥 소실 피살자 수 십 인

청산리 백운평교회

교회학교 소실, 참살교인 9인

이들 교회들의 공통점은 교인 중에 반일 인사가 많거나 반일단체들이 있었던 촌락에 소재하면서 반일운동에 구심점이 된 교회였다. 이들 중 특히 화룡현 장암동교회와 훈춘의 남별리교회의 피해는 극심했다. 장암동마을 및 남별리 주민들은 대부분이 기독교 신자들이었으며, 이들 다수가 항일 운동에 적극 투신한 열성자들이었다. 《연변조사실록》에는 1920년 10월 31일 일본군 70여명에 의해 저질러진 화룡현 장암동의 참사에 대하여,

“일본군대가 집둘레를 포위하고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칼로 학살하기도 하고 파 놓은 큰 구덩이에다 수 백 명의 무고한 청년들을 생매장해 버리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10여리에 산재해 있는 장암동 마을을 한꺼번에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는데 마우계견(馬牛鷄犬) 같은 짐승도 한마리 남지 않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날 교회당에서 참살 당한 숫자는 33명이다.

또한 10월22일 일본군 37여단의 73연대장이 인솔한 토벌부대는 청산리전투의 실패를 보복하기 위하여 두 개 촌의 30여채 민가와 교회당을 전부 불사르고 “불령선인가속”이라 하여 70여명의 군중을 살해하였다. 청산리의 대랍자구 거주인은 19호에 72명이였고 백운평은 12호에 39여명이었는데 이들 112명 중에 70여명이 살해된 셈이었다. 이들 주민들 다수는 화룡현 구세동에서 이사하여 왔는데 대부분 기독교를 신앙하는 빈농이었다.

이처럼 “경신년대토벌” 기간에 일본침략군이 북간도에서 감행한 죄행은 처참하였다. 《독립신문》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군이 북간도에서 체포한 인수는 155명이였고, 3,664명을 살해하였으며, 민가 3,520호, 학교 59개교, 교회당 19개소를 불살라 버렸고, 태워버리고 짓밟아버린 농작물은 53,993석이나 되었다. 한국 전체에서 입은 사망자 수가 7,500여명인데 북간도에서만 3,664명이 죽었으니 그 절반의 피해가 북간도에서 있었던 것이다. 교회당 피해도 한국 전체에서 59개소이고 장로교는 12개소인데, 북간도에서만 19개소가 피해를 입었으니 그 피해 정도가 짐작이 된다. 또한 제암리교회에서 29명이 참살당했지만 용정의 장암동교회에서는 33명이 불에 타죽거나 일제의 총칼에 희생당했다.

제일 참혹한 피해를 받은 곳 대부분은 일본군이 패배한 부근 촌락과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는 마을과 기독교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3.1운동 및 만주 항일운동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되어 있는 가를 단적으로 보해 주는 증거이다.

한편, 경신년 대참안 이후 기독교는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교회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회집하는 횟수도 늘어나 교인수는 오히려 증가되었다. 1921년에는 북간도 일대의 장로교회들(간도4현, 조직교회-30, 미조직교회-57, 개척교회-28개 도합 105개, 교인수 6,442명)이 조선의 함진노회에서 분리되어 간도노회를 조직하였다. 간도 북구역 내 40여 교회는 연합전도회를 조직하여 연보금 2천여원을 전도사업으로 책정하였고, 국자가교회에서는 「야소교 서관」을 설치하여 성경을 간행하였다. 또한 구제사업에도 힘을 써 토벌의 피해로 의복과 양식이 없어진 동포들을 위하여 전곡을 수집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은 간동구역, 간서구역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청년들은 교회를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행동적인 신앙을 촉구하였다.

 

4. 3.1운동 이후 기독교계 독립운동인 “간도국민회”의 결성

2월 20일에 결성된 “독립선언운동 의사부”는, 3.13만세운동이후 “조선독립기성회”로 전환하여 조금 더 포괄적인 독립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본회는 의사부의 명칭으로 독립운동을 개시하여 용정에서 ‘독립축하식’을 거행한 후 변하여 ‘조선독립기성회’로 하였다가”

“조선독립기성회”는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 조직체로서 군사행동까지 감행할 수 있는 “전로한족회의”와 같은 단체였다.

