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 결과, 체제 변화 정쟁 프레임 신중해야...

Ⅰ. 서론

1. 들어가는 말

김영수 장로(부산YMCA 前이사/ FY 91/92 지방장)

4.15 총선은 지나갔다. 온갖 난무하던 말들이 쑥 들어가고 이상하리만큼 잠잠하다. 한 쪽은 마치 뚜렷한 지도자가 없는 사사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였더라.고 한 사사시대를 꼭 빼닮았다. 또 다른 한편은 열린우리당 시절 사분오열했던 뼈아픈 경험을 되새기면서 전례(precedent)를 밟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겸손해야 한다는 표정관리를 하는 가운데 동정을 살피고 있는 듯하다.

필자는 어느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선과 관련하여 눈치를 보지 않고 관전 포인트를 자유롭게 평론할 수 있다. 관전 소감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느낀 점에 불과하다. 4.15 총선에서 나타난 민의 이반 이유를 분석해 보려고 한다.

1) YMCA 운동과 정치에 대한 관심

필자는 4.50대 젊은 시절에 부산 YMCA의 중심에서 작은 역할을 담당했다. 부산 YMCA는 국가수반을 배출하였고, 국회의장, 국회의원, 주일대사 등을 배출했다. 명의들과 기업인, 저명한 학자, 교회 중직자들이 함께 했다. 한국동부지구는 IMF 직전까지 5,000 여명의 회원을 유지하였으며 대구, 마산 등지에서도 다수의 국회의원을 배출했었다.

필자는 BF 교육훈련 교재를 계발하였으며, 국제 본부가 제시한 클럽지도자 양성 매뉴얼 영문판을 지원을 받아 출간하여 조직가, 이론가로서 활동했다.

∘부산YMCA 직능이사(지방장),이사,실행이사(5인위원회),모금위원장, 청소년분과위원장

∘선거관리위원장,헌장개정위원장,회관건축위원,91/92회기지방장,한국동부지구인사위원

∘BF.TC.YMCA.LT위원장,지구법제위원,FY 96/97회기 한국동부지구 최우수 와이즈멘상 수상

여러 경험을 토대로 4.15 총선 관전포인터(on observation pointer)를 짚어보고자 한다. 동일한 사건, 사물에 대해서도 혹 편견이 있을 수는 있으며, 생각하고 보고 느낀 점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 다만 개인의 관점(viewpoint) 적 시각보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식론적 측면에서 일반개념(general concept)과 보편성(universality)을 중시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2) 한기총의 현실정치 참여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국이나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정치에는 반드시 정적이 있기 마련이다. 김영삼전 대통령은‘권력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적(political opponent)들 끼리는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항상 서로 다툰다. 여기에 교회의 성직자들이 뛰어 들어서 한쪽 편을 들게 되면, 그 한쪽이 자기 말을 대신 해줘서 속이 시원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역할은 교회를 담임하는 성직자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교회가 나섰을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정치는 전 국민과 모든 계층을 상대로 해야 하기 때문에, 전체 국민들의 마음을 담아내지 못하면,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번 4.15 총선에서 특히 한기총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일반 전체 국민들의 정서에는 부합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유는 민의의 뜻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직접 총선에 뛰어든다는 것은 전 국민이 바라보는 교회의 모습이 성스럽게 보인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여러 행위들은 민심이 이반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기독교가 극우 집단으로 비쳐진 상황에서, 모 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은 결과적으로 유익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거의 공정성 측면에서 교회는 침묵했어야 한다.

정교 분리 원칙은 정부나 권력자가 함부로 교회를 핍박해서도 안 되겠지만, 교회도 정교분리라는 이 원칙을 지키면서 정부를 비판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또는 범 교회적으로 침묵하는 가운데, 천주교회처럼 모 정당을 지지하는 모습이야말로 성숙한 자세로 볼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실제로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혜로운 방안이다.

