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남교회 초기 30년 역사의 고신교회사적 의의

나삼진 목사(오렌지카운티 샬롬교회 목사, 행복한 교육목회연구소 소장, 전 총회교육원 원장)

부산남교회가 설립 71주년을 맞이했다. 부산남교회는 1949년 5월 8일 설립되어 9월 한명동 목사의 부임과 함께 빠른 안정으로 고려신학교가 설립 초기 정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설립 3년 만에 1953년 대형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그 교회당은 1983년 교회당을 지금의 거제동으로 이전하기까지 고신교회의 본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79년 교회 첫 30년 동안 개최되었던 고신총회의 스물아홉 번의 총회 가운데 17차례 총회를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했으며, SFC수양회도 1973년까지 30회의 수양회 가운데 15회 수양회를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했다. 부산남교회는 그 외에도 고려신학교 졸업식과 학술교류, 교단적인 연합집회, 학생들과 청년들의 연합 신앙강좌는 물론 교단의 중심이 되었다. 1970년대 말까지 고신교회 성도들 가운데 부산남교회에서 열린 연합행사나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성도가 없을 정도로 부산남교회는 고신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고향과도 같았다.

또 한명동 목사는 설립 초기 교수와 행정을 맡아 가르치고 봉사하면서 고려신학교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1954년 송도 교사를 조성하는 것은 물론 이후 고려신학교가 고려신학대학, 고신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대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필자는 고신교회 역사와 정신을 탐구하는 한 연구자로서, 또 부산남교회를 모교회로 신앙이 성장한 사람으로서 부산남교회 설립 70주년을 맞아 교회 정사가 출판되기를 바랐지만 이루어지지 못해 이에 부산남교회 초기 30년 역사의 교회사적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한 목회자와 지역교회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탁월하게 봉사할 수 있는가를 배울 것이다.

총회장으로 선임된 한상동 목사(1966)

 

1. 부산남교회의 설립과 한명동 목사

부산남교회는 출옥성도 한상동, 주남선 목사가 옥중에서 신실한 목회자 양성의 기도와 비전으로 설립한 고려신학교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들은 1946년 6월 진해에서 두 달 동안 신학강좌를 개최하여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였고, 9월 20일 일신여학교 교실을 빌어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호주선교부와 협력이 여의치 않아 한 학기 만에 초량교회 유치원으로, 다시 한 달 만인 1947년 4월에는 광복동 1가 7번지에 구 산업은행 기숙사를 구해 새로운 교사로 마련하면서 신학교가 안정을 찾았다. 이렇게 잦은 이사로 신학교는 ‘보따리 신학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려신학교는 당시 부산시청 앞 광복동 입구의 구도심의 중심이자 부산시민들의 광장이었던 용두산공원 아래에 위치했었다. 신학교 강당이 주말에는 교회당으로 사용하기에 적당하였으므로 신학교에서는 1948년 3월에 신학교 강당에서 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1)

이러한 교회 설립 계획은 1년 후 1949년 5월 8일에 부산전도교회로 결실을 얻었는데 부산남교회는 이 날을 교회 설립 기념일로 삼고 있다. 부산남교회 연혁에는 “한명동 목사가 부산 중심가에 교회 개척을 계획하던 중 영주동 구역 박봉화, 정태영, 박명호, 이종식, 임명덕, 윤창수, 손덕례, 김란이, 강복순, 홍달분, 최금선, 김정원, 김순덕이 부산시 중구 동광동 1가 7번지 구 고려신학교에 모여 부산전도교회로 발족했다”고 기록한다.2) 그러나 이 기록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1949년 5월 8일은 고려신학교 교장 박윤선 목사가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학생 20여 명과 함께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전도교회가 시작된 날이다.3) 이를 5개월 후인 9월 25일 당시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 한명동 목사가 인계를 받아 공식적으로 취임, 30명 미만의 숫자로 부산남교회가 출발하였다.4) 한명동 목사도 고려신학교 관리를 맡아 있어 시내에 살던 영도교회의 영주동 구역 성도들이 주일 저녁예배와 수요기도회에 참여하면서 관계하기 시작하였다. 한명동 목사는 전도교회를 인계받아 본격적으로 개척하면서 영주동 구역 성도들과 신학생들이 그 중심축을 형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5) 복음전도에 열정을 가진 고려신학교 학생들과 영도교회 영주동 구역에 속한 안정된 성도들이 힘을 합쳐 빠른 기간에 성장할 수 있었다.