그런데 3월 21일 연해주에서 북간도로 돌아 온 김약연은, 연해주에서 결성된 “대한국민의회”와 연계할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간도에 와보니 “조선독립기성회”가 결성되어 있음을 알고, 3월 25일 조직은 그대로 두고 명칭을 “간도국민회”(“간도국민의회”)로 재창립하였다(훈춘에선 “훈춘국민의회”를 창립하였다). “대한임시정부”가 세워진 뒤에는 그 이름에 맞추기 위하여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다.

1920년 6월의 통계에 따르면 국민회는 북간도의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에 7개 지방회와 133개의 기층 지회를 확대하였는데, 각지의 지회와 기층 지회의 간부와 경위대, 모금대 등 임원만 하더라도 천 여 명이나 되었다.

특히 “간도국민회”는 교회의 시찰회 조직을 활용하여 회원을 확충하였으며,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다음 일제의 기록을 보면 국민회가 기독교 조직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민회의 운동기관 및 계통에는 간도 용정촌 캐나다 장로파 예수교회에 속한 기독교 신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은 간도 각지를 야소교 전도구역으로 하여, 구역에 매 구장을 배치하고 구장은 국민회 운동에 관한 불온간행물을 취급하여 기부금을 모집한다.”

고 하였다. 국민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며 교회 조직(구역관리)을 이용하독립운동 선전물 배포 및 기부금 모집 등을 조직적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강훈의 《민족해방운동과 나》에서도, “국민회는 대개 기독교신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양적으로도 방대하여 동만주 4현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국민회가 북간도에서 기독교 조직을 중심으로 방대한 회원을 가진 단체임을 설명하였다.

북간도교회의 행정조직은 노회 아래 동시찰회, 서시찰회, 북시찰회 등 세 시찰회 구역이 있으며 그 아래 지교회의 각 당회가 있다. 국민회의 계통도 교회의 행정조직과 일치하여 총본부, 지방회, 소속지회 등 3단계로 구분되며 총본부는 노회와 5부, 지방회는 세 시찰회, 지회는 각 교회의 당회에 대비된다. 각 시찰회에 속한 대표 교회와 국민회 지방회 및 지회를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2> 북간도교회 지방조직과 국민회 지방회 비교

시찰회

대표 교회

국민회 지방회

지회

간도북시찰회

합마당교회, 와룡동교회,

장암동교회, 잠전동교회,

국자가교회, 적안평교회,

만진기교회, 모아산교회,

영고탑 태성교회, 일락거우교회,

동구교회, 석현교회,

북 부

(합마당)

제1지방회

12

제2지방회

중 부

(국자가)

제1지방회

14

제2지방회

간도서시찰회

관도구교회, 동불사교회,

명신동교회,두도구교회, 장은평교회, 태양동교회,

명월구교회,구세동교회, 천보산교회

서 부

(명월구)

제1지방회

16

제2지방회

간도동시찰회

명동교회, 양무정자교회,

용정교회, 남양촌교회, 전선촌교회, 황구교회, 훈춘성내교회, 토성보교회, 훈춘상하4교회, 화룡현 남두만강연안교회,

남부(용정무산간도)

제1지방회

9

제2지방회

(동부 남양촌 종성간도)

제1지방회

1

제2지방회

훈춘지방회

3 시찰회

100 여 처 교회

5 부 13 지방회

72개 지회

 

국민회는 북간도 각 지방에 본부, 지방회, 지회를 두고 교회 조직과 연계하여 자치와 군사, 그리고 재정상의 모든 반일활동을 일원화하였다. 또한 국민회군이라는 군사조직도 만들었다.