Charity의 그리스어는 아가페이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를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랑의 우위(position) 상위개념 요소는“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자기들이 지지하고 사랑하고 있는 보수 정파에 대해서, 사랑의 가장 중요한 개념적 요소를 위반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추어 놓고서 자랑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오만이나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해 혹시라도 해가될까 봐 절대로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참고 또 참고, 끝까지 기다리고 견디면서 기도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는 이런 원리와 절차와 순리를 따르지 않았다. 효력이 발생할 수 있는 사랑의 핵심적 요소와 성분, 조건을 도외시 한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교회가 어느 정파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되면, 국민을 상대로 한, 특히 불신자와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복음전파 사역에는 결코 유익하지 못하다. 공정한 선거에서 교회공동체는 편견을 공식화하면 안 된다.

광화문 거리에서의 반정부 데모에서 막말 언행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 주요원인이다. 국가원수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막말을 하면 안 된다. 어떤 형태로서든지 주일날행사는 부적절하다. 서울 경기지역 표심을 분석해보면 필자의 어설픈 주장이 일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원리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3) 국가원수 대통령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골로새서 1:15~17에 비추어 보면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았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 세운 한 나라의 지도자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국민들은 대통령도 대개는 이름을 부른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노무현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분들이 공개석상에서 이름만 부른 것은 아니었다. 일부 극우들의 선동은 점수를 잃었다. 사람은 누구나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에 젖어 들면 자신도 모르고 동화(assimilation)해 버리는 심약(feeble)한 면이 있다. 절제된 용어 선택이나, 자중하는 모습이 있었다면 극우로 비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비친 교회의 모습은 긍정부정으로 나뉘었을 것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다른 한편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원인이 되었다. ‘교만하지 아니하며’의 계명을 위반한 것이다. ‘무례히 행치 말라.’는 계명을 위반한 것이다.

모든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이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국가원수에 대한 예의는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격자라고 한다면, 비록 반대파라고 하더라도 존중함으로써, 인격적으로는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개인 각자가 정치를 직업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참여와 의무 행위로서는 한 분의 후보를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너무 분명하게 천명하는 공개적인 지지 입장 표명은 신중해야 된다. 분명한 것은 교인 각자는 선택권이 자율적으로 주어져 있다. 교회를 대표하는 분들이 한편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면, 그러면 교인을 구분하게 된다. 성경적 입장에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침묵하지 않고, 어설픈 부채질은 속내만 내비친 것으로서,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물론 양면성은 있으나, 신앙공동체 교회가 한편만을 보고 일하거나, 말한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매우 경솔한 처신이었다.

4) 고매한 인품에는 품위 유지와 모양새가 매우 중요하다.

개인 각자가 정치를 직업으로 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선거 참여와 의무 행위로서는 한분의 후보를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너무 분명하게 천명하는 공개 입장 표명은 정말 신중해야 된다. 분명한 것은 교인 각자는 선택권이 자율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입장에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이번 총선에서 교회는 침묵하지 않았다. 어설픈 부채질을 하는 것은 속내만 내비친 모양새로서 그렇게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고 본다. 열광했다면, 극우일 가능성이 짙다.

교회를 대표하는 성직자들이 노골적으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과연 유익했는가의 물음에서, 선거 결과를 보았을 때, 일반 국민들에게는 좋지 않는 인상을 심어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예외 없이 반대나 지지의사 표명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성직자들이 품위를 손상시키는 언행과 막말은 내국인 동족을 상대로 한 복음전파 사역에는 유익하지 못한 것 같아 보인다.

한국정치사에서 꼭 얘기를 해야 할 시점에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한국천주교 성직자들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도 성직자들이 감옥에 갇혀서도 목소리를 내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개신교회가 손익계산이 빠르고, 정치적으로 지위가 높은 자들을 잘 안다는 식으로 명성을 이용하였으며, 명예에 대한 과시욕을 만족시키는 기회를 잘 포착하는 이기주의의 달인이었다. 과거 한국교회는 정부의 불법도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케 했었다.

한국천주교회는 강점기시절 독립운동사적으로 어떤 역할을 한 일이 별로 없다. 천주교회는 이런 점에 대해 공식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개신교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조상 제사문제에 대해 불분명하다. 로마교황청이 한국적 미풍양식 정도로 보고 있다는 점이 좀 이상할 뿐이다.

