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일으킨 사람은 이성계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조선을 창업한 공신은 삼봉 정도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정도전은 탁월한 기획가였고 사상가였다.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게 된 1392년부터 이성계의 아들, 냉철하지만 비정하고 야비한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던 1398년까지 6년 동안 그의 탁월함은 조선왕조 500여년간 지속되면서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기록은 이러하다고 전해온다. 이방원이 이숙번과 무장한 군사 10여명을 이끌고 정도전이 나라를 걱정하며 담소하던 남은의 집을 포위한다. 변고는 순식간에 일어나 함께 하던 몇몇이 목숨을 잃고 남은과 정도전은 몸을 피하지만 그리 멀리 갈 수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을 알게 된 정도전은 진정한 사대부답게 칼 대신 붓을 꺼내든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남긴다.

"조존(操存: 흐트러지는 마음을 붙잡는 일)과 성찰(省察) 두 가지에 공력을 다하여/ 책속 성현의 길 저버리지 않았노라"라는 말로 그의 마지막을 정돈했다. 짧은 시 한 수와 작은 칼 하나로 마지막을 준비한 것이다. 이방원의 칼이 바람을 일으키고 순간 위대한 한 사람의 일생은 막을 내린다. 흐트러지는 마음을 붙잡는 일과 성찰에 자신의 일생을 다 바쳤다고 말했던 정도전이 인생이라는 무대의 막을 참으로 아름답게 내리는 모습이었다.

삶은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라 누군가 말했다. 사는 연습이 아니라 아름답게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 삶이라는 말이다. 아름다운 죽음은 그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는 동안 준비되고 축적된 결과물이다. 인생의 마지막 화폭을 아름답게 채우고 싶다면 물감을 준비하고 캔버스를 사는 순간부터 흐트러짐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번에 그려지는 그림은 얼마나 값나가는 것이 될까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면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되어도 그것은 생명을 잃은 초라한 작품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감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조존과 성찰에 자신의 전부를 몰입한다면 아무리 단순한 그림 조각이어도 깊이가 묻어날 것이다.

어느새 2008년의 절반을 보내고 7월의 첫주를 맞이하며 그리스도인으로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왜일까? 나를 향해 어느 누구도 아직은 마지막 이야기를 할 순간이 아니라 해도 나는 벌써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 인생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조존과 성찰로 자신을 갈무리해야 한다.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진정한 향기가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마지막은 지금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결코 고결하게 채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이 사대부다웠던 정도전처럼 마지막이 그리스도인다운 사람이고 싶다.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다워야 하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다워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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