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6장26절은 성령이 오시면 하시는 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성령이 임하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생명이 임하면 모든 굳은 것을 부드럽게 만든다. 기독교를 변화의 종교라고 한다. 그럼 무엇을 변화시키는가? 굳는 것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변화의 핵심이다.

생명이 함께 하면 굳은 얼굴도 부드러운 얼굴이 된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의 첫 금메달은 유도의 최민호 선수에게서 나왔다. 예선부터 결승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기를 한판승으로 이겼다. 절반, 유효, 밀어내기 등의 지루한 경기가 아니라 모두 통쾌한 한판승으로 승리했다. 감격스런 승리였기에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줄 만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리 자주 보여주지 않았다.

왜? 최민호 선수가 금메달을 딴 이후에 지나치게 울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울어도 지나치게 울었다. 이유가 있었다. 실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없었던지 국제대회에서 만년 3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탔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설움과 한이 맺힌 울음이었다.

그러나 너무 굳어 있었다. 반면에 은메달을 딴 오스트리아의 파이셔 선수는 지고서도 밝은 미소로 악수를 청했다. 최민호 선수의 등을 감싸주고, 관중이 보는데서 손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그 장면만 보면, 누가 승자인지 패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장면이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파이셔의 모습에 감동했다. 파이셔를 향해 멋지고 잘생긴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는 '간지남'이라고 불렀다. 세계 4대 훈남 가운데 하나라고 하고, "최민호 금메달에 감동 먹고 파이셔 매너에 감동 먹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밝은 사람이 좋다. 여유는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생명은 굳은 목소리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꾸기도 한다. 자매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애교의 문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자매가 말했다. "누구나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애교가 저절로 나오는 것 아니야" 모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관심없는 사람 앞에서는 남자 목소리가 나온다. "뭐해, 뭘봐, 밥먹어"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나온다. "뭐해요. 뭘봐용. 내가 쌈싸 줄까요?" 사랑하고, 생명이 들어가면 모든 굳어진 것이 부드러워진다.

다윗 생애의 절정기는 골리앗을 물리친 승리가 있었던 때가 아니다. 범죄 이후 하나님 앞에 완전 자복하는 기도를 드릴 때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부드러운 마음을 기뻐하신 것이다. 우리 마음에는 어둠이 있다. 어둠을 토해 내는가? 어떤 사람을 보면, 몇 십년 묵은 어둠이 있다. 그 어둠을 품고 사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굳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굳어 있다. 성령의 은혜로 부드러움을 추구해야 한다.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굳어 있다. 잘못된 것이다. 부족한 주장을 한다. 그런데 부드럽다. 오히려 소망이 있다. 남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기에 결국에는 더 옳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부드러움이 힘이다. 부드러움이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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