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성 선교사, KPM 소속 선교사로 A국 무슬림 민족을 대상으로 십오년간 사역 중

선교지에서 정신없이 선교하다 안식년으로 한국 들어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생각보다 우파 좌파 이야기가 어느 채팅방이든 도배를 한다. 내가 워낙 효율을 중요시하는 실용파라서 그런지 정치 얘기... 그닥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듯하다. 이방나라에서 십 몇 년간 살면서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탓일까? 이제야 귀에 조금씩 뭔가 소리가 들리고 머리에 남기 시작했다. 특히 우파니 좌파니 이런 말들로 더욱 혼돈스러웠다. 그래서 이에 대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대해 고민해 본 것을 정리해 보았다.(칼럼 소제목: 후원 끊길 각오로 쓴 정치 이야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개혁 또는 개혁주의란 용어도 참 많이 언급되지만 개인마다 이해도가 다른 것처럼, 우파 좌파라는 용어도 그런 것 같다. 종종 채팅방에서 서로 논쟁을 하는 것을 보는데, 서로 알고 있는 우파와 좌파의 주장과 실체가 다른 것 같다. 현재 통용되는 개념으로는 보수를 우파라고, 진보를 좌파라고 하는데, 누가 왜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 것일까? 알아보니, 원래 프랑스혁명 시기에 왕을 사형하자는 의견을 주장했던 과격 개혁파(진보)가 좌측에, 반대했던 온건파(보수)가 우측에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이렇게 사용된다던데...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인식되고 있는 보편적인 개념은 나름 이렇게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상적으로 우파라고 불리는 보수파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인데, 특히 (평등보다는) 자유의 개념을 더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개인의 자유를 위해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자는 쪽으로 흘러간다. 특히 경제 발전이나 성장에 더 큰 관심과 중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좌파라 불리는 진보파는 경제를 운영함에 있어서 사회주의제도를 반영, 도입하는 주장이 대표적인 것이며, 자유를 전제로 하되 평등의 개념을 더 강조하게 되는 경향이 보인다. 특히 발전도 중요하지만 더욱 관심가질 문제는 부의 분배에 있다고 봄으로, 기존 자본주의에서 타나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여러 제안들, 특히 사회 약자들에 관심을 갖는 제안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심 영역이 다르니, 모이는 사람도 다르고, 그러다보니 각자의 주장, 아니 과도한 비난으로 더 많은 이들을 자기들이 마련한 정치판으로 서로 끌어오려 안간힘을 다 쓴다. 다소 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우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따르는 소위 건국 애국을 외치는 기존 기득권 정치인들이, 좌익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현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정치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느 편에 서 있는 것으로 비춰지는가? 기독교육 통제와 탄압, 동성연애 등에 대한 잘못된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기도 한 일은 한국교회가 좌익을 반대하는 우익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성경적 이유가 아니라 다른 이유 즉, 한국 정치와 좋은 공생 관계(?)를 유지함으로 나름의 혜택을 누려온 어떤 기독교 세력들이 이런 문제를 기회삼아 자신의 이권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기에 노골적으로 우익에 서서 선동하는 경우도 있다. 최소한 뉴스를 통해 세상의 눈에는 더더욱 그렇게 보인다. 비록 어떤 문제에 대한 입장이 같을 지라도 사실 동기와 방법과 뜻과 목적이 다른데도, 오늘날 다수의 한국교회가 극우 편에 서있는 것으로, 그래서 원래의 바른 진의(眞意)가 전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된 사회적 시선이 가증되는 면이 있음이 안타깝다.

