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서간집(전 4권)》을 중심으로

나삼진 목사

선교사 자녀로 한국에서 태어나 성장한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은 미국에서 대학과 신학교육을 마치고 다시 2대 선교사로 파송되어 같은 선교사 자녀와 결혼을 하고, 평생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하다 일본 경찰에 끌려나갔고, 만주에서의 본격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1942년 포로 교환 형식으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맥아더 장군의 여행허가서로 다시 입국, 부산에 거주하면서 평생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사역하며 신학교육과 고신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해방 후 가족들의 동반 입국에 금지되었던 때에 거의 매일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들이 엮여 지난해 《한부선 서간집》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옥중기, 인터뷰, 논설을 엮은 책까지 한부선의 저서는 모두 일곱 권이 출간, 선교사들의 전기나 기록 가운데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한부선 서간집은 특히 해방 후의 한국 정국과 교회와 교회 쇄신 운동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한국교회사적, 선교사적 가치가 크다. 이 소론은 《한부선 서간집(전4권)》을 통해 한부선의 해방 후 초기 선교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 한부선 선교사는 누구인가

한부선은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한국교회를 사랑한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 친구들과 함께 자라 한국어에 능통하였고, 한국 교회와 한국 문화를 소중하게 여겼다. 박응규는 한부선 평전을 쓰면서 ‘가장 한국적인 미국선교사’라 이름했다.1)

한부선은 한국교회 초기 1897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파송받아 사무엘 마펫과 함께 평양선교부를 개척하였고, 재령에서 많은 교회와 명신학교를 설립하여 ‘재령 선교의 아버지’라 불렸던 한위렴(William B. Hunt)의 아들로 1903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스스로 붙인 명예로운 호칭과 같이 ‘메이드 인 코리아 선교사’였다. 그가 평양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던 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미조리주 세인트루이스 솔단고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휘튼대학에 수학하던 중 안식년으로 귀국한 부모와 함께 지내기 위해 1923년 9월에 럿거스대학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앞줄 좌측 끝 한부선 선교사 1952년 고려신학교 교수일동 미 정통장로교 선교부 총무 갈부이트 목사 내한을 기념하며뒷줄 좌로부터 함일돈, 갈부이트, 오종덕, 한명동/ 앞줄 좌로부터 한부선, 박손혁, 이상근, 박윤선, 장석인, 한상동 <코닷 자료실>

그는 1924년 9월에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5월에 졸업하였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2년간 캐나다와 미국에서 목회를 경험한 후 1928년 미국 북장로교 뉴부룬스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아 청주에서 사역하였다. 프린스톤신학교의 신구학파의 신학적 갈등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설립되면서 1936년 미국 장로교 총회(이후 OPC로 변경)가 창립될 때 미국 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창립멤버로 참여, 이듬해 독립선교부 선교사로 파송받아 만주 하얼빈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이후 만주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이끌면서 1940년 1월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언약문서를 작성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이론적 체계를 잡았다.2) 이 문서에 25개 교회에 속한 800여 명이 서명하면서, 이듬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일시 석방, 다시 투옥되었다가, 1942년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미국에서도 설교와 기고로 한국과 한국교회를 위해 활동하였다. 그의 옥중기는 《증거가 되리라(For a Testimony)》로 출간되었다가, 2014년 새로 번역, 그의 수인번호를 따서 《21 언약의 노래》로 재출간되었다.

한부선은 고려신학교 개교 직후 1946년 10월에 입국하여 교수로 가르치면서 평생 부산경남지방에서 선교했다. 그는 정년을 3년이나 넘기며 가르치면서 선교하다가 1976년 5월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출국 전에 부산직할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았고, 고신총회는 5월 17일 범교단적인 환송예배를 열어 그의 선교사역을 기렸다.3) 그는 1979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 50주년을 맞아 박윤선과 함께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50주년 행사에서 선교 공로패를, 198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총회에서 선교공로를 기리는 시간이 있었고, 1984년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 뉴욕전도대회에서 사무엘 마펫, 언더우드 4세와 함께 한국선교 공로상을 받았다. 그의 선교사역은 고신교회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에서 폭넓게 인정된 것이다.4) 한부선은 이후 필라델피아 근교 쿼리발양로원에서 생활하다가 1992년 7월 26일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2. 한부선과 신학교육

