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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복지목회자 이약신<고신복지역사 인물 탐구-이약신(1898. 4. 25 ~1957. 1. 20)편>

1. 들어가며

고명길 목사/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 풀러신학대학원(수료), 인제대사회복지대학원(졸업)사)소망호스피스연합회, 노인요양원 소망의집과 천상소망요양원 대표

이약신목사는 고신교단 제1대, 2대, 3대, 6대 총회장을 지낸 목사님이시다. 그는 당대 실력과 영성을 겸비한 목회자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위해 봉사했던 탁월한 복지목회자였다.

일제 치하에서의 해방(1945년)이후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문제로 장로교가 분열될, 초기 고신교단 형성시기에 제1, 2, 3대 총노회장으로 섬겼고, 특히 고신총회로 정식 출발된 제 6대 총회시에도 다시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된 점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당시 교회와 목회자들의 존경과 지도력을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해방이후 마산에서 고아들을 모아 희망원을 설립하여 수많은 고아들을 돌보고 양육해서 많은 인재들로 키워낸 복지목회자로서 오늘의 경신복지재단의 초석이 되었다. 고신최초의 복지시설 ‘희망원’(진해)과 고신최초 의료기관인 ‘예도제중원’(부산)을 설립 운영한 이약신은 복지목회자로서 가히 고신의 죠지뮬러라 칭해도 손색함이 없기에 고신복지 역사 인물탐구에서 그 첫 인물로 이약신목사의 생애와 복지역사를 조명해 보려한다.

이약신 목사, 희망원에서

 

2. 목회자로서의 이약신목사

1) 그의 유·청소년 시절

이약신은 1898년 4월 25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오산) 익성동(용동)에서 아버지 이병승과 어머니 박은승의 여섯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집은 소농으로 가난하여 아들 셋은 어려서 사망하고 딸 둘만 살아 남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당시 사회는 신분세습, 양반층의 지배와 부패한 관료사회 및 세도정치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력이 소모된 상태에서 외세의 침략과, 특히 1876년 강화도조약 등으로 조선은 미, 영, 일, 중, 러 등 열방의 틈바구니에서 주체적 대응력을 잃고 멸망으로 치닫는 때에 태어났다.

아버지 이병승은 한학과 유교에 독실하여 조상제사 등 가례를 충실하게 지켰으나 마침 그 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여 집안에 모신 위패를 불태우고 기독교신자로 개종했다. 이약신이 두 살 될 때 두 내외는 입교하여 두 분이 함께 열심히 성경을 배워 철저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그의 자녀들의 이름을 애시(愛施-사랑을 베풀라), 약신(約信-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으로 지은것만 보아도 당시 부모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약신이 9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시 4년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애시와 약신은 고아가 되었다. 누나 애시가 집과 가산을 다 정리해서 본인은 서울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입학을 하고, 약신은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민족교육을 받게 했다. 여기에서 남강 이승훈, 춘원 이광수를 만나 민족혼을 공부하고, 전국에서 모인 애국학생들을 이곳에서 만났는데 이때 경남 웅천읍에서 유학을 온 주기철(1897년생)과의 만남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의 주기철과의 만남은 나중 약신의 신앙과 목회여정에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약신이 마산으로 내려와서 살게 되는 계기가 된다. 둘은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고, 일설에는 의형제를 맺었다고도 한다.

당시 이약신의 취미는 우렁찬 바리톤 음성으로 노래를 잘 불렀고, 음악과 오르간영어를 선교사들에게서 배우길 좋아했고, 축구를 매우 좋아 해서 나중에 마산 창신학교에서 축구선수도 하고 마산의 맹호축구단 선수로 뛴 적도 있었다.

 

2) 경남으로의 이주와 결혼, 일본 유학, 그리고 그의 영어공부

오산중학교에서 주기철과 만난 약신은 1916년 3월 오산중학교를 졸업(19명)하자마자 주기철의 고향인 경남 웅천으로 내려와 웅천 개통보통학교의 교사(18세)가 된다.

이듬해 1917년에 상업으로 큰 돈을 모은 이상소씨의 딸 이옥경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장인이었던 이상소씨는 1914년 호주선교사 라대궐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고 서리집사로 봉사하다가 1919년 문창교회 장로가 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약신은 장인 이상소의 재정적 도움으로 일본 동경유학을 떠나 동경 중앙대학 상과에 1918. 3월 입학하여 2년간 세계무역과 경제 동향을 공부를 했다. 이약신은 이때 미국교수들을 통한 강의를 소화하기 위해서 영어학원을 다니며 영어공부에 매진을 했었다. 나중에 그가 신학교에 가기 전 마산으로 돌아와 영어회화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추마전 선교사 등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약신은 신학교에 입학할 때쯤 이미 상당한 영어실력을 갖추었었다. 이는 나중에 호주 방문과 미국방문 때 외국인들과의 교류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잇다.

 

3) 김익두목사의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소명을 확신

1919년 3.1 독립운동이 큰 좌절을 겪고 온 나라가 방황하는 시점에 김익두목사의 부흥회는 영혼구원과 민족복음화라는 영적각성을 크게 일으키고 있었다.

1920년 5월 마침 마산 문창교회(한석진목사 시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에서 개최된 김익두목사 부흥회에서 주기철도 청년들과 함께 참석해서 큰 은혜를 받고 웅천읍 북부리교회 권찰직을 맡아 교회를 섬기면서 1922년 3월 평양신학교로 입학을 결정하여 떠나게 된다.