국민회의 간부들도 대부분 기독교인 독립운동가였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본부가 왕청현 합마당에 있을 때, “임원들이 매 일요일에 동지 교회에서 예배를 행하였”다고 할 정도로 임원들 다수가 기독교인임을 알려준다. 이들은 민족의 독립운동을 신앙의 의(義)로서 인식했고 적극적인 참여로써 그들이 처한 정치적 현실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1921년의 간도노회 설립을 위해 모인 각 교회의 목사, 장로들의 명단 속에서도 확인된다. 노회록에는 “목사 바커, 프라저, 김내범, 강두화, 최덕준, 박예현, 이병하 장로 이종식, 문재린, 정재면, 서민환, 허상훈, 유한풍, 현기윤, 이윤준, 채일선, 장학수, 최학봉, 양형식, 이태헌, 박용흥, 염창화, 조명환, 함주익, 유유일, 박상룡, 김도헌”이 나오는데 이들은 다름 아닌 북간도 항일운동의 중추세력을 이루었던 국민회 지도자들이었다. 결국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국민회 임원이었던 것이다.

당시 북간도와 가까우면서도 지역적으로 거리감이 있었던 훈춘 지방에서는 21,000명이나 되는 회원을 가진 “훈춘한민회”가 조직되었는데, 일제는 “훈춘한민회”를 “대한국민회 훈춘지회”라면서 기독교와 국민회와의 관련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한국민회 훈춘지회는 기독교도 황병길이 교인들과 제휴하여 건국회를 조직한 것이 이 회의 시작이며, 그 후 캐나다 장로파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회원이 규합되었다. 이들은 주로 육도구, 동구, 훈춘 평야 및 황구 부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회장은 이명순...... 그 소재지는 동구 남별리이다”

또한 국민회는 북간도 각 지역에 연락사무소 및 통신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때에 통신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주로 기독교 목사들이었다. 예를 들면 명월구교회 최봉의 목사, 간서시찰회구역의 김내범 목사 등이었다. 이들은 전도를 목적으로 각지를 순회하면서 아울러 통신사무를 전담했다. 명월구(연길현 숭례향 옹성라자)는 돈화, 길림, 하얼빈과도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국자가, 용정 등지로 통하는 국도변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였으므로 국민회의 연락처로는 최적지였다. 상해임시정부로부터 중요 서류와 《독립신문》이 명월구에 도착되면 북간도의 지역교회 조직망을 중심으로 전역에 전달되었다. 국민회는 백초구, 국자가, 용정촌 두도구, 훈춘 등의 상업지역,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하면서, 기독교들이 이주해 온 밀집지역 및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어 있는 농촌 등지에 기본 조직이 구성되어 있었다. 국민회는 다른 단체와는 달리 넓고 촘촘한 튼튼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조직력으로 군자금을 쉽게 모집하였고, 잘 갖춘 통신 연락망을 통하여 일본군의 동향 파악을 수시로 하여 무장독립군의 숙식제공, 독립군의 교통로 확보 및 지역이동을 쉽게 하는 정보력으로 작용하게 하였다.

국민회의 특징은 민정 조직과 아울러 군정 조직이 있었던 산하에 “국민회군”(사령관-안무)이라는 군사단체를 두었다. 국민회군의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용이 파견되어 왔으며, 항일전투를 수행하는 무장부대로 대원총수는 450명, 군총 400정통, 권총 160정을 보유하였다.

국민회군은 다른 독립군과의 연합도 모색하였는데, 1920년 1월 우선 국민회군과 홍범도부대가 연합을 실현하였고, 2월 21일과 3월에는 국민회의 본부인 합마당에서 2차례나 각 단체대표의 연석회의를 소집하였고, 5월 5일 신민단, 북로군정서, 도독부, 광복단, 의군부, 국민회가 연합으로 항일투쟁 할 것을 결의하였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훈춘한민회와 군무도독부가 통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로 개편하였다.