한부선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미군들과 함께 입국하기를 기대하며 1943년부터 입국을 준비했지만, 비자를 받지 못해 연기되었다. 그는 해방 후 다른 선교사들보다는 비교적 일찍 1946년 10월 2일 시애틀에서 출항하여 일본을 거쳐 10월 28일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한부선은 입국 다음날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 군목 베졸트의 집에서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의 방문을 받고 협력하기로 하였다(46. 10. 31). 베졸트는 고려신학교 개교식과 제1회 졸업식 때에 축사를 하였는데, 고려신학교 소식을 미국정통장로교회에 알렸던 인물이다. 한부선은 그날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상동이 자신이 만주에서 한 것과 같이 경상남도 지역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감옥에 5년 동안 있었으며, ‘새 교회를 출범시키기를 원하지 않고 옛 교회를 정화하기를 원하며, 그들은 칼빈주의 신학교가 이 일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다’고 기록했다(46. 10. 31).

 

1) 고려신학교 교수 사역

한상동을 만난 한부선은 10월 31일 부산에 내려와 11월 3일 박윤선을 만났고, 그로부터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가르치도록 요청받고, 1946년 11월 5일 경건회에서 첫 설교를 하면서 고려신학교에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한부선은 고려신학교 교수로서 헬라어, 교회사, 호세아서(47. 3. 17). 영어, 출애굽기, 에베소서, 교회정치, 설교학, 영어 회화 등 다양한 과목을 맡아 가르쳤다(47. 4. 2등). 그의 서신에는 자주 ‘오늘 다섯 시간을 가르쳤다’고 기록한다. 그는 하루 종일 가르치고, 밤늦은 시간까지 수업 준비를 하였다. 신학자로, 교수로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교수로서의 부족함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다(47. 6. 2).

해방 후 한국교회에서 신학교 설립의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그는 고려신학교가 ‘더 많은 사람(교수)을 얻고 더 굳건하게 신학교를 세울수록 다른 사람들이 신학교를 시작할 이유가 적어진다’(47. 3. 27)고 생각한다. 한부선은 ‘아직 손이 모자란 상태에서 신학교가 강력한 교수진을 원하고 있고, 그것으로 고신의 역량을 입증해야할 입장’(47. 4. 1)이라, ‘교수진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47. 5. 13), ‘강력한 교수진의 부족 때문에 학교가 사분오열될 수도 있음을 우려’하기도 한다(47. 6. 2).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은 설립 당시 만주에 체재하고 있던 박형룡을 교장으로 내정하고 그의 귀환을 위해 한부선에게도 요청하기도 했다(46. 12. 13). 고려신학교는 보유한 145,000엔 재정 전부를 지출하여 송상석을 파송해(47. 5. 20), 박형룡을 귀환케 하여 교장 취임식과 박윤선, 한부선의 교수 취임식을 가졌다(47. 10. 14). 그러나 한부선은 박형룡이 귀국해서도 고신에 올지 말지 흔들렸던 것이나(47. 10. 2), 서울에 신학교 설립을 하기로 하는 것(48. 5. 1), 그리고 그가 서울로 떠난 것을 개혁운동의 후퇴로 보고, 슬프게 만든다고 했다(48. 5. 28).

한부선이 고려신학교에서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봉사한 것은 당시 총회직영 신학교이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에 경도되어 있던 조선신학교에 대항해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고 바른 지도자 양성으로 한국교회를 개혁하려 한 노력 때문이었다.

 

2) 고려신학교 행정 지원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신학교로 결의하면서 그 시급성 때문에 한상동과 주남선 등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은 ‘사람없이 인물없이 건물없이’ 개교하였다. 고려신학교는 개교를 준비하는 신학강좌는 진해에서, 개교는 호주선교부가 운영하던 일신여학교에서 있었고, 1년 동안 초량교회 유치원과 광복동 교사로 전전하면서 ‘보따리 신학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부선은 고려신학교 개교 초기 학교의 운영과 다양한 행정적 필요를 위해 신학교 설립자들과 운영 문제를 자주 협의했다. 그는 아내에게 신학교가 그에게 ‘확실히 달을 따오라고 요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47. 5. 13)라고 기록할 정도로, 한부선에게 많은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묵묵히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다.