이약신은 친한 친구 주기철이 신앙적 결단과 헌신, 평양신학교로 입학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도 그 길로 부르심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마침 마산서 가까운 용원에서 부흥회가 있다는 소식에 참석한 첫날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특송을 부르자 참석한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게 되자 집회를 마치고 김익두목사가 부흥사 사역에 찬송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니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이약신은 김익두 목사의 이 제안을 음악인으로서의 사역자가 아니라 신학공부를 하여 목회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4) 신학에로의 부름과 목회여정/주기철목사의 양산교회 전도사직 이양

신학교 진학은 사모님이 쉽게 동의를 잘 해 주지 않아 2년간 기도하며 지내는 중

1923년 1월 마산 문창교회 안수집사(25세)가 되고, 1924년 1월 마산 문창교회 장로장립(26세)을 받고 부인은 서리집사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신앙생활을 뜨겁게 하면서 신학공부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사모님은 상업으로 큰 부를 이룬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앙도 아주 현실적이어서 평생 일기를 쓰시고 가계부를 빠짐없이 쓰실 정도로 이재에 밝고 경제적 계산이 빠르고 정확하신 분이었다. 그러니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야하는 목회자의 길을 쉽게 따를 수 없어 2년간을 더 함께 기도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인도를 확신하고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신학의 결단을 내릴 때에도 친구 주기철의 도움과 안내가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평양신학교 입학을 한 주기철 전도사가 1922~1925년도까지 양산교회 전도사로 주말마다 내려와서 시무를 하고 설교를 했다.

주기철목사가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초량교회로 이거하면서 양산교회 전도사직을 이약신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이약신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신학교로 부르시는 부름으로 확신하고 1925년부터 온 가족이 양산으로 이사하여 전도사(27세)로 섬기게 된다.

1926년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28세)한 후 그해 7월까지 양산교회를 주말마다 내려와서 시무하며 설교했다. 17세에 평안북도 정주를 떠나 경남을 제 2고향으로 삼은 이약신은 12년 만에 평안도 땅을 다시 밟은 것이었다.

 

5) 평양신학교 시절

이약신은 1920년대 말 평양신학교의 대 부흥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약신보다 2년 늦게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박윤선박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이약신목사 설교집, 편자 최성환, 칼빈문화출판사, 1960)라는 책 서문에서 “1920년대 후반 평양신학교에서는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교수 중에서 어드만 박사를 중심으로 성령을 체험한 부흥운동이 학생들 사이에서 뜨겁게 일어날 때 이약신은 평양신학교 재학시절 영계의 선봉이었으며 교내 부흥에 있어서 학우 중 선봉으로서 장행(壯行,용감하게 행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약신은 바리톤 음성의 음악적인 소질과 감수성이 풍부한 성품으로 신학교 내에서 강렬한 기도회와 성경공부에 집중하여 어드만 교수와 함께 교내 부흥운동의 선봉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지역전도하는 이약신 목사

 

6) 진주 옥봉교회(진주교회) 부임과 부흥

1929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이약신은 1월13일 공동의회 결정과 4월 3일 임시노회 허락으로 목사안수(31세)를 받고 부임하여 시무하게 되었다. 그동안은 1905년 창립된 이래 선교사들이 관여해야 할 정도로 자치와 자립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임당시에도 호주선교사 권임함 목사(Rev. Cunningham)가 당회장으로서 이약신목사를 동사목사로 위임하였던 것이다.

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훈련과 대 부흥운동을 주도한 열정은 옥봉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주일학교와 청소년부(불량청소년 영어공부, 성경공부반 개설), 남녀 전도회를 활성화 시켰다. 권찰회를 조직하여 남녀권찰 12명이 다섯구역을 나누어 돌보게 하고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구역기도회로 모여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부임 직후 선교사들이 시작한 성경학원에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저녁성경공부 모임에 2천명 이상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당시 진주시 인구가 2만명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그 집회 열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교회 발전을 위해 남녀 교우 20여명으로 “십일조회”를 조직하여 장로, 집사들이 회장, 서기, 회계를 맡아 교회발전을 위해 헌금을 드리고 남는 돈은 금융조합에 맡겨 관리하면서 회원도 계속 늘어 교회발전에 큰 공헌을 남겼다.

1929년 9월에는 김익두목사님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한주간 했는데 매일밤 1천명 이상이 회집하였고 믿기로 결신한 새신자가 340명에 달했고, 감사헌금만 305원 50전이 나올 정도였다.

진주교회사(1905~1930)의 저자는 이약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강장한 열심가요 기도적 생활을 힘쓰고 부흥적 위대한 능력이 또한 많았더라. 나이는 비록 청년이로되, 매사를 주선하고 진퇴함은 백전백승한 노장 같더라...죄를 침에 산악이 무너지는듯한 음성은 비수로 찌른 듯 통정한 느낌을 주고, 절실한 권면은 감화하는 능이 있도다. 위로하는 부드러운 말에는 위안함이 있고, 무마하는 뜨뜻한 손에는 사랑함이 있더라. 마른 땅같은 심령에게 생명강물을 대어 주었으며, 마른 해골같은 영들에게 활기와 윤택함을 입혔도다....피곤한 자가 상쾌한 정신을 얻고 약한 자는 강한 힘을 얻었도다....이런고로 우리교회를 복 있다고 하더라”

이약신의 이런 옥봉교회 뜨겁고 열정적인 목회는 그리 오래가지를 못했다. 부산초량교회의 간절한 초빙과 친구 주기철목사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7) 주기철 목사 후임으로 부산초량교회 부임과 부흥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주기철목사가 양산교회를 사임하고 1926년 1월 부산 초량교회로 부임하여 만 6년간 시무하고 마산 문창교회로 전임해 가면서 절친 이약신 목사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고, 부산 초량교회는 공동의회를 한 결과 전체 148명의 유효투표 중 찬성 145명, 반대 3명으로 거의 만장일치로 청빙이 가결되어 1931년 8월달에 초량교회 제 4대 목사로 취임했다.

주기철 목사는 이약신과의 오랜 친구사이로 초량교회에 몇 번 설교자로 초청을 했고 교인들도 익히 잘 알고 있었던터라 압도적인 찬성으로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케 된 것이었다.

주기철목사의 목회로 어느 정도 안정된 교회에 부임한 이약신은 교회부흥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어려움과 고통을 함께 하는 구제와 사회봉사에도 최선을 다했다.

부흥회 헌금도 부흥사 사례 및 교통비 등으로 쓰고 남은 헌금은 지역사회 봉사비와 구제사업에 사용했다. 당시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재해를 입은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헌금과 의복 등 구호물품을 준비하여 구제하였고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절기헌금으로는 극빈자 구호는 물론이고 개척교회 건축헌금과 어려운 목회자 구제, 호주 선교사 맥켄지 목사가 설립한 나병원을 돕는 일과 장로회 신학교를 돕는 헌금으로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초량교회 100년사 집필자는 이약신의 목회시대를 “초량교회에 최대의 부흥과 발전을 가져다주었다”고 평가를 했을 정도로 활기차고 역동적인 목회활동을 하였다.