일단 성경말씀을 한번 찾아보자. 고린도 전서 10:23~24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는 않았으나 유익 했는가, 덕을 세웠는가에 대해서는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던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메신저로서, 정치권력 앞에서도,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전했다. 오늘 우리시대의 성직자들은 이런 원칙을 지켜야 한다.

6) 곡해와 오해

한국교회와 성직자들은 오해를 받는 처신을 하여서는 안 된다. 스스로 곡해를 해서도 안 된다.

오해(misunderstanding)는 지식의 결여나 결함의 문제이지만, 곡해(pervert the meaning)는 본뜻과는 달리 좋지 않게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다소 의도적이고, 아주 나쁜 심리상태이다. 곡해(pervert the meaning)는 억지 주장이나 억지 해석을 뜻한다. 사고방식이나 태도 자체가 삐뚤어진 성격, 삐딱한 자를 말한다. 곡해는 다소 의도적이며,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속마음과 생각을 언어로서 담아내는 표출(expression)된 현상인데, 마음에 품은 것들이 그대로 외부로 나타난다. 교회와 성직자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더욱이 곡해를 하면 안 된다. 넓은 아량과 품을 줄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Ⅱ. 본 말

1. 보수적 사고의 중요성, 자유주의의 문제점

1) 신학의 보수성과, 진보성과 자유주의의 관계 

성경적 신학적 입장에서 보수적 사상은 절대적이다. 자유주의는 실제로 성경을 부정한다. 시류(trend)에 따라 변모(transform)하는 사상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성경적 신학적 입장은 시류를 타지 않아야 한다. 개혁주의적 교회가 성경 안에서의 개혁적 과제를 거부하고, 극우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이런 경우는, 더러운 물을 계속 한곳에 가두어 놓자고 고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개혁주의는 루터의 1517년 종교개혁 이후 칼빈에 의한 신학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신앙적으로는 시대와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겠지만, 20대, 30대, 40대가 주장하는‘변화와 혁신’을 한국교회나 기존의 정당들은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원리와 범위 안에서 신중하면서도 젊은 세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신학자가 성경해석에 있어서 보수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진보적 자유주의 입장을 취한다고 하면, 그런 경우나 그런 사람은 이단적 사상을 소유한 자라고 의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성향은 자유주의와 친밀하다.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성경부정이다.

1) 성경의 신적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2) 성경이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한다.

3) 성경의 완전영감, 축자영감, 완전무오를 부정한다.

4)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규범)임을 부정한다.

특별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부정은 주로 철학자들 사이에서 빈번히 있어 왔는데, 슈라이어마허는 자유주의 신학의 출발이다.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절대자로서의 신은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 신이 아니다. 성경을 읽었을 때 감동이 없거나, 마음이 뜨겁지 않고, 깨달음이 없고, 회개를 하지 않았거나, 구원의 은총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런 자는 아주 위험한 상태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이단의 특성은 주로 성경해석학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자신이 개혁주의자라고 말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자유주의자를 칭송하고, 그런 분들을 계속 연구, 발표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 중에서는 간혹 핵심적인 문제 즉, 배교행위와 같은 가장 중요한 사상을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감추고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배교자의 공헌도를 기록하고 발표할 때는 서언에 먼저 배교행위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한다. 저술가가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독자들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며, 배교자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된다. 속임수를 도입해서 기록된 저작물은, 제9계명을 위반한‘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 하는 자.’에 해당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선민 가운데에서 배교자가 나왔다면, 즉시 처단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로 반드시 징벌을 받는다. 배교자를 칭송하는 행위는 응당히 비양심적이며, 기초적인 신앙과 기본적인 신학사상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학자가 배교행위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자세는 저술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 신앙과 기독교 사상에 대한 위험신호 사이렌이 울리는 상태에 접어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렇게 까지 심각한가? 배교자의 대부분은 자유주의자 이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타는 용광로와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실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이후 저들의 굳은 결심 섞인 답변은 ‘그리하지 아니하실 찌라도 … ’였다.

자유주의 사상은 철학적, 사상적 사조(思潮)로서 진보적 사상과 깊숙이 연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사상적 사조로 보면, 분명히 진보적 사상이다.