한명동 목사가 부산남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은 세 가지 이유였다. 먼저, 한상동 목사가 설립한 고려신학교 초기에 교수는 물론 행정과 함께 고려신학교의 사감으로 학생 관리를 맡아 신학생들의 경건훈련에 힘쓸 사람이 필요했고, 이를 한명동 목사가 담당했다. 행정직원이 없는 가운데 기숙학교와 같이 운영되었던 당시에 신학생들은 늦게까지 공부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 경건훈련에 힘썼다. 한명동 목사가 처음에는 이 두 가지 일을 함께하였으나, 영도교회를 목회하는 입장이서 이를 계속하기 어려워 두 차례 이상 사면의사를 표명하였으나 당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6) 그러나 이후 영도교회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운동의 협력을 위해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한명동 목사는 1949년 9월 말에 교회를 사임하고 본격적인 개척을 시작한 것이다.

둘째, 고신의 교회쇄신운동을 위해 부산의 중심지에 교회 설립의 필요성이 있었고, 한명동 목사가 지역적으로 제한된 영도를 떠나 부산 시청 앞 중심지에서 ‘개혁주의 교회 건설’이라는 비전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한명동 목사는 웅대한 비전의 사람이었는데, 학생신앙운동(SFC)의 시작, 고려신학교 송도교사 마련, 칼빈대학 설립, 고려신학교가 기독교 인재영성을 위해 고신대학교로 발전한 것, 그리고 고신교회의 해외 선교에 기초를 놓은 것도 그의 비전의 산물이었다.

셋째, 고려신학교 설립 초기에 교수가 부족해 박손혁 목사를 교수진에 합류시키기 위해 목회지를 안내해야 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고려신학교는 설립 초기에 교수진이 부족하여 대표적인 신학자들인 남대문교회 김치선 목사,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 명신홍 목사와 미국 남장로교회 John C. Crane(구례인) 선교사들을 교수로 원했지만, 고신과 총회와의 관계 문제로 이들이 교수로 합류하지 못했다. 이에 영어와 헬라어에 능통했던 박손혁 목사가 교수로 적임자였기 때문에 그가 교수로 올 필요가 있었고, 한명동 목사는 박손혁 목사의 교수진 합류를 위해 유서 깊은 영도교회를 그에게 양도한 것이었다. 박손혁 목사는 영도교회에 부임하면서 부산으로 이주해 고려신학교 강사와 교수로 헬라어와 신약석의 등의 과목을 가르쳤고, 고려신학교 환원이후 1961년부터는 2년 동안 제3대 교장(당시 교수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명동 목사는 이러한 세 가지 이유로 부산에서 두 번째 역사와 규모를 가지고 있었던 영도교회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임하고, 부산남교회 개척에 헌신하였고, 30년 동안 부산 굴지의 교회를 이루었으며, 고신교회사에서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상동 목사의 아홉 살 아래 동생이었던 한명동 목사(1909-2001)는 부산상업학교에 입학할 즈음 당시 교사로 일하던 한상동의 전도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3학년 때이던 1927년 1월 7일 항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4년 동안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는데, 문창교회에서 회계집사로 5년 동안 봉사하면서 주기철 목사의 신앙적인 지도를 받았다. 그가 형을 따라 신학을 공부하고자 할 때 주기철 목사는 앞으로의 더 큰 사역을 위해 평양신학교가 아니라 일본 유학을 권하였다.7) 청년 한명동은 1935년 3월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에 유학, 예과 2년, 본과 3년 수학하고 1940년 3월 졸업하고, 그해 재일조선기독교대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신학교에 공부하는 동안부터 일본에서 아마가사끼교회와 니시노미야교회, 오고끼교회를 개척 설립하였고, 1940년부터 오사카와 고베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1944년에 귀국, 해방 직후까지 2년 동안 밀양 수산교회를 시무하였다.

1946년 2월 27일 영도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한 한명동 목사는 영도교회에서 3년 6개월 시무하며 교회를 든든히 세웠다. 그가 시무하는 동안 학생들의 신앙지도에 힘써 학생신앙협조회를 이끌어 오늘의 SFC가 출범할 수 있게 했고, 영도복음화의 이상을 가지고 각 구역을 별도의 교회로 독립시켜 파송함으로 1948년부터 2년 동안 제2, 제3, 제4영도교회가 설립, 고신의 진리운동이 영도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오늘날도 쉽지 않은 분립 개척교회는 그 시대로서는 참으로 혁신적인 일이었다.

