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가치 곧 십자가의 정신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다. 우리 기독인들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든 사회적이고 국가적 관계에서든 이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정신을 그야말로 완벽하다고 할 정도로 실천하신 분은 손양원 목사다. 그는 자기 아들을 둘이나 죽인 청년을 용서하고 그를 아들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자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공산주의를 진정으로 이겼다.

요즘은 악화된 한일관계로 나라가 온통 난리다. 해묵은 친일 반일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왜들 싸우는 일에 이렇게 열심들일까? 기독교인들마저 이 일로 갈라져서 서로 비난하고 있다. 참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된 것은 벌써 70년이 훨씬 넘었다. 그동안에 일본과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웃으로서 교류하고 도우며 지내왔다. 사과도 자주 받고 화해를 위한 협약들도 맺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삼 경제전쟁에다 양국 국민의 감정싸움으로까지 확전(擴戰)되고 있다.

사실, 문제는 일본에 있다. 그들이 우리를 침략하고 수탈하였다. 이번에도 정치적인 문제를 경제문제로 비화시키고 보복함으로써 우리나라와 경제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이 이렇게 나온 데는 문재인 정부가 어느 정도의 빌미를 제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젠 용서하고 살아야지 구원(舊苑)을 가지고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어떻게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정부가 국민들의 감정을 누그러지게 하기보다 앞장서서 선동하며, 심지어 여당에서는 일본 패망 운운하며 저주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어리석은 아이들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용서는 희생당한 사람이 희생하면서 하는 일이다. 회개하고 사과하는 쪽에서 피해자가 만족할 때까지 용서를 빌고 희생해야 한다면 그건 보복이지 용서가 아니다. 보통은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사과를 받는 사람들은 사과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게 무슨 사과냐?” “사과한다는 말은 하지만 진정성이 없다.”는 등으로 상대방의 사과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를 당한 쪽에서는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사과를 받아내려 한다면 이를 과연 용서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십자가의 용서는 “… 때문에”도 아니고 “만약 …한다면”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그것이다. 요즘 우리 정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려고 무진 노력을 하고 있는 상대는 북한이다. 우리 대통령을 우롱하고 협박함은 물론 국민들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짓밟는 북한에 대해서는 용케도 잘 참고 있다. 참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물론 우리 동포이고 혈육이기 때문에 일본과는 비교 대상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지만,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과연 정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일본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십자가의 길이 극일의 길이고 평화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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