 

8) 호주 장로교 100주년 기념대회의 초청과 방문

1890년 첫 호주선교사가 한국에 온 이후 부산, 마산, 진주, 거창, 통영, 울산지역은 호주선교사들의 주 활동무대였다.

당시 빅토리아주 장로교의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목사부부들과 독신여성들을 대거 한국으로 파송하였는데 1891년 독신여성 3명을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일제에서 해방되기 전까지 무려 35명의 선교사를 이 땅에 파송하였다.

이때 설립한 학교가 부산 일신여학교, 진주 시원여학교, 마산 의신여학교, 통영진명여학교 외에 배돈병원, 부산 나병원 등 많은 학교와 병원들을 설립 경남지역 선교를 주도했다.

1920년대 호주교회의 해외선교비 70%가 한국선교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아 경남지역의 선교가 얼마나 크게 활성화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호주교회가 미국, 영국, 캐나다 선교부와 함께 한국선교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 나라 경제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다음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호주선교부가 한국선교를 시작한 1910년대 메디슨 추계에 따른 각국의 1인당 GDP 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위 호주(5715$), 2위 미국(5301$), 3위 영국(4921$), 4위 캐나다(4447$)

5위 벨기에(4220$), 6위 프랑스(3485$), 7위 이태리(2564$), 8위 핀란드(2050$)

9위 오스트리아, 헝가리(1986$), 10위 그리스(1592$), 11위 루마니아(1527$)

11위 불가리아(1527$), 12위 러시아(1448$), 13위 일본(1387$)

이를 볼 때 당시 한국선교를 주도했던 호주, 미국, 영국, 캐나다가 세계경제 1~4위를 점하고 있었고 세계경제 1위였던 호주교회가 한국의 남쪽지역 선교를 책임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바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아울러 호주 선교부로부터 복음을 먼저 받은 부산, 울산, 경남이 전국에서 제일 잘 사는 지역이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과 오늘날 경제대국 한국이 또 다른 후진국가에 복음을 전해야 될 책임 또한 크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국의 경제발전을 기초로 해외선교를 열심히 하던 1930년대 호주 장로교회는 10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면서 자신들의 선교지에서 한명의 목회자를 초빙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약신목사였다.

당시 호주 여선교사 허대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약신목사가 호주를 방문해 주도록 최초로 초청을 받은 것은 그가 진주에서 목회하던 때였다. 이에 호주방문을 위해 언어와 다른 준비들을 다 했지만 호주 경제연건이 좋지 않아 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7년후 다시 호주장로교 100주년 행사에 초빙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에 일제치하에서 여권발급이 매우 까다로웠지만 부산의 호주선교사 맥켄지 목사의 주선으로 어렵게 성사를 시켰다”고 했다.

당시 맥켄지 선교사는 1910년 부산에 선교사로 와서 나환자를 위한 수용소와 병원을 설립해서 운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총독부에서 표창과 작위를 받아 일본고관들과 친분도 있었고, 무엇보다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것이 아닌 국가의례로 받아들여 찬성하는 입장을 취함으로 여권발급이 협조될 수 있었다.

이약신목사는 한국교계를 대표해서 호주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부산 부둣가에 이약신목사를 환송하기 위해 수백명의 부산지역 교계인사들이 모여서 환송을 해 준것만 보아도 이약신목사의 호주방문은 빅뉴스였다.

1937년 5월 7일 부산부두를 출발한 이약신목사는 일본-홍콩-싱가폴을 잇는 여객선을 타고 무려 3개월만인 8월8일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 항구에 도착했다. 이때 호주 멜버른에 간호학 공부를 위해 유학을 떠나는 손옥순(1936년 세브란스 간호학교 졸), 이영복(1937년 세브란스 간호학교 졸) 두 학생이 같이 동행을 했고 100주년 기념대회 등 이약신의 활동기간 동행을 한 것으로 보아 독실한 기독신자들이었고 이들은 나중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세브란스 간호학교 교수로 초창기 한국 간호전문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37년 8월 7일 멜버른에 도착한 이약신은 긴 항해로 지친 심신을 9월말까지 쉬었다. 체류기간동안 매튜 목사(100주년 기념대회의 사무총장)가 호스트 역할을 하며 숙식을 제공하였다. 11월 9일 추수감사절에 개최되는 호주장로교 100주년 기념대회까지 남은 기간 동안 마산과 부산 등지에서 친분을 쌓아온 호주 선교사들 가정과 지역교회들, 여선교회 모임, 등 다양한 행사에 초대되어 호주교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열매들을 보고하며 감사를 표했다.

드디어 1937년 11월 9일 벨버른시 타운홀에서 개최된 빌토리아 장로교회의 백주년 기념대회가 시작되었다.

호주는 영국본토인들, 특히 스코틀랜드인들이 대거 이주해 와서 형성된 공화국이었다. 이들은 벨버른을 중심한 빅토리아주 지역에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모교회로 삼고 이를 계승한 입장에 있었기에 100주년 행사에도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지도자들을 대거 초청하였고 웨일즈 장로교회에서도 참석했다. 초청인사들 중에서는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이약신목사가 홀로 참석했다.