1949년 9월 6일 문창교회당에서 개회된 제53회 경남노회에서 한명동 목사와 수산교회 박손혁 목사가 각각 시무사면을 하고, 박손혁 목사는 바로 영도교회 위임목사 승인을 받았다. 한명동 목사는 전도교회를 인계받아 9월 25일부터 개척하여 교회가 빠른 기간 동안 성장하였다.8) 1950년 3월 7일에 모인 제53회 경남노회에서 부산남교회로 인가를 받았으며, 노회는 한명동 목사를 당회장으로 임명했다.9)

10주기에 나온 한명동 평전(2011)

 

2. 한명동 목사와 부산남교회 목회

부산남교회가 성장하면서 1951년 9월 교회당 신축기성회를 조직하고 건축을 준비하였는데, 박봉화 장로가 앞장서고, 실무는 건축사업을 하던 이종식 집사가 설계와 건축을 맡아 봉사하였다.10) 대형 교회당을 1952년 3월 2일에 기공하여 1년 반 동안 건축을 완료하고, 1953년 9월 20일 입당하여 첫 예배를 드렸다. 교회당이 준공되면서 1954년 12월 17일에는 헌당식과 함께 초대장로로 박봉화, 정태영 두 장로 장립식을 가졌다. 새로 건축된 부산남교회당은 전쟁으로 전국이 파괴되었던 당시에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교회당으로 알려졌다.

부산남교회와 한명동 목사는 초기 고려신학교 운영을 적극 지원하였고, 교회가 국제시장을 가까이 한 관계로 6.25전쟁 동안에는 피난민 목회자들을 구제하는 사역을 담당하였다. 이후 부산남교회는 교회당 건축 후 꾸준히 성장하여 1983년 거제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만 30년 동안 고신교회의 중심을 이루었고, 초교파적으로도 부산의 대표 교회로서 봉사하였다.

부산남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앞장섰는데, 주일학교에서 합천 화양교회, 청년회에서 신평교회를 시작으로, 괴정제일교회, 영주읍교회, 장림교회, 화산교회, 동삼교회, 우봉교회, 덕화교회, 조도교회, 광양교회, 반여동교회 등 열 두 교회를 개척하여,11) 개혁주의 신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에 기여했다. 또 1964년부터 3년 동안 연속으로 울릉도교회 여름성경학교를 지원했는데,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 이러한 봉사는 오늘날의 해외 단기선교와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1960년에는 부남유치원을 개원하여 어린이 교육에 힘썼고, 1960년 8월에 교회에 연보함을 설치하여 교회당에 들어올 때 연보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신학교류를 위해 고려신학교를 방문하는 외국의 저명교수들이 방문할 때 평일에는 부산남교회당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주일에는 부산남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가졌다. 이것은 교회가 신학교에 협력한 일이었지만, 교회가 국제적인 시각을 갖추는 일이기도 하여, 부산남교회는 다른 여느 교회보다 높은 신학적인 수준을 갖게 되었다.

부산남교회는 1973년에 《부남교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46배판 28면으로 된 이 간행물은 오늘날 교회들이 발행하는 신앙잡지이기 보다는 종합목회 보고서와 같은 것이었다. 한명동 목사가 권두언을, 한기범 목사가 ‘목자와 양’ 설교를 실었고, 1973년 교회의 역사 자료로 예산안, 집회보고, 주일 오전과 오후, 수요기도회 설교 제목과 본문과 회집 통계, 등록자 명단, 성례자 명단, 출생한 아기들의 명단까지 실었다. 또 각 기관의 사업계획은 물론 집회 내역, 외부강사의 명단까지 정리하였다. 이같은 보고는 그 이전 1971년에 간행한 《결산과 기획》에서도 비슷한 형식을 보이고 있는데, 한명동 목사의 치밀한 행정가로서 목회자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명동 목사는 남다른 비전을 가진 지도자였는데, 1973년의 교회의 기본방침으로 ‘남교회의 기독교사적(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사명을 완수한다,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 건설한다, 그리스도를 교회교육의 교장으로 모신다, 한국을 우리의 제1교구로, 아시아를 우리의 제2교구로, 세계를 우리의 제3교구로 한다’ 등 여섯 가지로 제시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그는 교회의 지도이념을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 중심, 선교중심, 남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전체에 대한 충성, 그리스도를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한다’고 제시한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교회의 질적 부흥, 교회의 양적 부흥, 교회의 교육진흥, 국내 선교의 추진, 해외 선교의 추진’을 제시한다.12)