이처럼 국민회를 통한 연합부대가 결성되었기 때문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승리하게 되었다. 결국 만주3.1운동은 시위운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연해주 국민의회와 함께 간도국민회를 결성하였고, 독립군을 만들어 연합부대를 조성하였고, 그 힘이 상해임시정부와 1920년의 15만원탈취사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 된 것이다.

 

6. 결 론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내의 3.1운동만을 조명하는 아쉬운 점에서 이 논문이 시작되었다. 만주지역의 3.1운동은 한국과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독특성이 드러나는데, 국내에서의 3.1운동이 만세시위운동으로 그쳤다고 한다면 만주에서는 3.1운동이후 민정 군정의 지방자치단체와 자치군이 설립되어 지속적인 투쟁을 이끌어 왔다. 또한 중국인들과 연대 및 러시아 연해주와의 연합이 있었다는 것이고, 2.8독립선언 이전에 독립선언의 시발점이 되었던 만주 무오독립선언서가 있었다. 3.1운동이후 결성된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의 연합과 봉오동전투 및 청산리전투의 승리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만주 3.1운동의 의의는 크다. 이러한 모든 과정의 기조에는 만주기독교와 만주교회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런 특색을 갖춘 만주 3.1운동에 대한 강조점이 한국에서 간과되어 온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울러 만주 3.1운동은 기독교계가 깊숙이 주도를 했으며 그래서 국내에서보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특징은 한국 3.1운동의 전 후 과정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이것은 3.1운동이 한국의 독립과 직접적으로 얼마나 더 깊이 관련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중국의 5.4운동에의 영향을 밝히는데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한국 사학계 및 기독교역사계에서도 이 방면에 더 많은 관심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

 

미주

1) 만주지역은 북간도, 서간도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지만, 여기에서는 북간도지역을 주로다룬다.

 

2) 당시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에 따라 함경도지역은 캐나다장로회가 맡았다. 캐나다장로회는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까지 진출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중 부두일(Dr. Foote D.D), 서고도(Mr. Scott), 민산해(Dr. Stanly Martin M.D) 등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만주교회의 독립운동을 암암리에 격려 지지하면서 민족 자주독립 정신을 심어주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3.1운동사(下) p.695 참조.)

 

3)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평화 정착을 위해 제안한 평화원칙(1918. 1. 8)을 “평화14개조항(Fourteen Points)”이라 하는데, 14개 조항 중 약소국의 독립에 관계된 조항은, “⑤항-식민지 문제의 공평무사한 해결, ⑦항-벨기에의 주권회복, ⑩항-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내 민족문제의 해결, ⑪항-발칸 제국의 민족적 독립보장, ⑫항-투르크 제국 내의 여러 민족의 자치, ⑬항-폴란드의 재건”이다.

 

4) 姜德相編, 《현대사자료》(27), p.9, 국민회 포고문 제2호.

 

5) <함북노회> 제3회 회록(1919), pp.6-8.

 

6) 한국교회사학회 편,「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下 (1968), p.337.

 

7) 《조선독립운동》Ⅲ, “한족독립시위운동에 대한 외인선교사의 언동” p.429(1919.3.13.)

 

8) 앞의 책, “용정촌시위운동 전후의 언동” p.430(1919.3.13.).

 

9) 1919년 3월 13일(大正 8年) 조선보 제2호 “間島方面 韓族 獨立運動에 關한 起因 및 情勢의 經過” p.83.

 

10) 姜德相編,《현대사자료》(27). pp.104-105

 

11) 姜德相編,《현대사자료》(27). pp.104-105.

 

12) 四方子(桂奉瑀), 〈北墾岛 過去와 現在〉, 《獨立新聞》(上卷) 大韩民国二年一月十日.