고려신학교의 운영과 행정을 위한 한부선의 역할은 다양했다. 새로운 건물을 구하는 일에 협력하고(47. 2. 20, 3. 6, 4. 9), 호주선교부에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위한 건물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며(48. 3. 1), 전후 물자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배급에 의존할 때 신학교에 쌀 배급 문제를 위해 미 군정청에 협조를 구하고(47. 5. 16), 교수 사택 확보 문제(47. 10. 21)는 물론, 학교에서 쓸 천막 10개, 매트리스 140개를 구하기 위해 경남도청과 부산시청에 다녀야 했다(48. 3. 5). 또 윌슨 군목의 도움으로 군 담요 열 꾸러미(50매)와 텐트 5개를 구하며(48. 3. 9), 딘 장군에게 학교의 기숙사에 필요한 물품들과 인쇄용지를 요청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고(48. 3. 1), DDT 작업과 구충제를 구해 학생들의 위생문제를 해결하고 있다(47. 9. 25), 교회를 봉사하는 학생들에게 구제품 공급(47. 10. 24), 기숙사 학생들의 영양문제, 고학하는 학생들의 취업 주선, 심지어 기차로 부산에 늦게 도착한 학생들이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도록 파출소에서 손도장을 받아 안전하게 학교로 들어가게 하기도 했다(48. 3. 15).

 

3) 고려신학교 재정에 기여

한부선은 고려신학교의 초기 열악했던 재정에도 기여했다. 그는 주중에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주말에는 각지의 교회를 방문해 설교하며 전도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교회에서 받은 설교 사례와 여비를 신학교에 헌금했다(47. 1. 16). 그가 집회를 하면 참여한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금을 신학교에 입금하였고(47. 4. 14), 교수로 봉사한 후 6개월 만에 학교 담당자로부터 ‘여러 교회가 나를 통해 준 기부금 장부’를 제공받았을 때, 그가 28,000엔을 헌금했는데, 공식적인 환율로 1달러가 59엔이었던 당시에 560달러를 입금하였다(47. 6. 11). 1947년에 인도하였던 4개의 집회에서 받았던 8,500엔(약 150달러)도 학교에 헌금하였는데(47. 9. 3), 이는 세 달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는 영도교회 집회 후 받은 사례 5,000엔을 학교에 헌금하면서 ‘이런 정도의 기부금을 세 번 받았고, 이를 다 신학교에 입금했다’고 적고 있다(48. 1. 5). 대구 집회에서 두 성도가 준 개인적인 용돈 800엔까지도 신학교에 입금하였다(48. 4. 14).

또한 많은 이들이 헌금을 보내줌에 따라, 그는 고려신학교를 위해 별도의 구좌를 만들도록 선교부 총무 마스텐에게 요청하고(47. 4. 24), 학생들이나 지역의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한국 구제를 위한 펀드를 조성해 필요한 학생들이나 사람들을 지원하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4) 고려신학교의 국제교류와 도서 확충

고려신학교는 개교 초기부터 미국정통장로교회에 널리 알려진 학교였다. 고려신학교가 메이첸이 중심이 되어 프린스톤신학교에서 분립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성격이 유사했고, 그 학교 출신들이 교수로 일하면서 깊은 신앙적, 신학적 유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부선은 자주 Presbyterian Guardian에 한국교회의 동향을 기고했는데, 고려신학교 제1회 졸업식 후 사진과 함께 상세하게 미국교회에 소개되었다.5) 그는 같은 신앙을 가진 미국선교사들이 고려신학교에 합류하도록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입국부터 지원하였는데, 독립선교부나 성경장로회 선교부 소속의 마두원과 최의손이 입국할 수 있도록 외무부에 편지를 쓰고(47. 10. 26), 입국 후에는 정착할 수 있도록 집을 구해주었다(47. 10. 8). 그의 노력으로 평양신학교 변증학교수였던 함일돈(Floyd E. Hamilton: 1890-1969)이 고려신학교 교수로 합류하였다.