분석력(analytical skills)은 지식적 기초 이해와 추리적 계산 능력과 자신의 사상과 연관된 의식 수준에 기인하지만, 분석자의 신앙과 철학적 기초, 신학적 사상이 가장 중요하다. 자유주의는 보수적 신학사상과는 거리가 멀고, 철학사 적으로는 자유주의와 진보적 사상과 는 매우 가깝다. 진보주의가 때로는 기존의 체제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혁명적 요소가 있다.

여기에서 배교(apostasy)란 자기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 신을 위급한 상황(emergency situation)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하나님 신앙을 떠나 배신한 자를 일컫는다. 로마가톨릭교회는 한번 배교한 성직자는 정상화되었을 때, 반드시 성직을 박탈한다. 일반 신도라면 출교 조치를 단행한다.

한국교회는 강점기 시절 배교한 자들이 공개적으로 회개한다는 신앙고백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성직을 그대로 맡았다. 해방이후 교권자들 대부분은 배교자였으나, 다수를 점한 정치를 이용하여 고려파 교회를 축출했다.

국가관의 보수적 사상은 건국초기의 정신이나 당시 기초한 애국사상 입장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고 지지하며 수용하려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보수적 국가관을 뒤흔들게 되면 국기(國基)는 문란해지고, 나라의 기반인 정체성(identity)이 흔들리게 된다.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 진보 세력들의 역사인식은 국가관의 보수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 매우 당혹스럽다.

젊은 세대들에게 비치는 한국교회의 일면(one aspect)이 극우로 표출(expression)되고 있는 듯하다. 보수의 가치와 진보의 실체를 설명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2) 한국교회는 이미지 개선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극우로 비치는 여러 행위들은 일반 국민, 특히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상당수의 전체 국민들을 의식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했던 점이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와 투쟁적 행동으로 인한 실책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이나 일본의 경우는 국수적 민족주의자, 극우의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신앙은 시대와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겠지만, 정치는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미래 세대들의 특성과 사고방식을 읽을 줄 알아야한다. 일부 교회들이 극단적 극우로 비쳐진 점이 무엇보다도 안타깝다. 이점을 한국교회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항 이론도 없고, 여러 조건적 상황 인식에 의한 프레임을 설정하지 못한 채 말만 무성한 현재의 보수는 오합지졸이다. 지도자는 온화하고 겸손해야 해야 한다. 듣는 습성이 생활화 되어있고 지적 분별력과 지혜있는 자라야 한다. 똑똑한 자는 참모 정도로 기용될 수 있으나 앞에 나서면 안 된다. 정치는 감성에 호소해야한다. 앞뒤 논리가 맞아야 한다. 목소리가 여러 개 나오는 집단은 소멸의 전초단계이다. 자기편끼리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으면, 저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총선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악의적 훈수 정치도 사라진듯하다.

정치인은 특히 언행에서 인품이 묻어나야한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런 분을 찾기란 어렵다. 흠결이 있는 말을 계속 입에 자주 올리거나, 저급한 언행으로 말실수가 잦은 분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극우로 비쳐진 선동가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런 분을 지도자로 내세우게 되면, 추풍낙엽 떨어지듯 표 떨어지는 소리가 우수수 하는 개연성을 열어놓게 된다.

정치는 나라의 전체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이 선택한 민의는 존중되어야 한다. 교회는 비록 다수의 결정이라고 할지라도, 신앙적으로, 기독교사상적으로, 성경적 원리와 입장에서 볼 때, 진리와 정직 정의 개념에 위배되는 점이 무엇인가에 국한하여, 입장을 밝히는데 그쳐야 한다. 작금의 상황에서 교회가 정치에 깊숙이 직접 개입한 것은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에는 맞지 않는다고 본다.

정치인의 비난 수법은 저급한 경우가 다소 있지만, 비판은 일종의 비평으로서 고상한 태도로, 서로 다른 경우에 해당한다. 정치가는 남에게 비난을 받아서도 안 되겠지만, 다른 사람 비난하기를 일상으로 하면, 옳은 말이라도 겸양의 보습을 찾기가 어렵게 된다.