3시간여 동안 진행된 예배와 참석 내빈 소개와 인사가 진행되는 중에 이약신 목사가 맨 마지막 순서자로 소개되었다. 흰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동양에서 온 이방인이 강단으로 걸어 나오자 초청한 스탭진들과 온 청중은 과연 이 동양인이 너무 긴장해서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사람들을 긴장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자 청중들은 압도되었고 처음부터 유우머와 함께 여유있게 대회 분위기를 사로잡아 가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약신목사는 30여년전 시작한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로 한국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보고와 호주 선교의 놀라운 성과들에 대해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연설 말미에 이목사가 지금껏 보내준 호주교회의 후원을 감사하며 멀리 한국을 위해 더 많은 후원과 사랑을 호소하자 장내는 떠나갈듯한 박수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이런 그의 모습을 지켜본 호주교회 사람들은 멀리 동양에서 온 이 사명에 불타는 그리스도의 종을 호주에 잘 초청했구나 하는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으로만 보였던 이들에게도 그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는데 하물며 한국에서 그와 같이 일하며 친분관계를 쌓았던 선교사들에게야 그의 이날 저녁의 승리한 모습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감격과 감사를 자아내는 것이었겠는가! (허대시 선교사가 당시 교계잡지에 기고한 “이약신목사 회상”에서)

이때 이약신목사가 전한 한국교회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강연요지가 호주 교계신문(The Messenger, Nov, 1937)에 소개되었는데 “한국사회를 위해 교육의 역할이 중요함을 전제하면서 기독교회는 예수의 구원의 진리와 사랑을 깨닫는 참된 인간으로 거듭나는 신앙인이 되게 하는 것임을 첫째로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신령한 설교와 복음전도로서 사람들을 감화시켜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며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사랑하며 봉사하는 일이 교회의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했다.

허대시 선교사는 그의 글에서 “이약신 목사의 호주 방문은 감사의 인사 이상의 많은 것을 호주교회에 가져다주었다. 이목사는 향기와도 같이 우리에게로 와서 빛을 발하고 갔노라”는 당시 분위기를 전해 주었다.

이약신목사는 11월 9일 백주년 기념대회 행사 이후에도 이곳저곳에 많은 초청을 받아 설교와 강의, 그리고 각종 복지시설들을 돌아보았다. 특히 미혼모중심의 시설과 교회, 아기들의 집 방문, 킬로만 어린이집 방문, 14명의 정직원과 100명의 자원봉사자들이 500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사우스 리치먼드 유치원 방문, 병든 아이들을 모금한 후원금으로 치료해 주는 성 앤드류 병원 등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고국에 돌아와 펼치게 될 복지와 병원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100주년기념대회 참석과 많은 교회와 단체에서 행한 설교와 강연이 당시 호주 기독교계 지도자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었는지는 그들이 이약신에게 보내준 130여편의 감사편지와 사진들이 지금도 생생히 증언해 주고 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듬해인 1938년 봄철에 호주에서 또 긴 항해를 거쳐 부산으로 무사히 귀국하였다.

 

9) 부산 최초 기독교병원 예도제중원 설립

1년여 기간동안 떠나 있었던 초량교회의 목회에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부산 초량에 “예도제중원(禮道濟衆院)이라는 의료기관(병원)을 설립하였다. 이약신목사가 호주방문 시에 예도(禮道, 호주 본명은 불명)라는 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기금 1만여원의 거금을 희사해 준 것으로 부산 최초의 기독교병원을 설립하였다. 이약신 목사는 이 병원을 설립하면서 당시 초량교회의 교인 여의사인 정봉금과 간호사였던 그의 누나(李 愛施)를 직원으로 예도의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와 일반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이 예도의원은 1939년 2월경 일제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수난과 호주교회방문으로 인한 친영, 친미 인사로 간첩혐의까지 받아 심한 고문을 받아 결국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1939년 6월경 평양의 신광교회로 이사가면서 예도의원 운영에서 멀어졌다가 1941년 이약신의 큰 사위 이봉은 의사가 원장으로 부임하여 운영하였다. 이봉은 선생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진주의 배돈병원에서 2년간 봉직하다가 호주 선교사들이 철수하면서 배돈병원이 폐원하게 됨에 따라 부산의 장인이 설립한 예도의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10)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구속과 가족의 수난

평양 신광교회에서도 계속되는 신사참배 핍박으로 얼마 지내지 못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예도의원 가까이에 작은 포목가계를 열어 가족생계를 이어갔다. 결국 이약신목사는 부산 도경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구속당해 제 5감방에 수감되고, 제 6감방에 손명복전도사가 구금당해 있었고, 1941년 7월에는 한상동, 최상림, 주남선, 이현속, 조수옥 5명이 부산도경에서 심문당한 후 평양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와 간첩혐의까지 받은 일경의 계속되는 고문으로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도경은 이약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사위 이봉은에게 병보석으로 데리고 나가라고 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 사모님과 사위, 누나 이애시의 극진한 간호로 겨우 회복되어 더 이상 부산에 머물러서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만주의 처가로 먼 피신길을 떠나 보내고 나중에 가족들도 합류하게 된다. 나중에 만주에서 송명규목사를 만나 10개월 동안, 서완선 청년과 5개월여 동안 유랑같은 피신생활을 이어가다가 1945년 8월 15일 극적인 조국광복으로 귀국을 하면서 그해 10월 부터 마산 문창교회를 시무하게 된다.

 

3. 복지목회자로서의 이약신

1) 희망원 설립과 조수옥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한 때는 해방을 맞아 마산에서도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였다. 일본군에 징용당했거나 강제연행 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 귀한도중 부모와 가족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특히 해방 직후 가을철에 콜레라가 마산과 경남지역에 만연해서 조부모나 부모가 사망한 고아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들 중 고아가 된 일박이와 여동생 세명을 집으로 맞아 들였다.

이것이 이약신 목사가 고아들을 돌보는 아동복지목회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출옥성도 중에 마산을 방문했던 조수옥전도사에게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계획인지를 물었고 감옥에 있을 때부터 방황하는 아이들을 위한 고아사업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이에 이약신목사는 마산에 머물면서 고아사업을 함께 하자고 간곡히 제안했다.

그리하여 1945년 12월 초 일박이와 여동생 3명을 포함 10여명의 아이들을 모아서 “희망원”이라는 고아원을 개원했다.

그러나 방이 4개뿐인 집으로서는 늘어나는 고아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던 중 마침 의신여학교 기숙사가 비자 조수옥 전도사는 그곳으로 희망원을 옮겨가 아이들을 더 많이 받아들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약신의 사모님은 먹일 것, 입힐 것이 부족하여 형편에 맞게 받아들이자고 했다. 두 분은 고아원 설립과 운영에 관해 입장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조수옥은 고아사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더 큰 장소가 필요하다며 희망원의 일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인애원”으로 독립(1946. 9월)하였다.

