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발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수술 후 치료 부위가 병균에 감염됐다. 이 때문에 항생제를 복용했는데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 결국 인근 병원의 집중치료실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이 과정의 상당 부분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필자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보다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경험을 통해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낸다는 야고보의 통찰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2005년은 ‘고난의 해’로 기억될 것이다. 아시아의 쓰나미, 걸프 해안의 허리케인, 파키스탄의 지진 등 큰 재난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허다한 수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자연 재해를 통해 우리는 고난이 엄연히 현존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고난 회피’의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고난은 인간 생존의 현실이다.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산상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는 것이 대속적 고난의 핵심이지만 대속의 사건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자기 피로 모든 죄를 속량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죽음뿐 아니라 십자가의 삶도 경험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체를 입고 우리 인간들 가운데 계실 때 고난 당하는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 가난하고 병든 자들, 의지할 데 없는 자들과 함께 하셨다.

이것이 당신과 내가 만나는 곳이다. 교회가 가장 교회다울 때는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할 때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방법이다(빌 3:10).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앉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 줄 아는 것, 이게 전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예수의 제자로 사는 핵심에는 가까울 것이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주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다.

사랑의 실천에서 우리는 예리한 반문화적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고난을 피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만인의 유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고난을 껴안아야 한다. 고난은 바로 앞에 있는 현실이다. 아직 고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제 경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첫번째 과제는 주변에 누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영성은 언제나 구체적인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고난 당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런 다음 그 사람과 함께하라. 그냥 그렇게 계속 나아가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출발일 뿐이다. 종착지는 아니다. 우리의 활동 영역은 확장돼야 한다.

그러므로 두번째 과제는 활동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단기 선교 여행을 경험해보고 아우슈비츠를 방문해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를 읽어보라. 도시 빈민과 노숙인들을 만나라. 이 두번째 과제를 시행할 때 당신의 활동 영역은 확장되고 다음 단계로 인도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인도하실 것으로 확신한다. 빛을 따라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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