부산남교회는 1970년대 중반 활판 인쇄로 주보를 6면으로 출판하면서 매주 설교를 싣고, 또 설교 전문을 타이핑하여 교회에 보관하였으며, 교회 출신 해외 성도와 유학생들, 그리고 주보를 원하는 지방의 목회자들에게 매주 150여 통 이상을 보내었다. 한명동 목사는 개혁주의 신학에 철저한 설교를 했는데, 당시 설교 자료가 많지 않던 시기에 남교회 주보는 농어촌 목회자들에게 특별한 도움이 되었다. 거제동 예배당 건축과정에서 이러한 주보와 교회의 오랜 역사적 문서들이 유실되고 만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명동 목사는 개혁주의 교회 건설, 하나님 나라, 그리고 개혁주의 세계에 한결같은 관심을 가졌다. 1960년대 이후 그의 교단적인 사역이 보다 확대되었는데, 1966년 제1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고려신학교는 1968년 문교부로부터 각종학교 인가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대학동등학력 지정학교가 되었으며, 1970년에는 고려신학대학으로 인가받았다. 또한 1976년에는 국내교회의 헌금과 네덜란드개혁교회의 지원으로 송도교사 본관을 신축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고려신학대학 성장과 교단 발전에 깊이 영향을 미쳤다.

한명동 목사는 1979년 12월 4일 교회를 시무한지 30년 만에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은퇴 후 1981년부터 2년 동안 서울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하였고, 이후 자녀가 살고 있던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다가 2001년 9월 14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제51회 총회시 총회장으로 엄수되었다. 필자는 2011년 9월에 그의 서거 10주년을 맞아 고신대학교, 부산노회, 부산남교회 등과 힘을 합쳐 기념예배를 준비하였고, 논설․설교집 《새 역사를 향하여》를 발행하고, 평전 《한명동 목사와 개혁주의 교회건설》 출판한 바 있다.

한명동 목사의 지도로 창립된 전국 SFC 제6회 전국기독학생하기수양회(1952)

 

3. 부산남교회 초기 30년과 고신교회

1) 부산남교회와 한명동 목사와 고려신학교

부산남교회는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시작되었지만, 빠른 기간에 성장하여 대형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고려신학교가 초기 부산남교회 성장에 기여하였고, 교회당 건축 후에는 부산남교회가 고려신학교 발전에 도움이 기여해 신학교와 교회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1953년 교회당 건축 후 고려신학교가 졸업식과 입학식 등 큰 행사를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하였다. 부산남교회는 1954년 고려신학교 송도교사를 준비하는 일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한명동 목사가 중심이 되어 부산 서구 암남동 34번지에 13,000여 평의 부지를 조성하고 고려신학교 8,000평, 복음 병원 5,000평을 사용하게 했다. 한명동 목사가 송도교사 건축과 이전에 앞장서 고신대학교 발전에 기초를 놓은 것이다.14)

그는 기독교 인재양성과 기독교 인문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칼빈의 제네바대학을 이상으로 고려신학교 예과를 개편하여 부산 감천에서 1955년 9월 칼빈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교사로 사용하던 감천동 영국군 주둔부지가 중앙대학교 임영신과의 법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칼빈대학은 1964년 고려신학교 예과로 흡수되었다.

한명동 목사는 1974년에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로 취임해 1975년 구본관의 건축을 이끌었다. 1976년 10월부터는 2년 동안 이사장으로 봉사했으며, 이후에도 대학 발전의 중심에 있었다. 한명동 목사의 이러한 기독교대학에 평생 헌신한 공로로 고신대학교는 1996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으며, 90세 생일을 맞아 고신대학교는 《개혁주의 신학과 문화적 사명》이라는 논문집을 헌정했다.

 

2) 부산남교회와 고신총회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에 가장 앞장섰던 곳이 부산을 포함한 경남노회였다. 경남노회 출신 목회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투옥되었고,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다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며, 해방 후 주남선과 한상동 목사는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쇄신운동은 총회를 마귀당으로 생각하고 이탈한 재건파들과는 다른 것이었다.15)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친일기독교화에 앞장섰던 경남노회의 김길창 등 수 명의 교권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개혁운동을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6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교회쇄신운동은 총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1951년 총회에서 추방되었고, 1년을 더 기다렸다가 1952년 9월 경남노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로 승격하여 별도의 치리회를 구성하였다.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운동은 평신도들의 반향은 뜨거워 출옥성도들을 지지하는 많은 교회가 일어났다.

