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호 목사(대구서교회 부목사)

오늘 코람데오닷컴에서 ‘낙태죄 폐지’ 한국교회의 대안은? 이라는 주제로 주최되는 제1회 이슈 인사이트 포럼에 다녀왔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다. 헌법불합치란 하위법의 내용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사실상의 위헌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게 되면 관련법이 개정될 때까지 법적 효력을 인정해주는 헌법재판소의 변형 결정 중 하나이다. 이 결정이 있고 난 이후 정해진 시간까지 해당되는 하위법을 개정해야 한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의 결정이 되었다는 것은 곧 낙태로 인한 죄가 더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코람데오닷컴에서는 금일(9월 30일)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예배실에서 4명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이 문제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시대 풍조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 속에서 약자 중의 약자라고 할 수 있는 태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포럼에 참석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하나님 없이 자유를 누리는 자들의 끝은 ‘교만’과 ‘방종’이라는 점이다. 첫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자유를 추구하려고 할 때 그들은 타락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같아지려고 하는 욕망이 그들에게 있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 때, 하나님과 같아질 것(창 3:5)이라고 유혹했던 뱀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 무엇인가? 선악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삶.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 되어 생명의 주관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 이제는 악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하지 못하도록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통해 막고자 하셨다(창3:24).

하나님 없이 자유를 추구하는 욕망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 문제에 대하여 놀랄만한 통찰을 제공해 준 사람이 있는데, 네덜란드의 기독교 철학자이며 법 사상가인 헤르만도 예베르트(1984-1977) 이다. 그는 서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크게 4가지 종교적 동인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먼저는 그리스의 형상-질료 동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이라는 성경적 동인, 자연과 은총이라는 중세 스콜라적 동인, 자연과 자유라는 현대 인본주의적 동인이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과 자유’라는 인본주의적 동인이다. 그의 사상을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과 자유라는 현대 인본주의적 동인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음을 알게 된다. 자연과 자유의 동인으로 말미암아 근대와 현대의 문명이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자연이라는 동인은 과학의 발전을, 자유라는 동인은 인간에 대한 권리의 무한한 발전을 이루어왔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문제는 ‘자유’ 동인이다. 자유 동인은 인간이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무한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재적 신념이다. 헤르만 도예베르트는 헌신을 요구하는 모든 신앙으로부터의 ‘자유’와 인간의 인격 그 자체가 법이 되는 것, 곧 ‘자율성’이 또 다른 종교가 되어 인간을 지배한다고 본다. 이 시대는 이러한 ‘자유’의 동인에 근거하여 하나님 없는 인간 중심의 종교, 인간 자율성의 종교를 주장한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떠난 인간이 자신의 존귀함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판단기준은 ‘인간’이 되어버렸다. 인간에게 무한한 가치와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사조가 맹위를 떨치면서 기존에 있었던 ‘진리’, ‘가치’, ‘공동체’와 같은 개념은 와해되어 버렸고, 인간 개인이 진리의 주체로서 활동하게 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 결정체가 ‘낙태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약자로 스스로를 정의 내리면서 ‘자기결정권’이라는 ‘자유’를 극대화시키는 여성들의 주장이 이들보다 더욱 약자라고 할 수 있는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더 고귀한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자기결정권’이라는 ‘자율성’이, 생명 중시라는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실천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있다. 포럼에 참석해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을 때, 과연 ‘태아’는 ‘인간’으로서, ‘생명’으로서, ‘인격’으로서 존중을 받지 못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 ‘태아’는 마땅히 한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고, 그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교만’과 ‘방종’으로 말미암아, 천하보다 귀하다고 여기는 한 생명을 하나의 물질 혹은 대상화시켜서 임산부의 입맛대로 생명을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 것이 심히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여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사용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타락한 인간의 절정의 모습이다. 그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낙태가 죄가 아니라고 하는 주장과 결정은 곧 생명경시 풍토를 형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방종으로 인하여 더욱 많은 생명이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의료폐기물’이 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물론 현행법이 부득이한 경우에는 낙태를 예외적으로 혀용하고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확대하여 낙태는 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또 다른 영역의 문제이다.

보건사회 연구원에서는 2018년도에 공식적으로 낙태는 한 해에 5만 건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산부인과 의사회에서는 하루 3천여 건의 낙태수술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연간 100만 건이 된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1년에 100만 명의 생명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산율의 하락으로 인해 온 나라가 걱정하고 있는 판국에, 한쪽에서는 100만 명이나 되는 생명이 사라지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인간의 교만과 방종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돌아와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자기결정권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빼앗아 가는 일방적인 폭력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교회가 깨어 외쳐야 할 것이다. 성경의 말씀의 본래의 맥락과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만약 사람들이 침묵한다고 한다면 돌들이라도 소리를 지르게 하여(눅19:40) 이 일을 공론화시켜 생명보다 더 존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태아의 뛰는 심장이 멈추어 핏빛으로 변할 때, 우리의 양심의 심장은 멈추어 검은빛으로 굳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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