이런 이약신의 희망원과 조수옥의 인애원 분립은 약간은 의견차이인 것처럼 보이나 먼 훗날 우리 고신교단과 남부지역의 복지발전확산에 오히려 크게 기여했다. 이약신의 희망원은 진해의 대표 복지기관(경신복지재단)으로, 조수옥의 인애원은 인애복지재단(경남종합사회복지관)으로, 다시 인애원은 약 10년간 조수옥과 함께 섬겼던 주경순(주남선목사의 딸)에 의해 애리원(1958. 8월, 주경순-주경세-주정은)으로 각각 분리 독립하여 마산의 대표 복지기관으로, 발전하며 훨씬 더 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섬긴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된다.

조수옥전도사가 인애원을 설립하여 분가해 나간 이후 이약신의 희망원 고아사업도 사모님의 바램대로 소규모사업에 머물수가 없었다.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이약신목사의 순수한 뜻은 늘어나는 고아들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고아원을 본격적으로 설립해서 경영하기로 결정을 하고 더 큰 고아원집을 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산에서는 그런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때 진해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 목회자를 구하는 중에 이약신목사를 만나 고아들을 위한 건물도 같이 제공하겠다며 청빙제안을 하자 그것이 고아사업을 계속 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진해교회로의 부임을 결정하게 된다.

 

2) 진해교회 부임과 희망원 이전

이약신목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고아들을 돌보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사랑의 봉사로 인식을 했고 같은 맥락에서 고아원 경영도 교회 목회의 한 부분으로 믿고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1946년 10월 진해교회 부임과 더불어 본격적인 희망원 사역을 시작했다.

해방후 미군정하에서 미군들이 부산 마산 등지에서 고아들을 10명~20명씩 트럭에 싣고 오자 희망원의 식구는 금새 70명 이상이 되었다. 핍절한 시절 이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이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희망원은 기독교 선교를 분명한 목적으로 설립하였기에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교육을 하고 교회의 주일학교에 출석하게 하는 등 기독교인으로의 양육에 주력했다.

이약신 목사 고아원 예배 인도 모습

 

3) 복지목회에 대한 진해교회의 반대와 사임, 그리고 희망원 이전

그러나 해방이후 신사참배문제로 인한 양 진영간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이약신은 교회의 분열과 대결은 원치 않았으며 화합과 평화를 주장하며 다함께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화합하기를 바랬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많은 집회 초청이 있었고, 또 한편 고아원 경영도 집중하다보니 진해교회 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함안에서 이사를 와 진해교회 장로로 취임한 권성문 장로를 중심으로 이약신의 다중 역할에 불만을 제기하며 목회자로서 고아원 사업을 겸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목사는 교회 전도와 교인을 돌보는 목회 일에 전념해야 하며 불우한 이웃을 위한 사회사업은 목회자의 사명이 아니라고 인식한데서 부터 문제의 갈등이 생겼다.

당시 경남지역 장로교단에서도 목사가 사회복지사업을 겸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이런 교계의 분위기에서 권성문장로는 이약신 담임목사에게 양자택일의 결단을 압박했다.

참고로 권성문장로는 진해로 이사오기전 함안역전교회(담임 박손혁목사-박재영목사님의 부친)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당시 함안역전교회 최우영(부친이 장로)씨가 고아원을 설립 운영하면서 미국의 원조물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 축재를 하는 등 복지운영자들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것들을 보아왔기에 목회자의 고아원 사업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았을 것이라는 증언이 있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복지목회자들이 눈여겨 보아야할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약신과 사모님은 일찍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사랑의 실천과 교회의 사회선교의 책임에 대한 확고한 신앙 아래 일제시대부터 뜻을 품었던 고아원 경영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1949년 9월 이약신은 결국 진해교회를 사임하고 해군이 사용했던 큰 목조 요정건물과 넓은 대지를 불하받아 희망원을 이곳으로 옮겼다.

 

4) 부산 항도교회 부임과 진해남부교회 개척설립

진해교회 사임후 목회를 쉬고 있던 이약신은 1950년 2월 9일 부산항도교회 청빙을 받아 부임하여 목회를 하였지만 진해에 두고 온 희망원이 사모님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마침 진해교회 교인들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성도들이 진해교회를 나와서 개척교회를 하자며 이약신목사님의 진해로의 복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1950년 11월 부산 항도교회에서의 10개월간의 목회를 사임하고

1950년 12월 17일 진해 희망원으로 돌아온 이약신목사는 희망원 예배실에서 진해남부교회를 개척한다. 이때 진해교회에서 나온 이필희, 주외선, 희망원 식구 등 50여명이 개척멤버로 동참하여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본격적인 복지목회로의 걸음을 시작하였다.

 

4. 고신교단과 이약신

1) 초대 총노회장 및 총회장

1946년 6월 진해에서 신학강좌가 개최되면서 태동된 고신교회는 결국 1952년 9.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제1회 총노회로 모여 공식 출범을 하게 된다. 이약신은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경남지역 교회의 대표목사였다. 당시 박윤선박사를 모시고 와서 진해 신학강좌를 주도했던 한상동, 주남선목사가 신학교 설립에 힘쓰는 동안 이약신은 신사참배문제로 갈등과 긴장관계에 있던 교계에 화평과 화합을 주장하며 교회연합을 호소한 전형적인 화합형 목사였다.

그러다 보니 고신 초기 제1회, 2회, 3회 총노회장을 맡았고, 4회, 5회에 잠시 한상동목사가 총노회장을 맡았다가 경남, 부산, 진주, 경북, 전라, 경기노회로 확대된 명실상부한 제6회 총회에서 다시 이약신목사가 총회장을 맡은 것은 그가 당시에 얼마나 교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목회자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미국방문과 구호활동

힘겨웠던 6.25 한국동란이 끝나고 1954년 이약신목사가 제3회 총노회장을 맡아 있던 때 미국의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의 초청을 받고 이약신은 7월 31일 박윤선, 한상동, 박손혁과 함께 4명이 출국을 했다. 박윤선과 한상동목사의 주관심은 고려신학교를 위한 후원과 학문적인 연대를 위함이었다. 이를 위한 공식일정을 마치자마자 한상동, 박윤선, 박손혁은 먼저 귀국을 하였다.