고신교회가 총로회가 구성한 후 1년 즈음이던 1954년에 부산남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여 제3회 총로회부터는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교회당이 부산시청 앞이었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하여, 대형집회를 하기에 적당하였다. 교회 설립 30주년이던 1979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29회의 총회 가운데 3회부터 11회까지, 13회, 15-16회, 19회, 24-26회, 28회 총회 등, 모두 17차례의 총회를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했다.16)

고신교회 초기 총회 총대는 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총대 수만큼 많은 전국교회의 대표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했다. 총회에서의 결의가 전국교회에 영향을 미쳐 이들을 위한 식사까지도 함께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교회의 총회 유치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17)

 

3) 부산남교회와 SFC

SFC 역사는 한명동 목사가 이끌었던 학생신앙협조회, 한부선 선교사가 이끌었던 YFC, 그리고 두 사람이 계획하고 운영한 고려신학교 주최의 제1회 청소년 수양회의 세 흐름이 하나로 만나 시작되었다.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운동은 목회자들보다 평신도들과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영향을 받았던 학생들이 회개운동에 동참하여 진리운동이 확산되었는데, 1948년 8월에 고려신학교가 주최한 청소년 수양회가 훗날 SFC수양회로 편입되었다. SFC수양회는 SFC의 동력과도 같았고, 학생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원이었다.

SFC는 1973년까지 모두 30회의 수양회를 개최했는데, 그 가운데 11회의 수양회를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하였고, 제1, 3, 4, 5회의 네 차례 수양회도 고려신학교 강당 곧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된 것이므로 전체 수양회의 절반인 15회를 부산남교회당에서 개최한 것이다.

초기의 SFC수양회는 1주 동안 계속되었고, 새벽기도회와 저녁 집회와 낮 시간의 모든 프로그램을 교회당에서 진행하고, 취사부에서는 한 주 동안 매일 세 차례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수양회는 학생들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준비하지만, 취사, 부식 조달, 심지어 여학생들의 숙소까지 사실상 부산남교회의 몫이었다.18) 교회에서는 수양회를 위해 성도들이 부식 찬조와 재정 후원으로 봉사하였고, 교회적으로도 수도료, 전기료 등의 부담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수양회를 계속하여 한 교회에서 개최하는 것은 교회로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다음세대를 중요하게 생각하던 한명동 목사의 리더십이 이를 가능하게 했고, 교회는 이 일을 하나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런 점에서 이근삼은 부산ㄴ마교회를 학생신앙운동 발상지라 했다.19) 1970년대까지 교회별 수양회 참석 학생 수도 해마다 부산남교회가 가장 많았다.

SFC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신앙운동이었지만, 한명동 목사는 SFC의 사실상의 창설자와 같았다. 그는 해방 후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에 시무할 때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교회쇄신운동이 일어날 때 학생들의 모임이었던 학생신앙협조회를 이끌었고, 그의 지도로 학생들은 교회를 살피고 개혁을 위한 기도제목을 찾고, 함께 신앙동지들을 규합하였다. 한 목사는 또 SFC강령을 기초하였는데, 처음으로 SFC강령이 본 모습으로 나타난 시기는 1948년경이었고, 1952년 7월 중앙학생신앙운동 창립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SFC수양회의 한명동 목사는 수양회 때마다 강사로 참석하여 학생들을 격려하였는데, 1968년 SFC 20주년 기념 수양회에서 주강사를 담당하였다.20) SFC에서는 1971년 SFC에 간사 제도가 도입되었고, 한명동 목사도 교단적인 책임이 무거워지면서 학생지도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1983년 교회를 거제동으로 옮길 때까지 부산지방 SFC사무실이 있었던 부산남교회당은 SFC의 본부와도 같았다.

 

4) 부산남교회과 교단 선교

부산남교회는 고신교회의 선교운동의 중심이었다. 고신총회는 진리운동 10주년을 맞이하여 김영진 목사를 대만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세계 선교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시 교회들이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선교비 거출에 어려움이 많았고, 선교사들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말할 수 없었다. 김영진 선교사가 총회파송 선교사였지만, 생활비는 부산노회가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들의 협조가 여의치 않을 때 그 재정에 대한 책임은 선교부장이었던 한명동 목사와 부산남교회의 몫이었다.