한부선은 고려신학교의 도서 확보를 위해서도 많이 노력했다. 고려신학교 설립 초기의 신학교육은 교수의 강의와 경건훈련이 중심이었지만, 그는 신학교 도서를 마련하는 일에도 많은 수고를 했다. 그는 1946년 첫 학기를 마친 연말에 도서목록을 작성해 아내에게 보내면서 아버지 헌트, 그리고 선교부 총무 마스덴에게 제공하도록 하였고, 이를 취합하여 이듬해 3월에 시작되는 새 학기 전에 책을 받을 수 있도록 부탁하고(46. 12. 20), 또 도서 구입 기금을 설치했다(47. 4. 2). 그는 달라스신학교 사서에게 책을 부탁하기도 하고(47. 5. 16), 1947년 성탄절에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국제성경백과사전 세트를 선물로 보내왔으며(47. 12. 28), 미국에 있는 여러 친구들이 보내온 책에 직인을 찍어 신학교 도서로 정리하였다(48. 4. 5).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선교사들이 철수하면서 서울문리대 도서관에 맡겨 보관중이던 주한선교사였던 삼촌의 도서를 정리해 옮기기도 하였다(47. 8. 7). 이같은 그의 노력으로 고려신학교에 도서가 모여졌고, 1956년 송도 교사 조성 후에 본격적인 도서관 규모를 갖추었다.

 

5) 신학생들의 멘토 역할

한부선은 신학생들의 상황을 상세히 알고 상담한 학생들의 좋은 멘토였다. 그는 학생들의 개인적인 배경을 잘 파악하였는데, 명신홍이 시무하던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를 방문하면서 그 교회 출신의 두 학생(오병세와 박복달)이 있음을 언급하거나, 경주교회 설립자 윤봉기의 자녀들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할 정도로 학생들과 친숙한 관계를 유지했다. 학생들이 자주 찾아와 대화하느라 강의 준비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47. 3. 19). 그는 학생들의 취업을 돕기도 하고(47. 9. 9), 유학을 꿈꾸는 학생들을 상담하거나 추천서를 보내며(48. 1. 3), 고려신학교에서 봉급을 받으면 유학생들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48. 3. 13).

 

3. 한부선의 전도 사역

한부선은 신학자보다는 복음 전파에 열정을 가진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유창한 한국어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전도 사역은 다양한데, 지역교회를 방문하여 설교를 할 때는 늦게까지 축호전도나 노방전도를 했고(48. 6. 20), 어린이 집회를 인도하며(48. 1. 5), 미군부대에서도 자주 설교를 했다(48. 3. 5). 또 소외된 사람들을 자주 찾았는데 소년원이나 감옥을 찾고(47. 11. 10), 교도소 직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으며(47. 12. 28), 매춘부를 대상으로 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48. 3. 4).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전도의 대상이었다.

한부선은 입국 후 첫해(1947년) 부활절에 네 번이나 설교를 했는데 두 번은 새로운 설교를 했으며(47. 4. 7), 청도 전도집회에서는 하루에 일곱 번 설교를 하기도 했다(48. 1. 17). 그의 열정적인 전도로 입국한 첫 1년 동안 379번의 설교를 했고, 설교를 듣고 결신한 사람이 400-500명 정도가 되었다(47. 11. 1). 그는 한국인들을 복음을 갈망하는 영적인 상태로 보았다. 이를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하여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 시작하면 굶주린 청중들이 떼로 몰려들며, 사람들이 거저 밀려들기 때문에 소리칠 필요도 없고, 전도할 방법은 다양하며 나팔을 불 필요도 없다’라고 했다(47. 9. 20). 그는 신학교에서의 많은 강의와 행정 때문에 직접적인 전도할 기회를 많이 자주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자주 나타내곤 했다(47. 9. 9).

한부선의 전도사역은 자연스레 성경 보급으로도 연결되었다. 그는 전도와 양육의 일환으로 많은 성경을 공급하였는데, 신학생들과 YFC에 주려고 군대의 성경책을 기증받아 배부하거나(47. 11. 10), 또 값을 받고 1948년 3월과 4월 두 달에 걸쳐 851권과 쪽 복음 220권을 포함하여 1,070권을 공급하였다(48. 5. 8). 그는 서울에서 108,500엔 치의 12박스 분량의 성경을 가지고 와 15%의 할인을 받으면 학생 한 명을 도울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전도사역이 성경 보급과 학생들을 위한 장학사업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한부선은 지치지 않는 열정적인 전도자였다. 홍반식의 회고처럼 ‘영혼을 사랑하는 선교사’였다.6) 홍반식이 미국 유학을 떠나기까지 3년간 목회하였던 대신동교회는 한부선과 신학생들이 함께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였다. 당시 언더우드 3세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과 미국 유학을 마친 목사들이 다수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었고, 한부선도 정부의 교육부나 내무부 고문으로 일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47. 10. 21), 그는 언제나 선교사로서 본질적인 사역에 충실했다.