미국방문(좌로 부터 박손혁, 이약신, 한상동 목사)

그러나 이약신은 그동안 희망원을 힘써 후원해 주었던 카우치(미군정시절 주 후원자)씨와 미국 내의 후원자 도우티 여사를 만나 그동안의 도움에 감사인사를 전하고자 했다. 또 그들이 먼저 보고 싶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약신을 직접 만난 도우티여사는 고아들을 위한 이약신의 열정과 신앙적 인품, 그의 유우머와 매너들에 매료되어 택사스주 여러교회와 단체에 설교와 초청강연을 연결했고, 이를 보도한 지역 신문들의 소개로 택사스에서만 반년이상을 한국의 실정과 고아원사역들을 소개하는 일정들로 귀국은 계속 연기되었다. 그가 택사스와 지역 교회들, 세계교회 구호집행위원회, 라이온즈 클럽 등에게서 모금한 후원물품에는 고아들을 위한 온갖 물품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트럭까지 1차로 선박회사를 통해 운송한 구호품이 무려 1만5천톤이나 되었다.

1955년 6월 17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승만대통령의 특별초청을 받은 도우티여사와 함께 비행기로 서울공항에 도착한 날이 6월21일었으니 출국한지 거의 1년여만이었다.

이약신목사는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제3회 총노회장으로서 그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고 미국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정과 죄송한 마음을 담아 당시 총노회 서기 홍순탁목사와 부회장 한상동목사에게 자신을 널리 양해해 달라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다. 그러나 고신교단 태동시 긴박한 현안들로 총노회 임원들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이약신은 두 번의 편지에도 답장이 없음에 매우 섭섭해 하셨다는 것을 그의 일기에 토로하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제4회, 제5회 총노회에서는 이약신 대신 한상동목사가 총노회장으로 피선된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고 이때 이약신은 잠시 총노회 일에서 물러나 비로소 고아들을 돌보는 아동복지목회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초창기 혼란기를 넘어 6개 노회, 명실상부한 총회로 출발한 제6회 고신총회에서 한상동목사가 아닌 이약신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당시 그가 얼마나 많은 교회와 목사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았는지 엿볼 수 있다.

차량을 기증한 도우티 여사와 함께

 

3) 귀국 후 과로로 인한 건강악화와 소천

1955년 6월 21일 귀국으로 1년 가까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총노회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과 특히 남부교회 양떼들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에 대해 목회자로서 매우 괴로워했다.

이에 대한 책임의식 때문에 교회적으로는 주일낮예배에서부터 수요예배, 매일새벽기도 등 목회전반에 진력하면서 희망원 사역 또한 최선을 다했다. 교단적으로는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과 분열이 깊어갈 때 교회의 화합을 위해 부르는 곳은 어디나 달려가 부흥회를 인도하며 혼신을 다해 섬겼다. 1년여 계속된 과로로 몸은 점점 더 쇠약해져 갔고 원기부족으로 설사도 자주했다.

고신교단도 설립 10주년이 되면서 교회수가 565개, 1만5천명의 교인에 6개 노회로 성장하자 1956년 9월 20일 제6회 총노회를 총회로 격상시키며 개혁운동 1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결의하고 이약신목사를 총회장으로 피선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문제로 교회들마다 교회당 재산권 분쟁이 발생하자 법적소송으로라도 교인의 총유로 하자는 송상석측, 법적소송은 덕이 안된다는 박윤선측, 깨끗이 포기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한상동측으로 나누어지면서 신학논쟁으로까지 비화되고 또 다른 주일성수 문제 등으로 급기야 박윤선교수가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탈퇴를 선언한다.

송상석, 박윤선, 한상동은 이약신의 오랜 신앙동지들이며 후배들이었기에 실망과 아픔이 컷고 총회장으로서의 이런 논쟁과 분열을 극복해야 할 무거운 책임을 느끼며 동분서주 하는 동안 건강에 깊은 타격을 입어 그해 10월부터는 점점 더 야위고 식은땀을 흘리며 힘들어 하다가 12월 초순에는 결국 몸져 누우셨다.

 

4) 진해남부교회에서의 고별설교

남부교회에서의 그의 마지막 설교는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는 본문으로 <생사에 대한 사도바울의 견해> 라는 제목의 설교를 남겼다(파수군 제70~75호 1958)

1. 바울의 생애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었다.

2.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바울은 죽음을 오히려 기뻐했다. 죽음은 죄악의 세상에서 벗어나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새로운 시작이다.

3. 죽음이란 사망의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관문이다. 육신의 소유욕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4. 마지막으로 바울은 죽음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같이 있다는 믿음으로 죽는 것도 유익하며 죽음을 기쁨게 받아 들였다.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뒤를 따르자! 주님이 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 사도바울이 따른 그 길을 우리도 가야만 한다!

이때 부른 찬송도(찬송가 합동 513장)

1. 예루살렘 내복된집 네이름 높도다. 이수고 언제그치고 반가히 만날까(2)

2. 예루살렘 내복된집 나 언제가리까. 나언제 수고그치고 내복을 받을까(2)

이약신목사는 그의 마지막 설교와 찬송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머지않아 천국에서 만날 예수님을 고대하는 그의 아름다운 신앙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병환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간암이었다. 잦은 설사와 황달증세로 40여일간을 더 병상에 누워 투병하시다가 위독하시다는 말을 듣고 온 진해교회, 남부교회 등 많은 지인들이 방밖 마당에서 찬송과 기도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조용히 주님품에 안기셨다. 1957년 1월 20일 주일오후 2시, 그의 나이 59세였다.

 

5. 이약신목사의 복지목회사역 개요

1) 희망원(경신복지재단) 설립과 운영

1945년 12월 마산에서 설립한 희망원은 다음과 같이 발전해 왔다.

이약신의 희망원은 우리교단 최초 제1호의 복지시설이다.

