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 전 1차적 시정 지도의 필요성에 대하여

   
▲ 총회 유사기독교 연구소장
한장연 이단상담소장
한기총 이대위 전문위원
행 18:24-28절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아볼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학문이 많고(로기고스: 유창한, 학식 있는, 박식한) 성경에 능한 사람이었다. 주의 도를 일찍부터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비록 주 예수께 대한 사실들을 열정을 가지고 자세히 가르치긴 했지만,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 뿐 그리스도에 대한 더 충만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다. 즉 그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교육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수준에서 계속하여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순수한 마음과 복음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그의 복음 이해 혹은 신학적 교리적 이해는 결여되어 있었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접근한다면 그의 가르침은 불건전한 것으로 규정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때 자비로우신 주 하나님께서는 신학 지식이 결여되어 있던 ‘아볼로를 세워 줄 크리스천들’을 예비하고 계셨는데, 그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다. 비록 아볼로 자신은 자기가 주 예수께 대하여 ‘자세히’ (아크리보스: 정확하게, 신중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가르쳤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보기에는 아볼로에게는 아직도 결여되어 있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태도를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아볼로의 신학적 지식의 결핍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녔던가? 그들은 아볼로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세워주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아볼로의 메시지 전파가 끝났을 때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에 대하여 ‘더 자세히’(아크리베스테론: 더욱 정확하게) 풀어주었다(26절). 이 구절에서 ‘풀어 이르더라’는 말은 ‘엑티테이미’라는 용어로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설명하다”(to expound)이다. 그러면 아굴라 부부는 무엇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도’(테인 호돈 투 데우) 전반에 걸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학교도 없었을 시기에 바울로부터 교육받았던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들, 즉 기독교 교리 전반에 관한 사실들을 설명했을 것이다.

아볼로는 소위 신학적 지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복음을 미흡하게 전했던 사람’이다. 그의 기독교 지식(신학, 교리)은 갱신되어져야만 했다. 그대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결코 온전치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었다. 소위 불건전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처럼 신학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의 결과’로 인해 요한의 세례만 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아굴라 부부가 세워주었던 것이다. 성경의 전후 문맥을 통하여 우리는 아볼로가 아굴라 부부의 ‘(시정) 지도’ 혹은 ‘신학지식의 갱신’을 기꺼이 수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의 미흡한 지식을 수정하고 갱신했던 사역자였기 때문에 그는 그 공동체로부터 인정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추천 가운데 다음 사역지를 향하여 순례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더 능력있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세움 받은 아볼로는 능력있게 사역했으므로, 바울 사도는 그에 대하여 고전 3:6절에서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라고까지 했다.  

이단․사이비 혹은 불건전 사상 전파자들에 대하여 조사하고 연구해오면서 때로는 규정 작업에 참여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필자는 종종 고민해 오던 문제가 바로 아볼로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문제였다. 적어도 필자가 파악하기로는 우리 주변에 신학적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야말로 아볼로 같은 순박한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다 보니 때로는 정통교회가 납득할 수 없는 불건전한 사상을 전하는 이들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비단 목회자들 가운데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종종 나타나는 문제이다. ‘이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불건전 사상을 전하는 자들에게’ 한국교회는 가능하면 ‘1차적인 시정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들을 바로 잡아주고 세워주려는 1차적인 노력도 없이 규정해버리기만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세워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그러한 이들을 어떤 절차를 밟아 시정 지도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우선적으로 각 교단들을 비롯하여 교파와 교단들의 연합체인 공정성 있고 대표성 있는 기관들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이단대책위원회들이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가장 적합한 방법은 불건전 사상을 전하고 있는 인사가 소속된 그 교단 총회에서 당사자를 지도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과업이 은혜롭게 진행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종종 어떤 교단들은 교단 내 인사를 보호하려고 하다 보니 실제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지도해주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해결해가는 경우들도 있음을 보아왔다. 교단들은 교단별로 노력해 가야 할 것이며, 한기총과 한장총과 같은 대표성을 지닌 기관들도 초교파 초교단적으로 불건전 사상 전파자들을 조사 연구하고 그 결과를 해당 교단으로 보내어 ‘시정 지도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적어도 해당 교단으로 하여금 소속 인사에 대한 ‘최소한 1차적인 시정 기회’를 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필자는 그러한 이들을 향하여 시정을 요구하는 최소한의 ‘1차적 기회’를 주어야 할 이유를 사역 중에 경험하게 되었다. 몇 해 전 필자가 속한 교단에서 타 교단의 모 인사의 사상을 규정한 적이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충분한 규정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필자는 그 때 필자가 속한 교단이 내린 그 규정은 옳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당시 그 교단에 속한 모 인사가 반론을 제기해 온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왜 자신의 교단 인사를 규정함에 있어서 최소한 그 교단에게 알리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적어도 한 차례라도 알려주었다면 자신의 교단에서 지도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난제들을 극복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1차적인 시정의 기회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역사적 교회(historical church)의 가르침에 반하는 ‘불건전 사상’을 계속하여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1차 시정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불건전 사상을 시행하는 이들은 언젠가는 다시 제보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평신도들과 목회자들이 항상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정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그릇된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인사의 사상은 각 교파나 교단들이 조사하고 연구하여 판단한 적정 수준에서 마땅히 규정되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는 재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발생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 교단으로 해당 교단 인사의 불건전 사상 시행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이 정치적으로 무마해버린 경우이다. 교단적으로는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 인사는 그 이후로도 계속하여 그 교단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을 전하고 있음이 간파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연합기관 이단대책위원회(한기총과 한장총)에서 직접 개입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교단간의 우호관계를 초월하여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과업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적어도 필자가 고찰한 바로는, 한기총과 한장총 정관과 정신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교파나 교단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평신도들과 목회자들이 고충을 당하기 때문에 1차 시정 요구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정하지 않는 이들에 대해서는 규정이 내려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단 규정문제에 있어서 교단이나 연합기관 차원에서 대체적으로 잘 대처해 왔다고 본다. 이러한 한국교회가 이제는 ‘그것이 이단이라고까지는 하지 못할 신학적 훈련 결여로 인해 발생된 불건전 사상’이라면 적어도 그들에게 ‘1차적인 시정 기회’를 줌으로써 세울 자들은 세워주고, 시정하지 않는 자는 규정해가는 성숙함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들 가운데 정말 소수라고 하더라도 혹시 있을 수도 있는 아볼로와 같은 형제를 세워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아볼로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매서운 비판과 정죄와 규정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세워줌’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의 이 글은 아볼로와 같은 입장에 있을 수 있는 이들을 위한 형제애적인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지, 결코 ‘이단적 사상을 전하는 이들’에 대하여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자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Soli Deo Gloria!
2008년 9월 7일 이단경계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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