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장로회협의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순례” 실시

전임 총회장, 각 노회 노회장, 장로회 전회장단이 함께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터지자 밀물같이 대한독립 만세!” 1919년 3.1운동에 앞장섰던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전제 인구의 1.5%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을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도록 해방운동에 앞장서 이끌었고 민족의 대표가 되었다.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지도자들은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었다. 기독교인이 50%를 차지한다고 보면 당시 인구로 보면 일당백이었다. 과연 1919년의 신앙은 어땠기에 이렇게 일당백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100년 후 1.5%였던 기독교 인구가 20%가 되고 한집 건너 교회당이 세워질 정도로 온통 십자가의 네온으로 뒤덮인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일당백인가? 기독교라는 이름은 있는가? 세상에서 기독교는 어떤 영향력이 있는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수도권장로회협의회(회장 최철수 장로)는 매년 실시하던 운동회를 취소하고 대신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100주년 기념순례”를 실시하여 지난 3.1운동 당시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그 역사의 흔적이 남은 길을 따라 순례하면서 그때의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4월 13일 오전 9시 30분 서울중앙교회(김진영 담임목사)에 집결한 200여명의 목사 장로들은 먼저 예배를 드림으로 일정을 시작하였다.

좌로부터 사회 우신권 장로, 기도 신민범 목사, 설교 김진영 목사

제1부 예배

준비위원장 우신권 장로(부회장)의 사회로 서울서부노회장 신민범 목사가 기도하고 성경 역대상 12:23-40절의 본문으로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지도자”라는 제목으로 김진영 목사(서울중앙교회)가 설교했다.

김목사는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의 직분을 가진 채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것은 어떤 신앙이었을까? 그것은 신행일치의 신앙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의 일이 아니라 하나의 일이었다. 믿은 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과연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믿은 대로 행하는 신앙을 가졌는가? 양적인 성장보다 신행일치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씀을 전했다.

이어 이규현 목사(신정교회)의 인도로 거짓을 몰아내고 순교정신을 회복하며 진정한 하나가 되기를 위하여 합심기도를 하였고 천환 목사(인천노회장)이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를 마치고 순례길을 나서기 전에 단체사진

제2부 선언과 출정

민병현 장로(직전회장)의 사회로 회장 최철수 장로의 대회사가 있은 후 김현섭 목사(하늘시민교회)와 구본창 장로(신광교회)의 선언문 낭독이 이어지고 10개 노회장과 장로회장이 태극기를 들고 앞에 나와 만세삼창을 하였다. 준비위원장 우신권 장로가 대회를 연 것에 대한  설명을 하고 준비위원인 정남환 장로가 순례코스에 대한 소개를 한 다음 총무 구본철 장로의 광고로 2부 순서를 마치고 본격적인 순례를 시작하였다. 11시에서 시작하여 오후 1시까지 2시간에 걸친 순례를 마치니 꼭 만보의 걸음이었다.

 

사진으로 보는 순례길 

/길잡이 정남환 장로(서울강남교회, 호서대학교 교수)

탑골공원

탑골공원에서

1919년 3월1일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이다. 학생대표가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공원을 나서 행진에 돌입하였다. 이 때 종로를 거쳐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길의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만세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의 거족적인 독립만세 시위는 이렇게 탑골공원에서 점화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0층 석탑이 있어 탑골공원이라 이름이 붙은 탑골공원은 본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대한제국 시대에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3.1운동의 발화지로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보신각

보신각을 마주보며

종로 보신각은 서울지역 3.1독립운동이 벌어진 주요 장소이다. 1919년 3월 1일 만세 군중들이 타종을 하였고, 3월5일 제2차 대규모 만세시위 군중들이 독립연설회를 개최하였다. 3월 9일부터 상인들이 동맹철시를 할 때에도 그 중심지가 되었다.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를 선포한 곳이다. 원래 보신루였지만 보신각이 되었고 그 보신각에서 아침저녁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에 종을 쳤기에 운종가라고 하였다가 종로가 되었다고 한다.

 

태화관 터

태화관 터에는 민족대표들이 모여 회의하는 그림이 있다.

태화관은 1919년 3월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이다. 민족대표들은 한용운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부른 뒤 출동한 일제경찰에 연행되었다.

 

3.1독립운동 기념 터 승동교회

승동교회당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학생대표들이 모여 모의하였던 곳이다. 승동교회는 3.1운동 준비과정에서 제1,4회 학생단 간부회가 열린 장소이다. 승동교회는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학생단 대표 김원벽이 다녔던 교회로 학생단은 이곳에서 간부회를 열어 조직을 정비하고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다.

 

독립선언문 배부 터 천도교 중앙대교당

천도교당 앞에서

3.1독립운동 거사를 위해 천도교 대표 등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검토 배부하던 곳이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은 1919년 착공하여 1921년 준공된 천도교 교당이다. 당시 이 교당의 건축 성금 일부가 3.1운동을 앞두고 진행된 각종 모임과 운동의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지어진 건축물 중 손꼽히는 건물로 조선인의 힘으로만 지어졌다.

 

안국역

안국역사에서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항일 독립운동 테마 역사관으로 재탄생하였다. 안국역은 한용운, 손병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집터와 가깝고 인사동으로 연결되는 관광명소가 밀접한 곳으로 3.1운동 콘텐츠를 담은 역사교육, 체험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독립운동가의 얼굴과 어록, 지하2층 ‘100년 충전소’에는 독립운동가 800명의 얼굴을 100초 동안 만날 수 있는 ‘100년 기둥’도 있다. ‘100년 강물’ ‘100년 헌법’도 있고 ‘100년 하늘 문’도 만날 수 있다.

 

운현궁양관

운현궁양관

1977년 11월22일 사적 제257호로 지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고종이 출생하여 12세에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성장한 잠저이다. 흥선대원군의 한옥과 양관을 보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원래는 궁궐에 견줄 만큼 웅장하였다고 하며, 대원군이 즐겨 쓴 아재당은 없어지고 한옥은 사랑채인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별당채인 이로당만이 남아있다. 운현궁의 양관(洋館)은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된 프랑스풍의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이다.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의 둘째 아들 이우가 이어받았다. 해방 직후 한 때 백범 김구가 2층을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는 덕성여자대학교 소유이다.

 

창덕궁 돈화문

돈화문, 지금은 도로가 났지만 전에는 넓은 광장이어서 사람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창덕궁의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3.1독립운동 당시 많은 군중들이 돈화문 광장에 집결하여 만세를 불렀다. 지금은 광장이 도로가 되었다.

 

연동교회

연동교회

1894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삼열의 조사 김영옥과 천광실이 시가전도에 힘쓴 결과 얻어진 신도들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연동교회는 최남선, 이갑성, 이상재, 함태영, 신마리아, 신의경, 김필례 등 민족지도자들의 온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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