비판은 여러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어떤 원칙과 판단 기준을 설정하여,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밝히는 것으로서, 존재와 의미를 분석한 논리적 판단에 기초한다. 도덕적, 학문적 비판은 정의를 바로세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 제시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만일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강제하는 사회주의 체제로의 정체 변경이 가시화 된다면 교회가 소리를 내야 한다. 교회는 국민의 헌법적 기본권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있으며,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국민의 안위를 책임진 정부의 질병관리 정책에는 대부분 교회들이 협조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2. 개혁적 사상과 진보적 사상은 무엇이 다른가?

1) 개혁적 사상

국가 사회 전반에 있어서 개혁적 사고가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기업이나 어떤 조직체라고 할지라도 변화가 없는 제자리걸음 운영은 퇴보에 직면할 것으로 봐야 한다. 개혁의 과제는 항상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재구성을 통한, 목표물을 빗나간 점을 수정하고 개선해야 한다. 지금까지 걸어갔던 오류의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와야 한다.

선진기업들은 주요 상품 개발을 시스템적으로 운용한다. 어느 상품이 히트를 치기 직전부터 이미 다른 상품에 대한 개발을 시작해 놓아야 한다. 항상 새로운 개발을 꿈꾸며, 시도하지 아니하고 안주하게 되면, 글로벌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연구 분야에서 뒤떨어지면 도산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 개혁(Reform)은 기존 체제에서 변화를 위한 조직, 역할 등에 있어서, 재구성과 같은 개선이 항상 필요함을 의미한다. 체제를 무너트리고 재구성하려고 하는 혁명적 발상과는 다르다. 진보와는 주된 개념에 있어서 상당히 거리감이 있다. 현재의 보수 측 세력들은 진보 적 좌파 세력들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 진보의 개념적, 사상적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2) 진보주의(progressivism) 사상, 일반론 

(출처 ko.m.wikipedia.org)

다음은 진보주의의 사전(dictionary)적 의미와 어원으로서, 철학적 사상적 사조를 설명한 것이다. 사전적 설명을 부정하면 무지하거나 아니면, 온건한 사회주의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마음은 거기에 가 있는데 몸까지 가기는 싫다거나, 소속은 진보 측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막상 체제 변화는 원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기독교신앙과 사상에 비우호적이거나,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부정하는 자일 가능성이 농후한 자일 수도 있다.

철학사적으로 사상적 사조로 볼 때,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소련 중국 북한식 공산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사회주의 사상의 기원이며 모체이다.

진보주의(進步主義, Progressivism)는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의 체제에 대항하면서 변혁(revolution)을 통해서 새롭게 정체를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들을 말한다. 변혁은 대개 정치적인 혁명을 통해 사회의 제도와 조직을 모두 바꾸려고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보적 성향을 가진 자들은 기존의 체제를 무너트리는 것이 주목적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계획경제 정책을 펴며, 공동생산 공동분배와 같은 노동, 임금지급 등의 사회주의 정책을 편다. 진보 사상은 원래 자율적인 민주적 시장의 경쟁이나 흐름을 부정한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정체는 보수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체제의 유지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보수주의와는 정 반대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의 보수주는 혁명이 아닌 점진적 변화와 점진적 진일보를 꿈꾸는 온건한 보수적 입장을 견지한다. 그럼으로 진보주의의 본질적 의미로서 진보주의의 반대개념은 반동주의이다. 반동주의나 극단적 진보주의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난 국기, 기초, 사회제도, 경제제도, 조직 등을 근본적으로 고치려고 한다.

보수와 진보가 다른 점은, 보수는 사회의 질서 유지를 바탕으로 경제적 자유를 추구한다. 진보는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주장하며, 경제적 평등이라는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그리나 자율성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경제적 평등은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통해 잘살고 못 사는 자가 없는 사회주의적 즉 공산주의 이념인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진보는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 따라 상대성을 띠는 개념이다. 범진보로 분류할 수 있는 여러 사상이나 정치 집단이 있는데, spectrum(범위)도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이념은 진보주의 이념이냐, 보수주의 이념이냐로 달라질 수가 있다. 진보주의자들의 경제적 평등 이론으로 토지 공개념 도입, 사유재산 불허와 같은 개념은 진보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사상의 축이다.