나는 그런데 우익과 좌익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규정함으로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서야 하는가에 대해 지금 이 글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걸 말하기 시작하면 또 다른 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바쁜 일상 중에 내 많은 시간을 여기에 투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이것은 집단 사상이기에 같은 단체 안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주장과 극단적인 사례들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런 걸로 전체를 규정하고 비난하는 장면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논리 오류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얌전하던 분도 이런 패러다임에 한번 빠지면 건강한 소통이 아니라 황당한 일방적 주장을 하는 걸 종종 보게 된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스톱 또는 턴을 유도하면, 애국심이 없다는 말로 대화의 뒤끝마저 꼬아버린다. 본질 규정 논쟁만큼 의미 없고 지치고, 특히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려운 논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제는 정도를 지나쳐서 갈등이 첨예하게 되어버려,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를, 성도와 성도 사이를, 목회자 안에서 분열을 쉽게 초래하는 주제가 되어 버렸다. 특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고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목회자들 역시 이 문제만큼은 양 극단에 서 있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보며, 무언가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특히 건강한 소통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들이 더더욱 안타까웠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성경적 입장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 논쟁이 갈등이 아니라 논쟁할수록 발전과 성숙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에 중점을 맞춰 머리 아픈 이 글을 빨리 결론짓고 싶다.

첫째, 우선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패러다임(정치적 꼼수)에서 벗어나야 한다. 용어부터 우익과 좌익이라는 애매모호하며 정치적 성향이 더 강한 용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보수와 진보라는 명쾌한 용어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용어는 우익 측에서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좌익(=빨갱이)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는 데 이용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과 갈등 구조를 더 심화시키는 것 같다. 또한 우익 좌익이란 용어는 구분이 너무나 명백한데, 사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람마다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이 있는 것이지, 어느 한편으로만 말하기 쉽지 않다. 어떤 일에 있어서는 보수적 성향이 어떤 일에서 진보적 성향이 종종 나타난다. 그래서 대부분 진보와 보수는 성향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지, 흑백논리로 잘라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는 우익/좌익이라는 선입견을 조장함으로 편 가르기로 인해 발생하는 불필요한 감정싸움이나 논점을 흩트리는 대화를 지양하면 좋겠다. 쉽게 말하면 보수 성향, 진보 성향 이 정도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둘째, 보수와 진보에 대해 어느 것이 옳은가를 총체적으로 따지지 말고, 각 이슈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논쟁이 시작되면 종종 원 출발점을 쉽게 벗어나 총체적인 영역으로 쉽게 전이되어 전반적인 분쟁이 시작될 때가 많다. 진보가 맞나 보수가 맞는지를 논하지 말고, 어떤 각 이슈에 대해서만 성경적 입장을 논하면 좋겠다. 정부가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이 정책이 성경적으로 어떠하다고 말하자는 것이다. 정치적 영역, 경제의 운영 방식, 사회 변화라는 영역과 그 영역 안에서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 그 모든 주제들에 대해 기존 가치관과 체제의 유지냐 아니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가에 대한 성경적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스템 강화에 대해서는 진보적 입장을, 그러나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한 “과한 인정”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적 입장을 택해야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보수든 진보든 모든 주장이 성경적으로 다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극단에 빠져서 있지 않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소위 보수가 정권을 잡아도, 진보가 정권을 잡아도 문제는 계속 발생한다. 심지어는 기독교 정당이 정권을 잡아도 결코 문제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그리고 교회는 모든 정권과 사회 속에서 자신의 선지자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정치적 논리에 따라 한쪽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책이나 주장이 나올 때마다 성격적 가치관으로 장단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누군가가 성경적인 입장에서 올바른 소리를 할 때에도 감히 옳다고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이를 우리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건강한 소통 방법을 배우는 기회로 삼자. 또한 개인적으로 자신을 성숙시키는 은혜의 계기로 삼자. 다양함은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주신 축복의 통로이다. 하지만 그 다양함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공동체는 갈등하고 신음한다. 그리스도로 연합된 한 몸이지만, 서로 다른 부분을 인정하고 나눔으로 서로 성장할 수 있다. 건강한 소통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차이나 선교사들도 각 지역 상황들이 서로 다른데 자기 지역 상황이 모든 차이나 사역을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면 쉽게 분열이 일어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이 거짓이 아니라 다른 것뿐이고, 그리고 강조하는 점이 다를 수 있다. 특히 내가 이미 내려놓은 결론에 상대가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는 단 한마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설령 결론이 맞더라도 미성숙한 소통이 오히려 관계만 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건강한 소통을 하려면 “우리”가 강해야 한다. 서로를 통해 배우려는 자세가, 그리고 다른 결론에 이를지라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웃을 수 있는 “우리됨”이 필요하다.