 

4. 한부선과 학생신앙운동(SFC)

미군정 당시 부산에 미국 6사단과 71사단 등이 주둔하고 있었는데(48. 5. 31), 한부선이 군인들의 전도에 앞장서면서 매주 월요일 중앙교회에서 YFC를 이끌었다.7) 당시 한국YFC는 미국 YFC나 국제 YFC와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을 가져온 것이었다(47. 7. 1). 이 모임에 미군들과 영어를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참여했는데, 그가 다른 지방에 갈 경우가 아니면 매주 YFC에 참석하거나 설교를 했다.

그 모임에 그와 군목들이 자주 설교했고, 한상동과 이약신도 설교에 참여한 바 있다. 부산 YFC는 매주 90명에서 110여 명이 모이기도 했다(48. 1. 19). 부산YFC와 함께 1948년에 주일 오후에 신학교에서 박윤선이 인도하는 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이 있었는데, 한부선도 참여하였다(48. 7. 11). 서울YFC는 300여 명의 참석자 가운데 절반이 한국인이었고(47. 10. 24), 그도 여러 차례 설교를 하였다. 대구YFC는 보통 2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는데(47. 3. 22), 한부선은 대구YFC 특별집회를 인도하기도 했다(47. 5. 21). 당시 YFC는 전국적인 조직을 구상할 정도로 발전했다.

부산YFC는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이 감축되면서 참석자 수가 줄었고, 한국의 고등학생들 중심으로 자리 잡기를 바랐다(48. 6. 14). 그는 여름에 고등학생들을 위한 수양회를 추진할 계획을 가졌다(48. 2. 15). 이 구상이 한명동과 함께 협력하여 1948년 8월 2일부터 7일까지 고려신학교 주최 제1회 청소년수양회로 나타났는데, 이 수양회는 제4회까지 고려신학교 주최 청소년 수양회로 모였고, 1952년 7월에 모인 제6회 수양회에서 전국학생신앙운동 창립총회를 가졌다.8) 오늘날 SFC수양회는 이 전통을 잇고 있다.

한부선과 한명동의 이러한 노력은 출옥성도들의 회개운동과 교회쇄신운동이 다음세대에게로 확산되는 기회가 되었고, 수양회에서 고려신학교 교수진들의 설교와 강의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대거 신학교에 지원하는 효과도 얻었다. SFC는 한부선이 강조한 것과 같이 한국에서 형성, 발전된 ‘순수 국산’ 기독교 학생운동이었다. 이러한 학생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득권에 집착하여 개혁운동이 부진하였던 교계와는 달리 학생들이 교회쇄신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이끌었다. 한부선은 또한 학생들에게 전도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고 그들과 함께 전도운동을 전개했는데, 1949년과 1950년 두 차례 부산전역에서 전개했던 대전도운동의 중심에 한부선이 있었다.9)

 

5. 한부선과 구제사역과 복음병원

당시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새로 태어난 신생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미국 정통장로교회에서는 한부선의 선교보고를 통해 한국의 사정과 선교활동을 잘 알고 있어, 많은 교회와 친구들이 그의 선교사역을 위해 수시로 구제품 소포를 보내어 왔다. 우체국에는 그에게로 가는 소포로 가득할 정도였는데(47. 9. 2), 그는 아내에게 트럭에 소포가 가득히 왔음을 찍은 사진을 보내기도 했고(47. 10. 27), 구호물품 700꾸러미가 배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기록한다(48. 4. 29). 한부선은 그러한 구호품들을 고아원, 양로원, 소년원 등에 배부하였고(47. 10. 24), 성탄절에는 나환자촌을 방문하여 선물을 전달하기도 하기도 했다(47. 12. 28). 이러한 구호품은 신학교와 교회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군목 베졸트의 재봉틀을 구입해 출옥성도 조수옥이 운영하던 고아원에 주고 있다(47. 12. 4).