 

13) “전로조선국내인회의”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열린 전러시아주재 조선인대표자 회의이지만, 북간도와 서간도, 국내에서 파견된 명실상부한 조선인대표자 회의로 상해임시정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이 회의는,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발표, 시위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방략의 수립, 그리고 이를 추진할 주체로서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조직 등의 현안 문제를 협의하였다. 회의 첫날인 2월 25일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상설의회장인 원세훈이 일반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기관으로서의 대한국민의회에 관한 취지를 발표하였다. 국민 의회 의장에는 문창범, 부의장에 김철훈, 서기에 오창환이 선출되었다. 외교부장에는 최재형, 선전부장에는 이동휘, 재정부장에는 한명세가 선임되었는데, 이 중 선전부는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부서로, 독립군의 구성은 나자구의 사관학교 출신 생도, 홍범도 부대, 훈춘 지역의 황병길, 이명순, 최경천 등이 이끌고 온 군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대한국민회의 상설의회 의원은 30명을 두었으며, 여기에는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 5명, 서울⋅경기 출신 5명이 포함되었다. 이는 국민 의회의 대표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 회의에서는 3단계 독립운동 방략을 수립했다. 1단계는 독립선언서 발표 및 평화적 시위운동 단계, 2단계는 한인 무장 세력에 의한 국내 진입의 무력 시위운동 단계, 3단계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외교 활동 단계였다. 이들은 한인 무장 세력을 결집해 일본군과 전쟁을 벌여 서구 열강으로부터 교전 단체로 승인받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파리 강화 회의의 의제로 상정시키려는 목표를 세웠다.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3월 17일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발표함으로써 그 성립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국내외를 통하여 임시정부적 성격을 띤 최초의 조직으로서 대한국민의회가 지닌 의의는 매우 크다. 각 지방조직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지방한족회, 4월 23일 이동휘 이범윤(李範允) 등이 탑도구에서 회합하여 결성한 훈춘지부, 5월초 간도의 명동학교에서 결성된 간도지부, 국내에 경성지부가 조직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levelId=tg_004_1750 ; 장용경, 한국사 콘텐츠,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G0037)

 

14) 姜德相編, 《현대사자료》(26), 1967. pp.82-86;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사료: 3.1운동편》, 1979. p.28.)

 

15) 姜德相編, 《현대사자료》(26), 1967. pp. 82-86; 같은 책, (27), p.205.

 

16) 慎鏞廈, 《조선민족독립운동사연구》, 乙酉文化社, 1985. p.217.

 

17) 姜德相編, 《현대사자료》(27), p.205; 윤해와 고창일은 1919년 2월 5일, 증명서(‘전체한인의 대표’라는 영어, 불어로 된 두 통의 서류)를 소지하고 우스리스크를 출발하였으나, 시베리아 내전으로 인한 교통두절로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한참 후인 9월 26일에야 파리에 도착하였다.(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사료: 3.1운동편》, 1979. p.108 참조)

 

18) 姜德相編, 《현대사자료》(26), 조선보 제2호 “秘密集合事項”, pp.84-85.

 

19) 姜德相編, 《현대사자료》(27), p.82.

 

20) “철혈광복단”은 1911년 봄 이동휘, 정재면 등이 기획했다가 1914년 이후에 연해주와 북간도의 반일인사 몇 열혈청년들로 반일민족투쟁에 몸 바칠 것을 혈서로 맹세하면서 결성된 비밀반일단체인 비밀결사 조직인 ‘광복단’과 1917년 연해주에서 조직된 파괴적인 청년결사단체인 ‘철혈단’이 1918년 가을 김하석 등의 주도하에 통합된 단체이다. (朝鮮總督府, 〈朝鮮 외에서의 朝鮮人 狀況 一般〉, p.489; 潘炳律, 《誠齊 李东辉 一代記》, 汎友社, 1998. pp.78-79, p.162 참조)

 

21) 洪相杓, 《간도독립운동秘話》, 선경도서출판사, 1990. 3. p.54.

 

22)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Ⅲ. p.430.

 

23) 朝鮮軍參謀部 朝特報, 密受 제102호 其 744 第53號, “間島鮮人學生及靑年的獨立運動”, 大正8년(1919년 3월 3일)

 

24) 앞의 문서.

 

25) 姜德相編, 《현대사자료》(26), p.87. “間島龍井村抗日獨立運動” 朝特報 第3號. 大正8年(1919) 3월 14일).

