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과 함께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정규동 목사(샬롬교회 담임)

7. 어린아이의 수준에 맞춘 가사

어린 아이들은 주어와 동사가 분명해야 하고, 토씨가 생략되지 않아야 말을 알아듣는다. 찬송가 가사는 일종의 시어(詩語)이다. 시어는 주어와 토씨가 생략되기도 하고, 함축된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개정판에는 대부분 ‘맘’ 이라는 함축된 단어를 ‘마음’이라는 단어로 풀어서 적었다.

또 개정판은 높임말을 쓰려고 애를 썼다. 가사에 나오는 ‘예수 혹은 예수여’는 대부분 ‘예수님’ 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바꾼 이유는 예수님을 찬송에서도 높여 드리려고 이렇게 한 것 같다. 이것은 시어를 모르는 결과요, 영어와 헬라어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요, 치열한 토론이 없었던 결과이다.

이런 예를 적시하면 아래와 같다.

‘내 주는 살아 계시고‘→ ’내 주님은 살아 계셔‘(170.①) ‘다 고하리라’→ ‘다 고합니다’(315.①), ‘주의 주실 화평’→ ‘주님 주실 화평’(327.①), ‘따라 가도다’→ ‘따라 갑니다’(341.①), ‘내 주 앞에’→ ‘주님 앞에’(400.②).

개정 작업자들은 여러 군데에서 능동을 수동으로 고쳤다. 이렇게 해서 의미는 바르게 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후에 다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대속 하여서’→ ‘대속 받아서’(263.후), ‘모든 죄 사하고’→ ‘죄 사함 받으며’(287.①), ‘주께로 내가 이끌려’→ ‘주께서 나를 이끌어’(364.②), ‘주의 피로 내 죄를 씻었네‘→ ’주의 피로 내 죄가 씼겼??lsquo;(421.①) 등이다.

 

8. 시어(詩語)를 고친 사례

외국 찬송가를 번역할 때 언어가 다른 우리말로 그 내용을 절대로 다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이 작업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저 내용을 이렇게 함축해서 담았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찬송가의 원문을 보면서 되도록이면 그 뜻을 살리기 위해서 첨가와 삭제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쓴 우리 말 가사에 첨삭을 가한 것은 무슨 일일까? 시는 한 두 단어가 전체 의미를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 만약에 ‘사뿐히 저려 밟고 가시옵소서’ 하는 시어를 저려 밟는다는 것이 요즘 안 쓰는 말이라고 해서 ‘눌러 밟고’로 고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국 사람이 쓴 가사를 고친 것은 원저자가 고심해서 만든 시어를 손댄 것이다. 이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외국 가사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 그것도 아직 그 분들이 살아 계시는데, 이런저런 모양으로 수정했다는 것은 무슨 말로 설명한다고 해도 수긍할 수 없는 부분이다. 몇 가지 용례를 살펴보자.

1) 436 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시어를 손 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436장이다. 영생을 맛보며‘를 ’영생을 누리며‘로 바꾼 것이다. 영생을 맛본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맛본다는 말은 성경에도 나오는 단어이다. 다윗이 “너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말했고, 신약성경에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베드로가 말했다(벧전2:3).

선하심과 인자는 맛볼 수 있는데, 영생은 맛볼 수 없다는 말인가? 맛본다는 말이 얼마나 정감 넘치는 시어인가? 이 한 구절이 이 찬송가의 포인터인데 이것을 고치므로 이 곡 전체를 그만 망가뜨리고 말았다.

2) 308장 (내 평생 살아 온 길)

이 곡은 조용기 목사님이 작사하고 김성혜 사모님이 작곡한 곡으로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복음 송으로 애송했던 곡이 찬송가에 들어와서 반가웠다. 그런데 가사를 살펴보니 입에 익어 있는 옛날 가사가 아니었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고칠 이유가 없는 것을 작사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 완전히 뜯어 고쳐서 다른 가사로 만들어 놓았다. 작사자가 번연히 살아 있는 대도 말이다. 무려 16군데를 고쳤다. 1절과 2절의 3단은 완전히 다른 가사로 대체했고, 2절과 3절의 4단은 전부 혹은 일부를 고쳤다.

3) 568장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이 곡은 지금 찬송가에 새롭게 수록된 곡이다. 복음 송으로 불려지던 것을 찬송가에 넣었다. 이 찬송은 시편 23편을 노래한 것인데 개정 위원들은 이미 알려진 시편 2편의 내용을 무시하고 완전히 뜯어 고치고 말았다. 1절은 단 한 글자를 고쳤을 뿐인데, 2절 3절은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이 곡을 부르는 우리들의 마음은 영 편하지 않다.

4) 622장 (거룩한 밤)

이 찬송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에 찬송에서 빠졌었다. 그렇게 찬밥 대접을 받던 찬송을 다시 살려서 지금 찬송가에 넣은 공적은 치하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런데 영어 원문 가사가 ‘오! 거룩한 밤’으로 시작하는데, 왜 이 찬송을 ‘거룩한 밤’으로 고쳐 놓았을까? 이렇게 하면 목차에서 찾으려고 해도 옛날 가사로는 찾을 재주가 없다. 이렇게 원작을 무시하고, 아무런 뜻도 없이, 또 타당한 이유도 없이 이렇게 고쳐도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9. 결정적인 실수

개정 위원들이 10년의 세월을 모여서 검토했다고 했다. 10년 동안 제대로 모여서 검토하고 토론했다면 당연히 이런 모든 것이 걸러지고 발견되어야 했다. 그런데 10년을 보고 또 보고, 살피고 또 살폈는데 이런 실수가 그냥 그대로 담겨 있을까?

1) 150장 (갈보리산 위에)

이 찬송 4절에서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를 ‘영광 중에 계신 우리 주와 함께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로 바꾸었다. 십자가를 달게 진다는 시적인 표현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영광 중에 계신 우리 주로 바꾸었다. 그런데 그렇게 바꾸어 놓고 앞뒤를 살피지 않았으니 결국은 의미에 오류가 생기고 결정적인 실수가 되고 말았다.

바꾼 부분이 뒷부분과 붙어서 ‘우리 주님과 함께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로 변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충성을 받을 분이지 우리와 함께 죽도록 충성할 분이 아니다. 왜 예수님을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충성하는 분으로 표현했을까?

그리고 죽도록 충성은 천국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는 것이다. 만약에 개정 위원들이 모여 치열하게 공방을 벌렸다면 절대로 이런 실수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8. 결 론

우리는 옛날 여러 종류의 찬송가를 사용했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개편 찬송, 합동 찬송, 새찬송 등 예배 시간에 여러 종류의 찬송을 주보에 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럴 때 우리는 “찬송가 하나도 통합하지 못할까?” 하고 선배들의 옹졸함을 탓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점이 많은 찬송가 가사를 대했을 때 이런 문제를 시정하려 했다가 또 여러 편의 찬송가를 만들고 말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억누르고 참았던 선배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한 찬송가도 영원히 있을 것이며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찬송가를 수정할 때는 이런 부분이 참조되어 제대로 된 찬송가가 나왔으면 좋겠다.

 

이제 어떤 분의 하소연을 소개함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찬송가 개정 작업이 꼭 촌의 골목 정비 사업과 비슷하네요. 길을 곧게 하고, 블록으로 담을 쌓아 길이 깨끗해지긴 했습니다. 그런데 굽어진 길을 돌아가는 정감이 그만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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