한부선은 자립, 지급, 자치를 근간으로 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신실한 신봉자였고,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 과도한 구제로 ‘쌀 기독교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미국정통장로교회는 고신교회와 협력하며 많은 재정을 투입하지 않았고, 각종 기관과 교회 운영은 주로 적은 금액의 개인적인 기부금으로 이루어졌다.10)

한부선이 선교사로서 많은 구호물자를 공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여, 스스로를 구두쇠라고 생각할 정도였다(47. 7. 8). 그는 주한미군이 선교사나 사회봉사기관 등에 600대의 지프차를 제공할 때도 관심을 갖지 않고 불편을 마다하지 않았는데(46. 12. 20), 하루 16km을 걷기도 하며(46. 11. 20), 주일 설교를 위해 40분을 걷기도 하고(47. 12. 31), 자주 친구 군목들의 도움도 받거나, 군대 트럭을 얻어 타기도 했다(47. 4. 12). 그는 외투의 소매가 낡고, 단추 구멍이 모두 헤어진 옷을 입고 다니는 검소함이 몸에 배여 있었지만, 구제품 관리에 있어 개인선물임을 표시한 것만 자신이 사용할 정도로 철저했다(48. 3. 17).

한부선은 구제사업 외에도 고려신학교와 복음병원의 건축에 기여하였다. 한국전쟁 후 의료시설이 많지 않았던 때에 장기려와 전영창과 한상동이 하나가 되어 1951년 6월 21일 복음진료소라는 무료병원을 개설했다. 이 진료소가 복음의원, 복음병원, 고신의료원으로 발전했고, 오늘의 고신대학 부속병원이 되었다. 한부선은 복음의원 초기에 로마카톨릭이 설치한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의약품이 지원되던 상황에서 미군의 의약품 지원을 이끌어 냄으로써,11) 복음병원이 자리 잡고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이 중심이 되어 공공건물, 학교, 고아원, 교회 등의 재건축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군사원조단(AFAK)을 운영하였는데,12) 1954년 한명동이 중심이 되어 고려신학교와 복음병원 부지를 확보했을 때, 그는 마두원과 최의손 등과 협력하여 미군 지원처로부터 학교와 병원 부지를 준비하면 건축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고려신학교 송도 캠퍼스와 복음병원을 조성하는 토목 공사와 건축에 기여하였다. 그는 전국교회 성도들과 함께 직접 몸으로 건축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미군 공병대와 공사를 협의하는 사진들을 남기고 있다. 한부선의 그러한 수고로 한국 선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 범교단적인 찬하를 받았고, 별도로 복음병원에서 1978년 개원 27주년 기념식에 그를 초청, 공로패를 수여했다.

 

6. 한부선의 설교 사역과 한국교회 쇄신운동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던 한부선은 해방 후 한국교회 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며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였다(47. 1. 7). 한부선은 신학교에서 지칠 정도로 가르쳤지만, 주말에는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하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설교 사역은 한국교회 쇄신운동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는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새벽까지 열 차례 설교를 하기도 하고(47. 4. 28), 추석을 맞은 주일에 초청받은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 어린이, 성인 성경공부, 주일예배, 오후 두 차례 노상에서의 설교, 밤에 어린이들을 위한 설교까지 하루 여덟 번의 설교를 하기도 했다(47. 9. 29). 한부선은 교회 단위의 집회만 아니라 도 연합 청년집회(46. 11. 12), 거창지방 32교회 청년 연합집회(47. 8. 25), 대구지역의 여전도회 집회(48. 3. 18) 등 연합집회를 인도했다(48. 3. 18). 그가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놀라운 부흥이 있었다(47. 8. 28). 이런 집회는 고신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힘썼는데, 고신지도자들이 지향하는 신앙과 경건, 그리고 교회개혁운동이 확산되고 뿌리내리게 했다. 이러한 집회를 두고 박윤선은 당시 고신에 대한 반대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집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회고한다.13) 한부선은 고려신학교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한국교회의 개혁과 미래를 논의하였고(47. 3. 8), 신학교의 미래를 위해 총회측을 대표한 김치선등과도 대화하고 있다(47. 8. 13). 이러한 논의는 한국교회 개혁운동의 전략과 방향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는데, 자신의 경건과 교회개혁운동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한부선은 주말마다 교회를 방문하고, 자주 전도집회를 가졌지만, 단회성의 집회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효과적인 개혁운동을 위해 조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고, 만주에서 작성했던 언약서 발간을 구상하였다. 그는 1947년 2월 7일 한상동의 집에서 박윤선, 한부선, 한명동 4인이 일곱 개 항에 걸친 ‘교회 회복을 위한 실천계획’을 작성하여 총회에 제출하였다.14)

