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 시간을 기다리며 공항을 배회하다가 어느 기도실을 지나게 되었다. 안에 들어가 잠깐 앉아 있자니 대형 십자가와 몇 가지 예술 작품 등 성상(聖像)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기도를 드린 후 밖으로 나왔다. 기도실에 들어갔을 때 공항의 분주한 대합실과는 다른 차원의 어떤 분위기가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은 휘파람을 불거나 잡담을 늘어놓아서는 안 될 곳, 혹은 죽치고 앉아 ‘허영의 시장’(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 같은 글을 읽어서는 안 될 곳이라는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 전 어느 가톨릭 잡지에서 중국 지하 천주교회 젊은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가톨릭 신자들은 매주 은밀하게 모여 미사를 드린다. 전통적인 예복을 입은 사제가 있었고, 라틴어 미사와 부드러운 영창이 있는, 매우 예전적인 예배였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이 대학 공부를 위해 미국에 오게 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이들은 자신들을 후원해준 가톨릭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크게 실망하고 다시는 함께 예배를 드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교회는 격식을 갖추지 않고 자유로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사제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회중은 정해진 예배 의식을 준수하지 않았다. 바깥 세계와 똑같아보이는 분위기의 예배를 그들은 원하지 않았다.

글을 읽고 그들의 반응이 좀 극단적이지 않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들은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었다. 공항 대합실을 배회할 때 나는 무언의 메시지를 받고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희미한 불빛이 비치는 고요한 기도실로 들어갔을 때, 그런 메시지의 실재를 즉시 의식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화는 십자가의 도(道)와는 상반되는 ‘성공’과 ‘행복한 삶’에 관한 영상들을 매일 우리에게 쏘아댄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인터넷, 잡지 등이 우리에게 영웅으로 제시하는 인물들은 창조주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시고 내게 바라시는 어떤 인간관계나 목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모종의 ‘세속 현실 점검 장치’가 필요하다. 어떤 신성한 예배 장소로 들어갈 때 얻을 수 있는 그런 느낌 말이다.

물론 교회가 주변 문화로부터의 도피처 역할만 하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예배 중에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것은 참석자들에게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교회는 문화적으로 소통이 가능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서 교회는 뭔가를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사람들이 예배 공간으로 들어갈 때, 그곳이 특별한 종류의 신성한 장소임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그곳은 세상의 잡음이 사라진,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전임을 느끼게 해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죄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하며,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새롭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번역 김춘섭 예수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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