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에게 계급장이 있을까? 천주교의 경우 신부들에게는 주교나 대주교 등의 직급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그런 게 없다. 신부와는 달리 목사는 초년생이라도 바로 담임목사가 될 수 있고, 경력이 많은 목사라도 부목사로 사역하거나 개척교회를 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직급이 없다. 그러니 계급장도 물론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게 전혀 없는 것일까?

“목사의 계급장은 교인수”라는 말이 있다. 성장주의를 빗댄 가벼운 농담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이게 가벼운 풍자가 아니다. 목사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현실이고 엄청난 스트레스다.

군에서는 계급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장교들은 진급문제로 항상 긴장해 있다. 특히 영관장교에서 장군으로 진급하게 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별을 딴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치열하고 영광스럽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인수”가 그런 역할을 한다. 교인수가 목사를 주눅 들게도 하고 영광스럽게도 한다. 목사는 어디서나 교인수로 평가를 받는다. “교인들이 얼마나 모입니까?”라는 질문은 “당신의 계급이 무엇입니까?”를 묻는 질문과 꼭 같이 돼버렸다.

나는 이런 “계급장”에 초연하려고 지금까지 자신과 정말 치열한 싸움을 해왔다. 교인수에 집착하지 않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일,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쉽지 않았다. 교회성장은 교회 안에서 이미 가장 큰 가치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초월하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

목회초기에는 매주일 교인 출석수를 주보에 게재했는데,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희비가 엇갈려서 게재하지 못하도록 했다. 사무실에서 예배일지를 쓸 때 출석수를 기록하되 나에게는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시에는 교인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은근히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궁금해져서 무심결에 “오늘 교인들이 얼마나 모였어요?”라고 묻곤 했다.

어느 핸지 모르겠는데, 교회가 거의 성장하지 않은 해도 있었다. 내가 이 사실을 교회에 알렸더니 어느 집사님이 대뜸 “목사님이 책임지셔야죠.”라고 말했다. 나는 그날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다시 한 번 교인수에 연연하지 않기로 더 굳게 결심하였다. 그 후 내가 교회분립을 주장한 것도 교회 크기에 의해 정해지는 목사의 계급장을 떼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난들 높은 계급장을 붙이고 싶지 않겠는가? 교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모아 교회 이름을 내고 덩달아 저도 유명해지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한국교회가 추락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성장주의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꼭 깨고 싶다.

젊은 목사님들 중에는 정말 목회다운 목회, 본질을 추구하는 목회를 해보자는 비전을 갖고 출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그 꿈은 목회현장에 나오자 말자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꿩 잡는 게 매”라는 교인들의 평가 앞에서 “그 고상한 비전”은 금세 풍비박산이 나고, 오직 교인수 불리기에 혈안이 된 진짜 매 같은 목사가 되고 만다. 목사들의 이런 타락에는 교인들의 책임도 상당부분 있다. 교인수가 불어나야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이 목사를 압박하고, 결국 목회를 세속적으로 흘러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정교회운동은 목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교회가 가진 본질적인 사명, 곧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에 충성하자는 운동이다. 그래서 가정교회를 시작한 교회들은 한결같이 이미 믿는 교인들의 등록은 받지 않는다. 이는 기성교인들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구원이라는 최고사명에 충성하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나는 본질에 충실한 교회를 세우고, 그런 목회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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