 

26) 앞의 책.

 

27) 洪相杓, 위의 책, pp.31-37; 四方子, 《北墾岛 過去와 現在》, 1920년 1월10일자.

 

28)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Ⅲ. p.430.

 

29) 朝鮮总督府警务局, 《國外 韓人의 獨立運動硏究》. 騷密 第968號, 1919년 4월 26일;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3, p.584.

 

30) <外務省警察史>20권, 4. 間島, 東京:不二出版社, 1998. pp.21-23.

 

31) 계봉우(四方子)는 《北墾岛 過去와 現在》에서 3만 명의 군중이라 하였다. 일제는 朝特報 第4號에서 6천의 군중이라 하였는데(《현대사자료》(26), p.88) 대략 2만 명 정도 모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32) 洪相杓, 위의 책, p.34.

 

3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Ⅲ, p.699.

 

34)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Ⅲ, 탐구당, 1970. pp.145-146.

 

35) 《국외일보》 제23호, 《현대사자료》(26), pp.109-111.

 

36) 《국외일보》 제6호, 《현대사자료》(26), p.93.

 

37) 국회도서관, 〈독립운동에 관한 건〉,《한국민족운동사료》(삼일운동 편, 其三), 1979. pp.250-253.

 

38) 국회도서관, 〈독립운동에 관한 건〉, 앞의 책, p.343.

 

39)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국권회복운동〉(하), 《한국학보》9, 1977, pp.155-164.

 

40) 국회도서관,〈독립운동에 관한 건〉, 위의 책, p.292.

 

41) 국회도서관,〈독립운동에 관한 건〉, p.369; 박영석, 〈일제하 재만 한국인 기독교도의 항일민족독립운동〉,《재만한인독립운동사연구》, 일조각, 1988. pp.20-21.

 

42) 박창욱, <간도국민회를 재차 논함>, 위의 책, pp.40-41 참조.

 

43) <外務省警察史>, 제20권, 4. 間島, 1919년 3월28일 간도총영사관 총영사 鈴木이 內田 외무대신에게 한 《排日朝鮮人獨立示威에 관한 文件》의 보고요지에서, 外務省外交史料館藏, 東京:不二出版社, 1998. pp.23-24.

 

44) 洪相杓, 《간도독립운동秘話》, 선경도서출판사, 1990. 3. p.54.

 

45) <外務省警察史> 제20권, 東京:不二出版社, 1998. pp.23-24.

 

46) 「함북노회」제4회회록(1919), pp.6-9. 3.1운동이후 간북,간서,간동시찰회구역 보고서.

 

47) 차재명 편,〈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

 

48) 姜德相,《现代史資料28》, 朝鮮(四), 独立運動(二), みすず书房, 1972. pp.472-487.

 

49) 「함북노회」제7회 회록(1920), p.12, “각 구역 보고서”;〈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 p.354 요약 정리.

 

50) 심여추, 위의 책, p.64.

 

51) 위의 함북노회록에는 교인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 사망 숫자와는 다른데, 일제의 조사표에는 24명으로 되어 있고 《獨立新聞》 간도 통신원의 조사 자료에는 75명으로 되어 있으며(〈倭奴의 殘忍〉《獨立新聞》 제94호, 1921년 2월 17일), 용정 캐나다 장로교 소속인 제창병원 원장의 1920년 10월 31일의 견문에서는 36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獐巖洞掃蕩詳報〉〈獐巖洞附近ノ討伐情況〉, 《现现代史資料》(28), pp.455-461; 蔡根植, 위의 책, pp.89-91; 박창욱, <基督敎在延邊朝鮮族早期反日鬪爭中的作用>, 위의 책, pp.95-96 참조)

 

52) 박창욱, <基督敎在延邊朝鮮族早期反日鬪爭中的作用>, 앞의 책, pp.95-96.

 

53) 〈西北間島同胞의 慘狀血報〉,〈間島慘狀後報〉,《獨立新聞》, 제87호, 제92호.