한부선은 정통신학의 구현이나, 개혁운동의 결속을 위해 신문과 출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47. 3. 17), ‘한국의 미래를 위하는 사역에서 인쇄술과 참된 기독교 문헌 출판을 독려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는데, 이를 ‘거의 개척되지 않은 영역’이라 본다. 그는 박윤선과 함께 보수주의 신문이 한국교회의 생각을 결속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하고(46. 12. 20), 당시 어려웠던 용지 확보를 알아본다(46. 12, 23). 그는 잡지를 발행할 계획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재정에 관한 현실적인 조언도 하며(47. 4. 9), 고려신학교 교지를 ‘고려봉대’라고 이름을 제안하기도 했다(47. 1. 7). 그는 마스텐과 여러 차례 협의하고 지정되지 않은 헌금을 이를 위해 사용하였고(47. 4. 2), 종이를 구하기 위해 정부청사를 다니며(47. 4. 8), 신문인쇄 식자기의 가격을 알아보고 있다(47. 4. 24) 그는 신문 발행을 위해 중앙청을 방문하며(47. 5. 28), 용지를 구하고(47. 6. 20), 출판을 위한 ‘종이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47. 9. 9). 그는 박윤선 주석 간행을 위해 320달러치의 인쇄용지를 미국에서 직접 들여오다가(47. 12. 6) 운송 과정에서 용지 1/5을 잃기도 했다(48. 3. 13).

고신지도자들은 효과적인 개혁운동을 위해 이렇게 신문과 잡지를 구상해, 1948년 12월에 《파수꾼》 창간되었고, 1950년에 네 차례 《진리운동》을 발간했으며, 박윤선의 《성경주석》이 발간되었다. 이런 출판 사역은 고신의 교회개혁운동의 나팔수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 당시 루터의 3대문서 발행과도 유사한 성격이었다.15)

 

맺는 말

해방 후 한부선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은 한국교회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초기 선교활동을 요약하며 이 소론을 맺고자 한다. 첫째, 한부선의 해방 후 초기 선교사역은 고려신학교 정초와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고려신학교 교수 사역과 함께, 신학교의 운영과 물자 조달, 국제교류와 도서 확보에 힘썼으며, 학생들의 멘토로, 고려신학교와 복음병원 캠퍼스 마련에 쉬지 않고 일했고, 그 열매는 풍성하였다.

둘째, 한부선은 뛰어난 한국어 실력으로 전도하는 일에 힘썼다. 그는 해방 후 입국한 후 1년 동안에만 379회 설교를 하고 400명 이상의 결신자를 얻었던 열정적인 전도자였다. 그는 신학교육의 분주한 상황에서도 설교와 복음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는데, SFC의 두 차례 대규모 전도운동의 실제적인 지도자였다.

셋째, 한부선은 입국 후 부산지역 주한미군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YFC를 이끌었고 이는 학생신앙운동(SFC)로 발전되었다. 1948년 한명동과 협력하여 고려신학교 주최 제1회 청소년 수양회를 개최하였다. 이 수양회가 제6회부터는 SFC의 이름으로 계속되었는데, SFC는 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된 학생운동이었지만, 그는 SFC의 설립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넷째, 한부선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신실한 신봉자로서 자립, 자급, 자치를 선교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는 비기독교인들이 그릇된 동기로 교회에 나오는 명목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의 유혹으로 교회를 떠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선교한 결과 그가 동역했던 고신교회를 두고 훗날 ‘아시아 본토인 여기에서 우리는 1만 6천 명의 세례교인을 가진 자전, 자치, 자립하는 교회를 보고 있으며’, ‘개혁주의 기준에 충실하며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를 계속하는 안정적인 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섯째, 한부선은 고신교회 지도자들과 한국교회 개혁운동에 힘썼으며 설교와 집회, 문서운동은 그러한 개혁운동을 효과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문서운동은 장로교회에서 소수파였던 고신교회의 교회개혁의 중요한 전략이었는데, 파수군과 진리운동, 그리고 박윤선 성경주석 발행으로 나타났고, 이는 한부선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가능했다.