한명동 목사는 1967년과 1970년에 각각 한 달 동안 대만 선교지 시찰을 다녀왔는데, 김영진 선교사는 그의 강력한 후원자이면서 개인적인 가정사와 선교지의 고충을 토로할 정도로 멘토였다. 김영진 선교사는 한명동 목사가 영도교회를 목회할 당시 신학생이었고, 온 가정이 영도교회에 출석한 바 있었다. 그는 1960년부터 은퇴 후였던 1983년까지 28년 동안 총회선교부장으로 봉사하며 총회 선교의 기초를 놓았다. 이러한 장기사역은 당시 고신교회의 선교에 대한 관심 부족과 열악한 재정상황으로 부산남교회가 그 짐을 상당부분 졌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부터 총회선교부는 선교카렌타를 공급하며 선교비를 조달하기도 했는데, 총회선교부는 사무실을 1970년대 중반 부산남교회당에 개설해 1980년대 중반 초읍으로 옮기기까지 총회선교부의 재정부담을 경감시켰다.

 

5) 부산남교회와 연합운동

부산남교회는 초기 30년 동안 고신교회와 부산의 대표교회로서, 고신교회 연합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 활발했던 국제적인 신학교류가 이루어졌는데, 외국 교수들이 고려신학교를 방문할 때 신학강좌를 개설하거나 설교차 부산남교회 강단에 섰고, 성도들은 그들의 설교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 1956년대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가 주최한 고신교회 진리운동 10주년 부흥회를 비롯하여(1956. 9. 3), 반틸박사 특별강연회(1960. 6. 14-16), 골든신학교 샤플 교수(1965. 4. 4), 일본 호시노 목사 연합예배(65. 4. 12), 헤리스 교수 집회(65. 7. 18), 일본 야마구찌 하사오 여사 연합집회(66. 5. 29)등이 열었다.21)

이 시기에 부산남교회는 고신교회의 인재양성의 모판이기도 했는데, 신학교에 입학하는 우수한 인재들이 부산남교회에 부교역자로 초빙되었고, 한명동 목사의 리더십 아래 훈련을 거치면서 교단의 중심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또 1960년대 이후는 김진경, 박성복, 이근삼 등 신학교 교수들을 협동목사로 초빙하여 대학생들을 지도하게 함으로써 교수들의 사역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교회에 속한 대학생들이 일찍부터 수준 높은 신앙과 신학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4. 부산남교회 설립 30주년과 1980년 초의 부산남교회

부산남교회는 초기에 견실한 성장으로 고신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다양한 집회를 개최하여 고신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고향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부산남교회는 고신교회는 물론 한국교회 안에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빛나는 봉사를 하였다. 부산남교회는 초기 30년 동안 고신교회의 본부와 모교회로서 고신교회를 위한 봉사로 기력이 많이 소진되었다. 끊임없었던 교단적 봉사에 예배당 관리에 재정적인 지출이 많았고, 연말이면 당회원들과 제직들이 특별헌금으로 재정 결손을 메우는 일이 계속되었다. 이같은 부담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한명동 목사의 비전과 교단 섬김의 정신을 알았던 평신도 지도자들의 협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부산남교회는 1970년대에 와서 교회의 미래를 위해 다시 힘을 결집해야 했고, 1972년에 교회당 신축을 위한 건축기성회를 발족하여 이듬해 3월 본당 신축을 결의하였다. 건축위원들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신축교회당을 견학하기도 했지만 건축이 의의치 않았다. 교회 자리에 이웃한 대지를 구입해 신축을 하려고 시도하였고, 교회 앞 교육관을 헐고 건축하기로 해 추진하던 중에 동대신동 임야 12,000평을 구입하여 이전, 신축을 추진했지만, 이 일도 여의치 앉았다. 결국, 한명동 목사가 은퇴를 앞두고 1979년 9월에야 교회 앞 교육관 건물을 헐고 5층 교육관 기공을 하여 1980년 5월에 준공하였다.