 

54) 朝鮮总督府 法務局, 《妄動事件處分表》, 朝鮮总督府, 1920.1.

 

55) 김정명, 위의 책, p.420.

 

56) 서굉일, 김재홍, 《규암 김약연선생》, pp.237-242; 金井昌德(新京중앙교회목사), 위의 책, pp.601-608; 在满日本大使館, 《在满宗敎槪況》, 昭和 15년(1940).p.369.

 

57) 채현석, ‘만주지역의 한국인 교회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호, 기독교문사, 1994. 12. p.78; 재만일본대사관, 《재만종교개황》, 소화 15년(1940).p.369; <총회록>제10회 회록, p.94.

 

58) <함북노회록> 4-7회록, 1919.9-1920.9.

 

59) <함북노회록> 제4회 회록(1919), p.37.

 

60) <독립신문> 1920년 1월 10일 기사.

 

61) 사방자,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2, <독립신문>제36호, 1920년 1월 10일자.

 

62) 이지택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28)에선 “독립기성회가 생긴 직후인 3월25일에 간도국민회가 생기고 인원은 독립기성회대표들이 그대로 옮겨 앉고 지부별 국민회가 있었다”고 하였다.(1972년 11월 6일부 <중앙일보>) 그리고 일제의 3월31일 정보자료에는 “국자가에서 김영학을 회장으로 하는 조선국민의회가 조직되고...”(《현대사자료》(26), p.99)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국민회 지회를 말하는 것이다. 즉, 국민회는 3월 25일 건립되었다. 간도국민회의 설립과 관한 상세한 논의는 박창욱, <간도국민회를 재차 논함>, 위의 책, pp.46-49참조.

 

63) 《外務省警察史》, 제20권, 東京:不二出版社, 1998. p.243;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Ⅲ, 위의 책, p.111.

 

64) 일제군경정보기록, 위의 책.

 

65)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제3기획, 1994. p.71.

 

66) 서굉일,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연구>, 위의 책, P.470.

 

67) 일제군경정보기록, 대정9년(1920) 2월 14일, 국외정보 제29407호.

 

68) <간도노회> 제1,2회 회록, p3.

 

69) 《한국독립운동사》Ⅲ (탐구당) “3.1운동사(하)” 북간도편, p. 697; 홍상표, 위의 책, p.44 참조.

 

70) 일제군경정보기록, “간도에 있어서 불령선인단의 상황”, 대정 8년 5월 21일 (1919), 국외정보소밀 제2764호.

 

71) 조선군참모부 조특보 대정 8년, 조참밀 제 648호 (1919.6.14) “조선소요에 관한 정보” 제22호.

 

72) 위의 책, “간도지방정황개요”, 대정 10년 3월 12일 (1921), 고경 제1469호.

 

73) 1920년 8월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북간도의 여러 반일단체들이 모금한 총액은 대략 50만원인데(혼춘한민회 제외) 그 중 국민회가 17만원, 북로군정서가13만원, 최명록의 도독부가 6만원, 홍범도의 의군단이 7만원, 신민단이 3만원, 광복단이 4만원이었는데 그 중 국민회 및 그의 연합부대인 홍범도, 도독부 등 부대들이 모금한 금액은 총금액의 절반을 차지하였다.(1920년 5월4일에 간도일본총영사관 총영사 사까이가 조선총독 재등실에게 보고한 요지에서, <현대사자료>(27), P.115:일제군경정보기록, 국외정보, “간도국민회파 군자금모집”, 대정 9년 1월 7일 (1920), 고경 제147호)

 

74) 《間島ニ於ケル不逞鮮人團ノ狀況》第二, 間島ニ於ケル不逞鮮人團ノ組織, 朝鮮總督府警务局, 大正 9年(1920) 10月28日.

 

75) 강덕상 편, 《현대사자료》(27), p.141.

 

76) 신용하,《조선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pp.431-435.

 

77) 채근식, 위의 책, pp.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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