나도 종종 이런 일에 실패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많이 고민한다. 거친 표현을 삼가고, 용어 선택도 가려서 해야 한다. 상대의 견해를 공격하는 데 집중하지 말고, 자신의 입장을 온유와 겸손으로 나누는 데 집중하면 좋겠다. 특히 자신의 주장이나 상대방을 단정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황이 종종 자신의 성숙함을 테스트하는 시험 무대가 되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은 갈등 상황에서 평소 포장했던 자신의 모습이 여감없이 드러난다. 그래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말씀 안에서 인격과 공동체성이 어떠한 지 가늠해 보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말싸움에서 지면 자존심 짓밟히는 것이기에 져서는 안 된다. 이런 본능(?)으로, 우리는 이기기 위한 논쟁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참된 논쟁 방법을 모른 채, 우기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다. 좀 과하게 말한 이유는, 이렇게 경계해야 좀 더 겸손해 져서 상대방의 의견을 보다 더 존중할 것 같아서이다. 건강한 소통을 통해 객관화함으로 진정한 실력을 키울 수 있고, 결과 지향적 논쟁에 빠지더라도 이런 “겸손”과 “존중”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격적) 여유”라는 숨표를 대화 중간 중간에 찍을 수 있을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신 그분의 뜻을 더욱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긴 대화 끝에도 여전히 말이 안 통하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그래도 성경적 가르침에 명명백백한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면, 개인적 신앙 판단으로 존중해야 한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이 다르기도 하다. 때론 사회적 입지가 다르기에 와 닿는 부분이 다를 수 있다. 때론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 역할은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는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지 정죄하는 역할이 아니다. 그 비난이 오히려 자신을 심판대에 올려놓게 될 것이다.

이에 덧붙이자면, 오늘날 정치에 대하여 개인적인 바람은 이렇다. 만일 진보 여당이 하는 일들마다 트집 잡아서, 하는 모든 것을 무조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보수 야당이라면 나는 절대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보수 야당의 과거 잘못이나 부족했던 점들을 지적하며 자신들만이 모두 옳다고 말하는 독선적 진보 여당이라면 이 역시 절대로 지지할 수 없다. 둘 다 상당히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서로 건강한 소통을 통해서 배우면 좋겠다. 그래야 정치(판)를 위한 정치에서 국가를 위한 “대의 정치”가 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그런 성숙한 문화를 주도해 가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양극화 되어 싸우고 있는 정치판을 부끄럽게 하고, 국민을 하나 되게 하는 참 애국하는 일이 건강한 소통을 통해 실현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운 기대감이 있다.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해야 한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먼저 회개하는 심령이 일어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이 불리해 지고 있음을 불평하고 분개하기 전에, 그 이상으로 아파하며 먼저 회개해야 한다. 우리 안에 성경적 복음을 회복하지 못했음을, 지금도 이런 정치적 이념 갈등 앞에 복음이 무기력하여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현실을, 사회 속에서 바른 길라잡이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정치인들이 교회를 통해 세상을 감동시키는 법을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음을, 사회적 약자들이 그래도 교회에만큼은 살아갈 소망이 있다고 고백하지 못함을 교회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푸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프랑스 혁명에서 정치에서 기독교 영향력을 제하려 했던 혁명정부가 반기독교적이었기에 이러한 진보세력을 모두 “흑(黑)”으로 단정짓고 기독교는 마땅히 보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에, 그들이 목숨걸고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가 왕실과 결탁한 기독교의 타락은 아니었는지, 타락한 기독교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해방하는 것이 불가사의하게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닌 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타깝지만 명확한 사실은, 성경은 이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갈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 정권의 본질 자체가 그럴 수밖에 없다. 믿음의 싸움을 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정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게 답답하다고 교회가 정권을 좌우하려하거나 더 나아가 정권을 잡으려는 것이 오히려 교회됨을 상실했던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특히 오늘날 사회 속에서 한국교회는 이미 배부른 부자와 같이 취급을 받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 놓여 있다. 그러기에 더더욱 정권을 좌우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 실현, 복음의 능력으로 사회가 변화되기 위해 교회됨을 먼저 회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기라고 본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교회가 아니라, 털수록 감동이 나오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정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회복과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 회복이 더 시급한 과제이다. 복음이 정치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데, 그 반대로 정치적 이념 다툼이 강단을 흐리게 하고 성도들의 분열을 초래하는 작금의 상황이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세상이 교회를 우습게 본다고 분개하기 전에 우리 안에 복음으로 복음되지 못하게 했던 죄를 회개하고 나가는 것이, 이방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죄를 깨닫게 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심판 앞에 겸손하면 그가 높이시고, 세상이 다시 복음으로 새롭게 된 하나님의 교회를 주목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정치가 교회를 탄압할 때 세상이 덩달아 가세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교회에서 살 소망을 경험한 사회적 약자들이 교회를 크게 위로하고 탄원해 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모든 성도들이 말씀으로 돌아가 회복된 복음으로 이념 다툼을 종결하고, 두 진영을 그리스도 앞에서 온전히 하나되게 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복음은 분명하다. 보수가 말하는 “자본 중심의 무한경쟁을 유도함으로 다수의 국민들이 노동의 노예의 덫에 빠지게 되는 자유민주주의”나, 진보가 말하는 “타락할 수밖에 없는 국가 권력이 막대한 권력을 쥐고 평등 시스템을 운영함으로 자유가 유린되고, 국가 경쟁력이 도태될 수 있는 사회자본주의”,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꿈이 결코 될 수 없다. 어느 게 더 나은가를 논할 시간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면 좋겠다. 인류 역사 속에서 어떤 정치 경제적 시스템 속에서도 하나님의 꿈은 계속 이어져 왔고, 당신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실현해 오고 계신다. 오늘도 우리를 흥분케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살 소망을 주는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뜻을 이루는 현장 이야기가 살아나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고아와 과부와 같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소망을 얻고 새 삶을 살아가며, 땅 끝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복음으로 섬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하늘나라 잔치로 지구촌 곳곳을 흥분시켰으면 좋겠다. 오직 이 꿈을 위해서 주님의 새계명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이 식어가는 이 세대 가운데, 먼저 사랑을 회복하고, 생명을 희생하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온전히 이루면 좋겠다. 그래서 보주주의자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진보주의자들이 잠잠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정치가(政治家)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나라”를 교회가 그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

