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적 복음주의자보다는 고백적 복음주의자가 되자'는 것이 젊은이 사역을 하면서부터 갖게 된 생각이다. 교리적인 신앙인의 생활에서 보이는 메마름과 건조함보다는 고백적 신앙인의 뜨거움과 풍성함이 좋았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의 신앙궤적을 볼 수 있는 지금, 교리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신앙에도 일종의 마지노선이 있다. 교리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때로 뜨거움의 부족이 보일 수 있으나, 결정적인 때에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유년시절부터 몸에 밴 성경 교리는 우리의 영혼을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영적 방어벽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제정한 '이단경계주간'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단과 사이비 척결을 위해 교인들의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이단의 공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일깨우기 위해 9월의 첫 주간을 이단경계주간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가 이단들로 인한 폐해로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적어도 1년의 1주간이라도 이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철저히 복음의 옷깃을 여미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를 한 단계 올려놓은 가장 중요한 계기를 찾는다면, 주후 325년의 니케아공의회를 들 수 있다. 초대 교회 이래로 수많은 이단들이 날뛰었는데, 니케아공의회에서 삼위일체를 교리화하고,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영구불변의 교리로 확정함으로써 이단들을 잠재우고 더 이상 발호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확고한 교리 위에 서지 못한 신앙은 세상의 풍파나 풍조가 몰려오면 변색되거나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모래 위의 집과 같다. 이것이 우리가 말씀의 뼈대인 교리를 다시 붙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 내에 이단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간과해버리는 경향과 함께 교리를 가볍게 여기는 이상한 풍조가 생겨나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개인의 자유와 관용을 진리처럼 숭배하는 분위기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럴지 모른다. "교리는 구식이고 현대에 부적절하다.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성품이요 태도다"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적인 실천이 중요하지 교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이러한 '교리 없는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약의 서신서들을 보면 예외없이 교리와 믿음의 토대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 실천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올바로 믿지 못하면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교리 없는 기독교는 인본주의적인 생각과 세속의 편의주의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며, 결국은 기독교를 어렵게 하고, 무너지게 만드는 마귀의 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한국 교회가 여기에 많이 걸려 넘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메마른 교리, 율법적인 껍질만 남은 교리, 정통신앙이라는 허울만 뒤집어 쓴 채 죽어있는 교리는 이단만큼이나 해롭다"며 화석화된 교리의 답답함을 지적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을 통해서 영적 균형을 찾을 필요가 있다. 교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교리의 혈관에 뜨거운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이다.

2000여년 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단의 꾐을 경고했던 바울의 탄식에 귀를 열어야 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한국 교회가 이 시대를 감당하는 첫단추는 성경 말씀과 복음의 진리 위에 한치도 흐트러짐 없이 서서 세상의 꾀는 소리를 분별하고 이단의 행패를 제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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