현재 진보적인 사상으로 인정받는 사상에는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 다양한 형태의 집산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좌익 내셔널리즘, 해방 신학, 민중신학, 세속화 신학, 사신신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는 사회자유주의, 환경주의, 진보주의로 규정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좌파 성향의 사상들이 진보주의로 규정되는 경향이 많지만, 강한 좌파 성향의 경우는 오히려 '진보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은 종종 '진보주의'를 사회자유주의(혹은 별칭으로서 liberal)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하며, 같은 맥락에서 일부 사회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규정한다.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의 사상을 '진보주의'라는 애매한 용어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의 자세를 취한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진보라는 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진보'라는 관념이 오늘날의 사건과 역사가 점차 진화하여 더욱 나은 미래를 향한다는 가설(hypothesis)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진보라는 개념이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여 그것의 전복을 꿈꾸도록 하는 일을 방해하고, 사회가 결과적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으로서의 자발적 결사와 개인의 자율성을 저해하며, 사람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이러한 시각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경우는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아니키(anarch, 반란 주모자)를 일종의 고도로 진보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더라도, 이것이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옹호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배 체제에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환상(지배에서 자유로의 진보를 향한다는 환상)을 심어줘서 사람들이 직접적이고 자율적인 행동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고, 지배 자체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무마시키며 국가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킨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3) 진보주의가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

진보주의의 개념은 지역마다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가령, 진보세력의 집권이 어려운 보수적인 미국, 일본, 대한민국에서 이념상으로는 중도파에 속하는 자유주의는 일종의 진보주의 이념으로 간주되지만, 유럽권에서는 진보로 간주하지 않으며,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일부 진보적인 남미국가들에게는 보수주의 이념으로 평가받는다.

4) 대한민국에서 진보주의

대한민국에서 '진보주의'적 정치세력은 사회민주주의 좌파 정당인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생태주의 정당인 녹색당 그리고 사회자유주의 중도좌파 정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이론적 사상적으로는 진보주의에 포함된다.

그러나 과거 한국에서는 극심한 반공주의로 인해 사회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자신들이 사회주의자라고 표방하기보다는 진보주의, 혹은 평등주의, 생태주의 등의 가치 등으로 우회적으로 진보 연합공동체주의를 표방한다. 4+1 국회운영 기류도 연합공동체주의로 볼 수 있다.

더불어 민주당의 경우는 진보연합 동맹에 참여하는 등 일면 진보주의를 표방하기는 하나, 진보정당인 정의당, 노동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보수주의적이기 때문에 보수성향의 진보주의자들은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재고(再考 reconsideration)하기도 한다.

정치계 외에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진보와 보수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흔히 자유주의신학, 사회구원(사회참여), 진보적 정치이념, 에큐메니컬 운동(교회일치 운동)을 주장하는 자들을 진보주의자로 분류한다.

 

Ⅲ. 한반도 정세 분석

1. 통일론

유럽에서의 사회주의 개념은 소련이나 중국, 북한의 사회주의 개념인 공산국가들과는 조금 다르다. 또한 서유럽에서의 사회주의는 극단적 주의로 평가 받아왔다. 비공산계열 사회주의는 진보주의 이념으로 평가받아왔다. 공산권의 붕괴이후에는 반권위주의적 공산주의도 진보적 이념이라는 경향으로 보고 있다.

그럼으로 한국적 상황에서 이해되는 진보는 사회주의 개념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의미하며, 좌파적 폭압적 공산주의로 해석하고 있다.

1) 미래 세대들의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

20 ~ 50대의 지적 학력 수준은 상당히 높다. 신사고 개념도 오늘날의 한국사회 경제를 건설한 60대 이상의 장년 세대를 앞지른다. 2,30대 젊은 세대들은 실질적 삶에서 재정적으로 공평한 사회에 관심을 가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토지 공개념 찬성, 노동임금 동일 지급 등에서 그렇다면, 진보적 사상에 의한 체제 변화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현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젊은 세대들의 사상 변화의 책임에는 재력가 보수들이나 극우들의 책임이 크다. 현실적 삶의 고달픔이나 넘어야할 파고가 높기 때문에 사상까지도 바꿔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의 실현 불가능한 허망한 꿈은 결코 있을 법한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보 자들에게 사상적으로 그렇게 좋은 북한으로 갈 사람을 모집한다면 아무도 신청하지 않을 것이다. 6.25 남침이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념적 사상논쟁은 매우 심각하다.