<글 마무리 후에 다시 덧붙임>

아직 말 못한 성경적 관점의 정치이슈 분별

읽는 분들은 아쉬울 것 같다. 나도 내 생각을 속 시원히 다 밝히고 싶다. 특히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수와 진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각 이슈들에 대한 성경적 입장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이다. 이것은 또 다른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략적인 방향성이 나름 정리된 듯하다. 추후에 다룰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하지만 선교사가 이런 주제로 문제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이 여러모로 좋지 않기에 더 이상의 논의를 하고 싶지는 않다. 개별적인 자리에서 나눌 수 있다면 배우는 마음으로 듣고 나누며 주님의 뜻을 구하고 싶다.

성경적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적 입장을 택해야 하는 구체적인 이슈들이 뭐가 있을지? 한국에 떠나 있어서 그냥 귀동냥으로 들으며 생각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참고로 적어본다.

  • ○교회가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는가?
  • ○공교육이 강화되고 사립학교를 통한 교육을 줄여가는 방향은?
  • ○기독사립유치원을 포함하여) 사립유치원을 국가가 개입하여 통제하려는 문제
  • ○(동성애자)들의 인권 문제와 관련 법 제정
  • ○최저시급 시행을 통한 사회의 변화는 성경적인 기준에서 긍정적인가?
  • ○국민 개인 소득에 따른 세금 변화와 기업 분담 방향
  • ○부의 재분배와 부자의 세습 인정 문제에 대한 관점
  • ○코로나 사태에 교회 모임을 규제하는 정부의 정책은 어떠한가?
  • ○북한에 대한 우리의 자세 변화: 철책선의 변화 등은 바람직한 것인가?

그런데 이런 다양한 주제는 좋은 목회자들, 신학자들이 잘 제시해 주기도 해서 굳이 특별히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기회 닿는 대로 좋은 분들과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서로 배우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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