부산남교회는 설립 30주년을 기념하여 5월에는 청년신앙운동 주최로 부남체전, 꽃주일 교회 장식, 문서전 및 사진전. 성경암송대회. 성극을, 연말 12월 4일에는 한명동 목사 은퇴식에 맞추어 고려신학대학장 이근삼 박사를 강사로 하여 ‘남교회의 미래상-어제와 내일’ 기념강연회를 가졌고, 30주년 기념 만찬회, 이어 설립 30주년 기념예배와 원로목사 추대식과 신명구 목사 위임식, 그리고 간담회를 가졌다.22) 설립자 한명동 목사가 30년의 시무를 마치고 정년 은퇴하고, 제2대 담임으로 신명구 목사가 취임하면서 교회 역사는 전환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회의 미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둘로 분리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동안 교육관 준공이 있은 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던 교회당 건축 문제를 교회의 미래와 연관하여 논의하면서 날로 쇠락하는 부산 도심을 떠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교회당의 넓은 부지에 벧엘맨션과 교회당 건축이 함께 추진되었고, 1980년 말부터 시작된 교회당 이전 논의는 3년만인 1983년 추수감사절을 기해 지금의 거제동으로 이전하였다.23) 그러나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많은 성도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떠난다는 것에 불편함을 가졌던 이들은 힘을 쏟아 교육관을 건축한 직후라 이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함께 합류하지 않았다. 한명동 목사는 이들을 설득해 그해 성탄주일에 교회 합류했지만, 부산남교회 당회는 합류이전 1983년 12월 14일 당회에서 교회 분리에 책임이 있다고 여긴 이들의 시벌을 결의하였고, 이들이 합류하였던 성탄주일에 이를 공표함으로써 마음이 완전히 나누어지고 말았다. 교회당 이전 과정에 겪었던 초기의 갈등과 불신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중부산노회는 부산남교회수습전권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두 교회가 하나가 되기 어렵다고 보고 1984년 5월 12일 남교회의 ‘정상을 참작하여 당회에서 시벌을 취소하고’ 이들의 이명증을 교부함으로써 교회가 완전히 분리되었다.24) 나누어진 제일남교회는 1984년 5월 27일 고신대학 강당에서 설립 예배를 드렸고, 8월 30일 부산노회에서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12월 2일 대청동에서 입당 예배를 가졌다. 한명동 목사는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도 책임이 없지 않다고 보고 원로목사직을 사임하였으며, 교회가 제공하는 원로목사의 예우를 받지 않았다.

부산남교회는 교회 분리로 인해 교세가 약화되었고, 적은 성도들로 초대형 교회당 건축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교회는 그후 ‘12년간의 각고의 노력으로 1995년에 본당 2층과 중3층으로 3,750석의 예배당이 완공되었다.’25) 그러나 이 때는 교회가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난 후였다. 부산남교회는 새교회당 건축이 완공된 이듬해(1996) 제3차 세계선교대회를 유치하기도 하였지만, 이전과 같은 고신교회나 부산의 대표교회로서의 위상을 회복하지 못했는데,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맺는말

부산남교회 설립 70주년을 보내며 교회의 초기 30년의 빛나는 역사와 정신을 살펴보았다. 첫 30년의 역사 동안 부산남교회는 고신교회에서 자라던 학생들은 물론 고신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고향과도 같았다. 지상의 교회는 교회마다 고유한 역사와 특성을 가지고 있고, 한 때 빛나게 쓰임 받아도 시대마다 그 모습을 달리한다. 교회는 본질에 충실해야 하고, 교회의 역사적 전환기에는 지도자가 교회의 본질에 기초하여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따라 성도들을 하나로 엮어낼 수 있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계속하여 쓰임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1980년대 초기의 부산남교회의 분쟁의 역사는 교회의 힘을 약화시켜 본질적인 사역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며 미래를 준비할 수 없게 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중기 역사를 볼 때 교회의 미래를 전망하며 기도하며 준비한 계획에 모든 성도들이 협력하지 못한 것도 아쉽고, 나뉘었던 형제들이 하나 되기 위해 다시 찾아온 것을 교회분열의 책임을 물어 징계한 것도 아쉽다. 교회의 첫 30년 동안 부산남교회는 고신교회와 부산지역 교회에서 빛나는 역사를 기록했다. 그러나 전환기에 있었던 분열의 역사는 1970년대 중반의 고신교회 분쟁의 역사만큼이나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미주

1) 《한부선 서간집 4》 서울: 키아츠, 2018. 한부선의 1948. 3. 3자 편지

2) 부산남교회 홈페이지, www.namchurch.or.kr. 2019. 4. 20. 인출.

