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부 시절 때 많이도 불렀고,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있는 노래가 있다. "한 마음 주소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로, 하나님은 한 분, 우리 왕도 한 분, 한 몸이오니 찬양케 하소서." 서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한 몸됨의 감격을 나누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특권인 하나됨을 싫어하고 해치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속한 자이다. 성경은 분열을 일삼는 사람을 육신적이요 성령이 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됨은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주제요, 사명이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성부 하나님께 올려드렸던 가장 큰 기도의 제목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되게 하소서"였다. 우리는 왜 하나되어야 할까? 교도소선교회를 세워서 세계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 찰스 콜슨은 "교회가 하나되어야 할 주된 이유는 바로 적대적인 세상 때문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지금도 반기독교적인 세력들은 호시탐탐 교회의 이름을 더럽히고, 교회의 영향력을 위축시키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섬기는 교회는 내부적으로는 이견이나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교회의 울타리를 넘는 순간 "하나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지켜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무신론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펴는 것은 교회의 시급한 의무"라고 말한 솔제니친의 소리를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먼저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상적인 범죄를 가리는 방어막으로 이용하는 자를 향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예수님의 벼락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한다. 동시에 교회가 무신론, 세속주의, 반기독교 사상이라는 무서운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교회 내에서 때로는 광명의 천사로, 때로는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여 분란과 상처를 만들어내는 마귀적인 요소들을 뽑아내고, 긍휼의 씨앗들을 뿌리는 파종자(播種者)가 되어야 한다. 전투에서 가장 큰 불행은 아군끼리의 살상행위이다. 교회가 내부적으로 상처주는 것을 멈추고 긍휼의 파종자가 되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럴 때에만 세상의 갈등도 통합하고 상생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을 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이 길을 보여주셨다. 역사적으로 사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수백년 간에 걸쳐 내려온 뿌리깊은 반목과 갈등을 해결한 것은 주전 2세기의 히르카누스 1세의 군사적인 통합이나 유대지역의 왕이었던 헤롯의 정치적인 화해정책이 아니라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였던 '예수의 길'이었다. 이 길은 화해의 길이요, 통합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메마른 심령을 생명수로 채우고, 강도 만난 자의 친구로서 유대와 사마리아의 적대감을 해체시킨 선한 사마리아인의 긍휼도 '예수의 길' 위에서만 가능하였다.

그리스도인의 토대는 친교와 연합을 뜻하는 코이노니아에 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의 삶을 위해서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신앙적인 인격이 따라야 한다. 인격은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에 비례한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인격살인이 횡행하는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타인의 가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겸비한 눈과 의견이 다른 자들에게도 기꺼이 호혜적 손길을 내미는 선한 의지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날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긍휼과 화해의 파종자로서 뚜벅뚜벅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라. 그럴 때에 교회가 과유불급의 위기에 처해있는 우리 사회의 균형자로, 불신시대의 화해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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