왜냐하면 희망원 설립은 1945년(12/23일)이고 교단의 태동은 진해 신학강좌가 1946년(6/23~8/10일), 고려신학교 개교가 1946년(9/20, 부산 금성중학교)이고 교단의 정식 출발점인 제1회 총노회가 1952년(9/11, 진주 성남교회당)이었고 그 총노회의 초대 총회장이 이약신 목사였으니까 그가 설립한 희망원을 고신 제1호 복지시설로 간주할 수 있다.

이 희망원은 이약신 별세후 그의 큰사위 이봉은장로(장녀 이효주의 남편, 이보민교수의 부친)가 2대원장으로, 지금은 이약신의 3대손 이경민원장(전 고려신대원 이보민교수의 동생)이 섬기며 경신복지재단과 희망의집으로 발전해 오고 있다.

 

2) 예도 제중원 설립

예도 제중원은 1938년 이약신목사가 호주를 방문하고 돌아온 그해 부산 초량동에 설립 개원했던 부산 최초 기독교병원이다. 당시에 부산에는 맥켄지 선교사가 경영하는 나환자 병원이 있었을뿐 기독교병원은 없었다.

이 병원은 이약신목사가 호주방문 시에 예도(禮道, 호주 본명은 불명)라는 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기금 1만여원의 거금을 희사해 준 것으로 설립하였다.

병원 개설은 당시 초량교회의 교인이었던 정봉금(鄭鳳今)여의사와 그의 누나 이애시(李愛施)간호사를 직원으로 병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와 일반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이 예도의원은 1939년 2월경 일제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수난과 호주교회방문으로 인한 친영, 친미 인사로 간첩혐의까지 받아 심한 고문을 받아 결국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1939년 6월경 평양의 신광교회로 이사가면서 예도의원 운영에서 멀어졌다가 1941년 이약신의 큰 사위 이봉은 의사가 원장으로 부임하여 운영하였다. 이봉은 선생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진주의 배돈병원에서 2년간 봉직하다가 호주 선교사들이 철수하면서 배돈병원이 폐원하게 됨에 따라 부산의 장인이 설립한 예도의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예도제중원의 설립 의미는 우리교단 이약신목사가 부산에서 최초로 설립한 기독교병원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1930년대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 강요 등 안팎의 도전 앞에서도 호주 100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가서 혼자 잘 지내다 온 것이 아니라 고난 받는 선교지 한국의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돕기 위한 병원설립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선교지 한국을 돕는 것이라고 강하게 호소했다는 것과 이에 “예도”라는 분을 통해서 후원금 1만원을 받아와서 부산 최초의 기독교병원을 설립했다는 것은 이약신목사가 얼마나 복지와 의료선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실천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6. 이약신 목사의 복지목회의 동기

이약신목사의 복지목회자로서의 조명에 있어서 그가 그 당시 어떻게 고아원사역과 병원설립이라는 복지목회를 꿈꾸고 실천에 옮겼을까 하는 점이다.

1) 그의 부모님과 누나의 영향

1886년 이후 태동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의료, 교육및 전도활동은 새로운 근대국가를 갈망하는 한국민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큰 영향력을 미칠때 평안도 지역에서 특히 기독교로 개종하는 인사들이 급증하여 교회가 많이 세워졌고 그때 그의 부모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6남매 중 살아남은 딸과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에 그분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딸은 애시(愛施), 아들은 약신(約信)으로 지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복음을 받은 후 딸은 선교사들이 세운 정의여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러나 1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애시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계를 꾸리며 동생 약신을 돌보다가 4년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가산을 정리하여 동생 약신(12세)은 오산중학교에 자신은 세브란스 간호학교(19세)로 진학하여 졸업(1915년)한 이후 일생을 독신으로 살며 동생을 돌보며 돕는 삶에 일생을 바쳤다.

선교사들이 세운 세브란스에서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사랑과 봉사정신을 배운 그대로 그는 일생을 간호사로서 살았다. 1919년 3.1운동의 좌절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할때 함께 그곳으로 가서 군자금확보 실패로 좌절에 빠져 자살을 시도한 이범석을 살려내기도 했다. 그 이후 귀국해서 통영으로 가서 통영교회 여전도사로서 활동을 하면서 간호사로서 의료시설이 없는 어촌지역에서 병치료를 검하면서 많은 사람을 전도했다. 나중에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이 된 공덕귀 여사의 어머니와 그 집안도 그의 누나가 전도 했다.

1923년 이후 공주 영아원에서 근무하다가 나중에 동생이 초량교회 담임목사시절 예도제중원을 설립할 때 간호사로 봉직하며 동생을 도왔다.

이약신목사가 진해에서 정착하여 남부교회와 희망원을 섬길때 고모도 진해로 내려와 동생의 목회와 희망원 사역을 지근거리에서 도우며 희망원 주변의 환자를 치료하는 일과 전도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고 행암에서는 3-40명의 신자를 모아 개척교회도 시작했다.

그러나 동생이 갑자기 급성간암으로 소천하자 평생을 동생을 위해서 독신생활을 해 온 누나로서는 삶의 좌절과도 같았고 그해 5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1960년 11월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약신의 복지목회 곁에는 간호사였던 누나의 든든한 지원이 있었고 큰 힘과 격려가 되었던 것이다.

 

2) 초기 선교사들의 영향

이약신목사는 오산중학교, 마산에서의 신앙생활, 평양신학교시절, 진주 옥봉교회 담임과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목회시절에 선교사들이 초등학교와 병원을 설립해서 전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진주 옥봉교회에서 호주 선교부가 건축한 배돈(Paton)병원이 지역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지 생생히 보았다.

배돈병원은 1910년 진주를 방문한 호주선교부의 배돈(Paton)목사와 장로 2명이 거열휴 선교사의 병원설립 필요성을 강하게 건의하자 1911년 호주에서 마 의사(Dr. Charles Mclaren)를 병원장으로 파송하여 건축된 병원인데 Paton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 배돈병원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이 병원은 진주지역 최초의 근대적 의료기관으로서 내과, 산부인과, 이비인후과, 치과, X선과 등이 있었다.