3) 이는 박윤선 교장으로서도 본격적인 목회를 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주일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아,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

4) 이상규, “한명동 목사와의 대화(2)”, 《기독교보》 2011. 2. 26.; 《한명동 목사와 개혁주의 교회건설》, 서울: 생명의 양식, 2011. 260-273.

5) 한명동 목사 친필 메모, 부산남교회 설립 30주년 약사. 부산: 부산남교회, 1979. 1.

6) 김용섭, 《제일영도교회 100년사》. 부산: 제일영도교회, 1996, 421-422.

7) 한명동, “옛 선배의 음성을 들으며”, 김요나, 《주기철목사 순교일대기-일사각오》, 서울: 한국교회 뿌리찾기선교회, 1992. 13.

8) 한명동 목사의 친필 메모. 《부산남교회 설립 20년 약사》, 부산남교회, 1969. 5. 11.

9) 《부산남교회 설립 20년 약사》, 부산남교회, 1969. 5. 11.; 《경남(법통)노회 역사자료집(1916-2010)》, 66.

10) 김용섭, 《제일영도교회 100년사》, 424.

11) 《부산남교회 설립 20년 약사》, 부산남교회, 1969. 5. 11.

12) 《부남교보》 창간호(1973. 6. 25), 3.

13) 한명동 목사와의 대화. 《기독교보》 2011, 2. 26.

14) 이 일에 부산남교회 박봉화 장로와 주태화, 주영문 장로 및 이성태 집사. 김선애 집사 등의 공이 컸다. 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109.

15) 최훈, “신사참배와 한국재건교회의 역사적 연구”, 김승태,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 문제》,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142.

16) 나삼진, “한명동 목사와 부산남교회와 고신총회”, 《한명동 목사와 개혁주의 교회건설》, 서울: 생명의 양식, 2011. 157.

17) 필자는 대학생 시절 제25회 총회에 부산남교회 찬양대원으로 개회예배 찬양을 담당하고, 제25회 총회에 참관한 바 있다.

18) 나삼진, “한명동 목사와 학생신앙운동”. 《한명동 목사와 개혁주의 교회건설》, 서울: 생명의 양식, 2011. 165.

19) 이근삼, “남교회의 미래상:남교회의 어제와 오늘”, 남교회 설립 30주년 기념 강연회 강의안 5; 이근삼,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교회, 서울: 생명의 양식, 2007, 448.

20) 이상규, 나삼진 외, 《하나님의 주권을 이 땅 위에》, 서울: SFC, 2012, 177.

21) 《부산남교회 설립 20년 약사》, 부산남교회, 1969. 5. 11.

22) 《남교회 설립 30주년 기념》 책자, (1979. 12. 4). 이 책자에는 고려신학대학장 이근삼 박사의 30주년 기념강연회 강연문, 기념예배 순서, 교회 연혁 등이 정리되어 있다.

23) 《부산남교회 이전예배에 관한 세부계획서》, 부산: 부산남교회, 1983. 11. 20.

24) 《부산남교회 당회록》. 1984년 5월 12일.

25) 신명구, “부산남교회 설립 50주년을 감사하며”, 《기독교보》 1999. 5. 1.

 

※참고문헌

《부산남교회 설립 20년 약사》. 부산: 부산남교회, 1969. 5. 11.

《부산남교회 설립 30주년 약사》, 부산: 부산남교회, 1979. 5. 6.

《남교회 설립 30주년 기념(행사 책자)》, 부산: 부산남교회, 1979. 12. 4.

《부산남교회 이전예배에 관한 세부계획서》, 부산: 부산남교회, 1983. 11. 20.

《부산남교회 당회록》, 1984. 5. 12.

《부남교보》 창간호, 1973. 6. 25.

부산남교회 홈페이지, www.namchurch.or.kr.

《경남(법통)노회 역사 자료집(2016-2010)》, 창원: 경남(법통)노회 기독교문화연구위원회, 201-.

김용섭. 《제일영도교회 100년사》, 부산: 제일영도교회, 1996.

나삼진, “한명동 목사와 부산남교회와 고신교회”, 《한명동 목사와 개혁주의 교회건설》, 서울: 생명의 양식, 2011.

나삼진, “한명동 목사와 학생신앙운동”, 《한명동 목사와 개혁주의 교회건설》, 서울: 생명 의 양식,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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