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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현인, 賢人)으로서 나사렛 예수(II)역사적 예수 연구 시리즈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III. 예수 교육의 일반적 원리

1. 인격적 가르침

예수는 제자들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예수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고 친구로 대했다.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3-15). 누가복음에는 요한이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운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눅 13:23). 사도 요한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울 만큼 예수에 대하여 친근히 느꼈던 것이다. 그는 “사랑하시는 자”라는 별명을 가졌다.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그후에 7세기 후(610년)에 있었던 무함마드의 예언이 무슬림을 알라의 종이나 노예라고 한 것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서는 인간을 알라에게 나아가게 하는 중보자는 없다. 무함마드는 메시지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만 구원자일 뿐이다. 그리하여 알라와 인간을 매개하는 어떤 중보자도 없다. 성례전이나 성화나 종교음악도 매개하지 못한다. 알라는 초절적(transzendent) 존재이다. 알라의 개념에는 그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자녀라는 표상이 없다. 그리고 이슬람에는 알라의 사랑에 대한 표상이 없다. 알라의 뜻에 대한 복종(Islam)만이 있다: “기독교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보는 것과 달리 알라와 인간의 관계는 종이나 노예의 관계로, 각 사람은 자신을 알라와 그의 뜻에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존재”이다.

2. 인내를 가지고 가르침

예수는 인내를 가지고 그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여기에는 사랑이 동반된다. 강압적이지 않고 독단적인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제자들의 양식과 양심에 호소하셨고, 강제적으로 독단적으로 동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예수는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에서는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다.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다음같이 배척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2-3). 이러한 고향 사람들의 배척하는 마음을 보시고 저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시고(막 6:6) 예수는 다음같이 말씀하신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막 6:4). 예수는 능력을 가졌으나 기적의 힘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막 6:5).

예수는 부활 후에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나 자신의 모습을 처음에는 드러내시지 않으시고 저들과 동행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부활 사건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에게 인내를 가지고 설명하신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그리고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부활 사건을 믿지 않자 저들에게 나타나시어 인내를 가지고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설명해주신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 38-39). 예수는 두려워하며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단지 자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실 뿐 아니라 그에 관한 구약 성경의 예언을 풀어주신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 44-45).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 46-48). 예수는 자신의 부활 사건이 단지 우연한 기적의 사건이 아니라 구약 예언자들이 약속한 하나님의 구속 약속의 성취인 것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셨다. 이 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인내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애가 구약 메시아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이다.

3. 스스로 결정 유도

예수는 제자들 각자가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예수는 제자들의 입법자가 되려고 하지 아니하셨다. 제자들 스스로가 주어진 각 상황 속에서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통찰력과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예수는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인 대답보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 10:25-37)를 들려줌으로써 질문자가 스스로 해답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그런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질문한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6). 율법사는 대답한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이웃이란 각자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만나는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보는 자라고 교훈하신다.

4. 삶의 모범

예수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예수는 가르치신대로 사셨다. 예수는 친히 허리를 동이고 수건을 들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예수는 손수 모범을 보여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15). 예수는 교행일치(敎行一致)의 삶을 사시고, 진정한 스승의 도가 무엇인가를 모든 선생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다.

예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처리에 대하여 예수는 율법을 존중하시면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b)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현장에서 물러갔다. 예수와 여인만 남게되었는데 예수는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는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돌려 보내신다. 이는 율법의 정죄보다 인간의 회개와 새 사람됨을 원하는 예수의 모범이었다.