2) 북한 동족들의 통일 문제 인식 

북한의 실권자들은 어떤 형태로서든지 통일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 불가하지만, 가설로라도 남한의 체제변화가 있다고 할지라도, 북한 고위층들이 신변의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도 그러하다. 남한의 정체가 바뀐다고 해도, 통일이라는 과정에는 권력 다툼이 자명하기 때문에, 북한의 실권자들은 통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실종된 나라이다. 체제 유지를 위해 사상범 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거슬린 자들을 숙청이라는 강수를 써서 유지된 집단이다.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보여 왔다. 통일 찬가는 가면일 뿐, 통일 반대론 분위기는 권력유지를 위한 투쟁의 일환이다.

특이한 것은 김정은 중병설 중에서도, 여동생이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 체제 유지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단정적인 증거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남한 건국초기의 구호를 북한 권력층이 잘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북한식의 공산주의 체제가 1945년 해방이후 75년이란 긴 세월동안 시간적으로 너무 오랜 기간 3대 세습 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북한의 고위 지도자급들은 권력에 충성한 자들로서, 신변 변화의 출발인 통일을 원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 대한민국으로 들어온 탈북민들을 보면, 대부분 북한 동족들의 생각은 이미 자유화 물결이 두루 퍼져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상황에서 독일과 같은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3) 중국의 계산법 

중국은 남한이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계속 한국정부에 호의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우리를 속국으로 취급하였다. 중국은 앞으로 한국의 주요 경제와 산업 전반에 손을 뻗혀서 남한기업을 점령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식량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서 의존적으로 점령되었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대부분의 기술력은 한국을 통해 취득하였거나, 빼앗아 간 상황이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배타적으로 나오는 한 가장 인접한 중국은 무시할 수 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중국의 속셈 법을 주시하고 긴장하는 가운데 항상 경계할 필요가 있다. 어떤 형태로서든지 경제와 산업의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실제로는 점령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4) 미국의 입장 

미국의 주한 미군파견은 한국을 요충지로서 전략상으로나 작전상 교두보로 삼기 위한 점도 다소 있다고 본다. 주한 미군 주둔은 북한에 대한 감시도 필요하겠지만, 중국이나 러시아 견제가 용이하다. 이미 한국사회 일각에서, 특히 사회주의 옹호자들 가운데에서는, 의도적으로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있다. 미군이 철수되면 당장 중국으로 부터의 점령은 용이해 진다. 미군철수와 동시에 한국은 중․소 양대 진영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다.

미국은 한국을 얻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였으며, 희생을 감수했다.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나라, 한 번도 가보지 아니한 나라를 위해서,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목숨을 바쳤다. 미국은 절대로 한국을 쉽게 놓지는 않는다. 현재와 같은 상황은 사실상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입장에서는 더 안전하다. 정찰기 등 군사적 작전도 한국정부의 요청보다는 미국의 판단과 필요에 따라서 이뤄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이 온갖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켜 주고 있는 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고마울 뿐이다.

만일 체제변화와 같은 시도가 있을 때, 미국은 적극적으로 개입할 가능성도 있다. 체제변화 그 자체는 탈 미국 시도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방위비 협상으로 미군철수 카드는 사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은근히 내심으로 원하는 속셈법이 있는 것 같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작전권 인수는 신중해야 한다. 국가산업전반에 해가되는 정책 탈원전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

2. 합리적인 통일론은 무엇이냐? 

통일은 민족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목적이다. 통일은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상존한다. 그러기 때문에 통일론을 구상해 보기로 한다.

1)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이 가장 좋다.

하지만 이 방안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랜기간 동안 서로 경험한 체제가 다르기 때문에도 더욱 불가능하다. 북한의 하위계층 보다는 상위계층에서 더욱 원하지 않을 것이다.

2)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무력 사용은 동족이 모두 자멸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선제적 공격은 할 수가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3) 북한의 체제 붕괴로 인한 통일

현 북한 정권의 체제에서 자체적으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상황을 가정해 본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억제할 수가 없다.