당시 자립, 자전, 자치라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구체적인 9가지 적용방법을 한국선교방법으로 정하였는데 그 아홉 번째가 『자비의 선교- 즉 기독교 사회사업, 의료선교는 환자와의 깊은 사귐을 통해서 전도를 할 수 있다』 였다.

이런 당시 교계상황에서 호주선교사들의 진주, 부산, 마산에서의 학교교육과 병원선교를 직접 눈으로 보며 경험한 이약신으로서는 고아와 과부,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섬길 기회가 왔을 때 지체하지 않고 부산에서 예도 제중원을, 마산에서 희망의집을 세워 복지의료목회를 병행했던 것이다.

1937년 이약신목사가 <기독신보>에 기고한 “봉사생활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설교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남은 존중하고 섬기는 모범을 보이시며 걸인과 창부에게 자비로서 대하였고 불구자와 멸시받는 인간들에게 사랑과 긍휼로서 같이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뭇사람의 즐거운 종이 되어 섬기셨으니 우리는 그와 같이 가난한 자를 섬기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셨다.

특히 이약신목사는 당시 대 부흥사들의 병고치는 이적과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복음주의 신앙의 정통성과 경건을 강조하면서 성령받은 사람은 마땅히 생활로서 봉사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여러 설교에서 강조했다.

그런 그의 목회관이 그의 의료, 복지목회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3) 호주 및 미국방문의 영향

이약신 목사는 세 번의 해외 출장 경험을 했다.

1918년도 일본유학(20세), 1937년 5월 호주장로교 100주년 기념집회 초청(39세), 1954년 7월 미국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의 초청(56세) 3번이었다. 그가 목사가 된 이후 방문한 호주와 미국에서의 공식일정 이후에는 그의 주관심사가 어린이 교육과 고아원, 병원 사역이었고 그 나라 복지시설과 의료시설을 참관, 견학하는 것이 주요 일정이었다.

호주에서는 그의 병원설립을 위해서 당시 거액인 1만원의 기금을 마련해 주어 부산에서 최초의 기독교병원인 '예도제중원‘을 설립했다.

미국에서는 공식일정 후 그동안 후원해 준 기관과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모금활동과 그들의 어린이 교육과 의료사역을 시찰하느라 귀국이 한참이나 미루어지기도 했다. 미국의 주 후원자였던 도우티 여사의 도움으로 이약신목사는 가는 곳마다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상황을 소개하며 그동안의 후원에 감사를 드리면서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호소하자 피아노, 차량등 엄청난 구호물품들(1만5천톤)이 모금되었다. 이런 구호활동으로 귀국은 계속 미루어져 이듬해 1955년 6월 21일 거의 1년여만에 도우티 여사와 함께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일찍이 호주와 미국선교사들을 통해서 교육과 의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이약신목사는 호주와 미국현지에서의 앞선 어린이 교육기관과 복지시설, 의료기관들을 참관하였고 귀국하면서 병원설립과 고아원사역을 더 열심히 추진할 수 있었다.

 

7. 결어

이약신목사는 1898. 4.25일 출생했으니 올해가 출생 121 주년이 되며 과로로 인한 급성간암으로 소천한지 62주년(1957. 1. 20)이 되는 해이다.

그는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반대와 피폐한 조국의 현실을 온 몸으로 부닥치며 은은한 별처럼 고신총회 설립시 교단과 희망원을 섬겼던 목회자이셨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하여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을 구체적으로 목회가운데 실천하면서 고신교단 형성시 제1, 2, 3대 총노회장과 6대 총회장을 역임한 명실상부한 영적 지도자이셨다.

무엇보다 그의 삶이 고고한 한 마리의 학처럼 아름다웠던 것은 그가 믿는 신앙을 그의 삶과 목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부산 최초의 기독교병원과 진해 최초의 고아원을 설립하신 탁월한 복지목회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고신교단은 개혁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앙, 개혁주의 생활을 표방해 왔다. 고신교단의 초창기 신앙적 뿌리로서의 개혁주의 신학은 박윤선, 개혁주의 신앙은 한상동목사였다. 그런데 개혁주의 생활을 대표하는 목회자는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그동안 우리가 무관심했거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약신목사는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의 대표 목회자로 조금도 손색함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력과 영성과 이웃사랑 실천의 복지목회에 있어서 이약신목사를 따를만한 목회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박윤선의 개혁주의 신학, 한상동의 개혁주의 신앙, 이약신의 개혁주의 생활로 자리매김 하는 것은 지금까지 미완성이었던 교단의 3대 뿌리(신학, 신앙, 생활)의 퍼즐을 완성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아울러 고신복지역사 포럼을 준비하면서 고신교단이 가진 많은 복지유산들을 확인했다. 고려신학교 초대총무였던 손양원목사의 순천애양원, 주남선목사의 딸 주경순 원장의 마산 애리원, 이약신목사의 희망의집, 조수옥전도사의 마산인애원, 한형세(부산 신망애양로원), 김옥성(고성 애육원), 지득용(소양보육원), 무엇보다도 지금은 부산의 대표 의료기관으로 성장한 복음병원을 설립한 전영창 선생 등이다.

그러나 안타까웠던 것은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지역사회에서 선조들의 복지정신을 잘 계승하여 크게 발전시켜 가는 시설과 기관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는 교단, 노회, 지역교회와의 오해와 갈등으로 그들 중 일부는 저항을 받고 배척을 받아 교단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탐욕으로 수많은 재산들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이사장 개인비리와 비정상적 운영으로 성경과 복지정신을 훼손. 지역사회에서 물의가 되어 지금은 타 종교로 넘어간 복지시설도 있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선조들을 통해 우리교단에 주신 빛나는 복지, 의료유산들을 잘 계승 발전 시켜 가야할 책임이 있다. 또한 새롭게 복지사업을 시작하는 사역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돌보았던 선배들처럼 탐욕과 영리주의를 배격하고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본 필자의 작은 바램은 이약신목사에 대한 이 작은 연구자료가 우리교단의 초창기 빛나는 복지목회자들에 대한 자료수집과 정리, 연구및 역사적 평가를 시작하는 작은 첫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고명길  hospice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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