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국민이 MB 정권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각료와 비서진이 지나치게 부유하다는 사실이다. 진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과연 그들이 서민들의 애환과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편견을 갖는다. 부 자체는 죄악이 아니다. 청부(淸富)라는 말도 있듯 피땀 흘려 깨끗하게 번 돈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마는 훨씬 더 중대한 문제는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그럼에도 지나친 부는 언제나 질시와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음도 사실이다.

가난의 경우, 빈곤은 퇴치와 추방의 대상이 된다. 그 빈곤이 자신의 무능과 나태로 인해 발생할 경우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사회적인 현상으로서 빈곤과 악순환은 부정 부패를 통하여 사람들을 가난의 사슬에 매이게 하는 정치·경제적인 구조악과 그 배후의 부유한 권력층에 혐의를 둔다.

가난의 부정적인 형태인 빈곤과 달리 자발적이며 영성적인 가난, 청빈(淸貧)도 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부요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비워서(Kenosis) 가난뱅이가 되셨다. 오늘 우리는 여기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으나 가난한 이웃을 배려해서 자발적인 청빈의 길을 걷는다. 가난한 이웃과의 연대의식을 가지며 부자와 빈자의 분열에 저항한다. 참으로 쉽지 않지만 이런 개인과 교회가 예수께 근접하지 않을까.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달콤한 잠은 살 수 없다.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다.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식욕은 살 수 없다. 사람은 살 수 있지만 친구는 살 수 없다.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여권은 살 수 있지만 천국은 살 수 없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돈이면 다 된다는 배금주의(Mammonism)라는 우상과 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기본적으로, 조금 모자란 듯이 살면 좋지 않을까.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 "생활하기에 조금 부족한 듯한 재물, 칭찬받기에는 조금 떨어진 용모,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청중의 절반가량만 박수 쳐줄 정도의 연설 실력." 모두 약간 모자란 상태이다. 그 끝을 모르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미덕들이지만 거기에 인류의 희망이 있을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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