4) 경제 지원을 통한 통일론

북한에 경제를 지원하면, 주민들의 생활이 풍요롭게 된다. 그러면 자유에 대한 갈망도 높아진다. 그렇게 되면 통일도 가능하다. 경제는 핵무기 생산을 중단해야 지원할 수 있다.

5) 김대중 통일론의 실현 가능성

① 제1단계 통일

1국가, 2체제에 의한 통일을 먼저 합의하고, 점차적인 남북 교류와 남북한 동등한 경제 발전이 이뤄지면, 어떤 모티브가 발생할 것으로 본다. 그때 분위기를 봐서 다시 논의 한다.

인구 이동은 초기에는 이동을 제한하나, 점차적으로 확대한다. 그렇게 된다면 물리적 충돌 없이 자연적으로 하나의 체제가 중심적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제2단계 통일

완전통일 시대로 국방과 국가예산을 통일시킨다.

기독교 신앙이 북한 전역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현 정부가 비기독교 정책을 쓰는 것 같다는 의심을 받고 있어서, 우려하는 자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김대중 통일론은 하나의 이론이다.

 

Ⅳ. 맺는 말

국내 사정은 조금 복잡하다. 일반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하지 못한 정책을 펴는 정파는 절대로 권력을 향유할 수가 없다.

현재의 보수진영은 체제 변화를 정쟁의 주요 프레임으로 활용하고 있다. 보수 측은 정부 여당이 사회주의를 일방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는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설정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된다. 정부 여당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계속 그렇게 몰아 부치게 되면, 떠밀려서 그쪽으로 갈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 여당 또한 이 문제를 공개하고 공식화해야 한다.

국기(國基)와 관련된 정체(Identity) 변경은 찬반 국민투표에 붙였을 경우, 헌법 사항이므로 2/3 득표를 통과 기준으로 설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 그리고 시장경제로 인하여 경제가 발전되었고, 풍요로운 삶을 향유(enjoyment)하게 되었고,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 체제 전환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현재의 정치상황이 도래한 원인은 과거 보수 지도자들의 상당한 실책과 과오로 인해, 민의가 고개를 돌린 경우이다.

일부 극우들이 계속 정체 문제를 물고 늘어졌지만, 4.15 총선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승리한 것을 두고 ‘총선 민의는 체제 변화 여부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다소 우려한다는 정도로 말 할 수는 있을는지 모르나, 분명히 별개의 논점이다.

정체성(identity) 변경 문제는 강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잘못하면 심각한 국론 분열과 대혼란도 예측됨으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실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주의 체제로의 변화를 추진한다고 하면, 한순간에 국민 대다수는 돌아설 수 있을 것으로 예측 된다.

진보 진영인 여당 안에서도 상당한 일부 인사는 보수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로의 급변한 체제 전환을 실제 시도하려고 하면, 여당 안에서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년 후 2022년에 제20대 대선이 있다.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아니한 상황에서 국회에서 체제 변화를 시도하려고 한다면, 제20대 대선은 요동을 칠 것으로 추정된다. 청와대 참모들의 대다수가 1인 2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실재(existence)는 대다수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 별반 다름이 없다는 증빙으로 볼 수 있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 행복 추구권의 욕망은 동일하다는 증거이다.

정체 변경 문제를 만일 국민투표에 붙였을 경우, 그 순간부터 국민의 불신을 받아 정권은 붕괴될 것으로 예측된다. 철학사적으로 사상적으로 보면,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공산주의 사상이며 사회주의사상의 기초이다. 소련 중국 북한이 대표적인 나라이다. 소련 공산주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페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실질적으로 몰락되었다. 그렇다면 진보측 일부가 사회주의 프레임을 잘못 설정한 것이 아닌가? 지금이라도 정부 여당은 불필요한 언행을 통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수기 14:28 하반)라고 하셨다. 이 메시지가 나오기까지의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축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다.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에는 이념과 사상이 담겨 있다. 축복도 저주도 말 속에 숨어 있다. 선택은 자유이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 본사에 기고된 글은 개인의 의견임으로 본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