여섯째, 한부선은 선교사로서 자신과 시간을 철저하게 관리한 성실한 선교사였다. 그는 매일 해야 할 일을 15가지, 20가지를 적어 놓고, 일을 마칠 때마다 하나씩 줄을 긋곤 했다(48. 3. 11). 효율적인 시간관리와 지치지 않는 사역이 탁월한 열매를 맺게 한 것이었다.

한부선의 평생 선교사역에 대해 박윤선은 “교수로서 여러 방면에서 협력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언제나 진실주의를 몸소 실행으로 가르쳤다”고 말한다. 또 고려신학교 개교와 함께 5년 동안 한부선의 가르침을 받았던 이근삼도 한부선 탄생 100주년 기념강연회에서 ‘진실된 선교사. 훌륭한 신학교수, 진리와 정의의 사람’으로 치하하고 있다. 이렇게 한부선은 진실한 목사와 선교사로서 한국교회와 고신교회를 위해 평생 봉사하며 탁월한 성과를 얻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미국교회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로 파송하고 있는 이때, 한부선과 같은 신실한 선교사들이 많이 일어나 개혁주의 신앙 확립과 교회건설에 매진했으면 한다.

 

◆미주

1) 박용규,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한부선 평전》, 서울: 그리심, 2005.

2) Bruce Hunt, "Korean Covenanters", Presbyterian Guardian 1943년 1-2월호, 《브루스 헌트》, 서울: KIATS, 2014. 79-93.

3) 필자는 그와 네 가닥 만남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교회 사경회에서 한 주간 설교를 들었고, 1975년 고려신학대학 입학과 함께 영어성경을 배워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으며, 1976년 5월 17일 교단적인 환송예배에서 전국SFC를 대표하여 기념품을 증정하였고, 고신대신문 기자로서 출국 전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4) 박응규,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한부선 평전》, 470.

5) The Presbyterian Guardian 1947년 8월호. 나삼진, ‘나의 애장문헌 33’, 《기독교보》 2011. 9. 24.

6) 홍반식, “내가 만난 한부선 선교사” 《월간고신》 1986년 12월호. 31.

7) YFC운동은 1940년대 중반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일어난 모임이 발전하여, 1945년 미국 시카고에서 국제 YFC가 시작되었다. 전도자 빌리 그레함이 첫 풀타임 간사로 일했다. 오늘날 세계 65개국에 2,500 전임간사와 22,000 자원봉사자, 등록회원 12만 명 정도의 규모로 발전했다. Mark A. Dodrill, "Youth for Christ International", Evangelical Dictionary of Christian Education,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1, 739-740.

8) 이상규, 나삼진 외,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 학생신앙운동사》 , 서울: SFC, 2013. 42-51.

9) 《학생신앙운동 20년사》, 부산: 전국학생신앙운동, 1971. 18-22.

10) The Presbyterian Guardian, 1960년 3월호.; 한부선, 《브루스 헌트》, 208.

11) 《고신의료원 50년》, 부산: 고신의료원, 2001, 77-78.

12) Harry Rhodes,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vol II(1935-1959). Seoul: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The Department of Education, 1965. 323.

13) 박윤선과의 인터뷰, 《고신대신문》 111호(1986. 9. 16)

14) 박응규,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한부선 평전》, 354-355.

15) 이러한 관심은 한상동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1960년 고신측과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 과정에서 고려신학교가 16년 동안 발간해오던 《파수군》이 합동측 기관지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문서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네덜란드와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문서운동을 위한 모금에 관심을 가졌다. 심군식, 《세상 끝 날까지》, 서울: 소망사. 1977.

16) 한부선, 《브루스 헌트》, 서울: KIATS, 2014, 210.

17) 한부선, The Presbyterian Guardian, 1960년 3월호, 《브루스 헌트》, 208-220.

18) 박윤선, 《성경과 나의 생애》, 서울: 영음사, 2015. 91.

19) 이근삼, “한부선 선교사의 해방 이후의 사역”, 한부선 탄생 100주년 기념강연회 발제문,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교회》, 서울: 생명의 양식, 457-462.

 

◆참고문헌

《한부선 서간집 1(1946. 10. - 1947. 3)》, 서울: KIATS, 2018.

《한부선 서간집 2(1947. 4. - 1947. 8.)》, 서울: KIATS, 2018.

《한부선 서간집 3(1947. 9. - 1948. 1.)》, 서울: KIATS, 2018.

《한부선 서간집 4(1948. 2. - 1948. 7.)》, 서울: KIATS,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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