예수는 고난의 종으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고 제비를 뽑는 무리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였다. 예수는 이 세상을 끝낼 때까지 죄인을 돌아서게 하는 하나님의 용서를 실천하였다. 함께 처형되는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간구한다. 이에 예수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라고 새 삶의 소망으로 위로를 주셨다. 예수는 이 세상을 떠나면 낙원에 갈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 월라스(Jon W. Wallace, 미국 아주사퍼시픽대, Azusa Pacific University 총장)는 2014년 5월 장로회신학대학교가 개최한 제15회 국제학술대회에서 ‘나사렛 예수로부터 배우는 리더십 교훈: 기독교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예수의 리더십을 종이심, 목자이심, 교사·멘토·제자 삼으심, 그리고 구원자와 화해자이심 등 4가지로 정리, 분석했다. 첫째, ‘종이신 예수’는 “오늘날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용어는 리더십 연구 분야에서 공통적이고 보편적으로 인정된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예수는 그 자신의 선교와 목회를 기술하기 위해 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종으로서의 예수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요한복음 13장에 등장하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이다. 둘째, ‘목자이신 예수’는 “교회의 부르심을 실행하는 예수의 목회 모델은 목자 모델”이다: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두루 전달되는, 구약의 양 치는 이야기는 목자의 핵심적이고 주요한 역할을 확증하고 다시 확인시킨다.” “예수 목회의 대상에는 사회로부터 권리가 박탈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는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장 무거운 책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목자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목자가 그 삶을 버리는 것처럼, 크리스천 리더들은 그들이 돌보는 사람들을 위해 삶을 버릴 준비가 되어야만 한다.” “어렵고 위험한 시기에 그리스도 중심적인 목자는 자리를 지키며 사람들을 보호하지, 절대 달아나지 않는다. 그리고 목자는 양을 안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가.” 셋째, ‘교사·멘토·제자 삼으시는 예수’는 “그의 삶과 목회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 사람들은 “죄, 은혜의 효과, 용서의 본질, 기도하는 방법, 하늘에서의 삶 등에 관해 배운다.” “‘교사’ ‘가르치다’ 또는 ‘가르침’ ‘랍비’ 등의 단어들은 마가복음에서 39번 등장하고, 모두 예수에게 적용된다.” 넷째, ‘구원자와 화해자이신 예수’는 “하나님이 그 분의 거대한 구원 계획의 일부로써 나의 리더십(종, 목자, 교사)을 사용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신자가 매일 만나는 매 상황과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온전한 순종을 통해 리더십 돌봄과 책임감의 범위를 조절하게 하는 기회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규칙과 다스림을 인정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걷는 곳,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왈라서가 언급하는 바같이 “예수의 삶과 목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순종, 개발, 성숙을 위한 모델이다. 리더십의 기초적인 표현들로써 그분의 섬김, 목자 됨, 가르침의 예는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존 윌라스, “예수가 보여준 4가지 리더십: 종·목자·교사·구원자,” 김진영 기자 jykim@chtoday.co.kr 입력 : 2014.05.13 16:17 장신대 제15회 국제학술대회서 강연).

IV. 선생(rabbi) 이상의 존재: 권위 있는 존재

예수는 선생 이상(以上)의 존재였다. 예수는 회당에서 가르쳤으나 서기관들이나 당시의 랍비들과는 달랐다. 마태는 다음같이 전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마태는 예수의 가르침이 영적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마가도 가버나움에서 예수가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예수에게 있는 선생 이상의 권위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2). 그리고 예수는 단지 가르칠 뿐 아니라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나오게 하는 것을 보면서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앞서 말한 바같이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비교할 수 없는 독특성과 영적 권세가 동반한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하나의 위대한 선생으로만 보고자 한다. 또는 그를 단지 윤리적 스승으로만 보고자 한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선생이며 윤리적인 규범을 보여주신 위대한 스승이다. 19세기 독일의 신학자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는 예수를 신적 의식에 충만한 인간, 리츨(A. Ritschl)은 직업의식에 충만한 사람, 헤르만(W. Hermann)도 예수를 종교의식이 충만한 인간, 프랑스의 소설가 르낭(E. Renan)은 달콤한 휴머니스트라고 평가했다. 1980년대 미국의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도 예수를 그 시대의 주변적인 현인(賢人)으로 본다. 로버트 펑크(Robert W. Funk)는 “떠돌이 현인”(vagabond sage)으로,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는 “소작농 유대 견유학자”로,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전복적 지혜자”로 본다. 예수에게 이런 점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를 단지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는 스승 이상의 존재이다. 우리는 역사적 예수 안에 있는 그의 영원한 신성을 향하여 우리의 눈길을 돌려야 한다. 신앙만이 역사적 예수를 그의 영적 원천으로 인도하여 그의 신성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 다 준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 즉 신적 존재가 우리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다. 마리아의 아들인 역사적 인간 예수 자신은 그의 존재적 원천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골고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끝)

 

 

김영한  yunghankim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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