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명의 유명 연예인이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세상살이는 이처럼 힘겹고 팍팍하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혹시라도 살아날 희망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한 걸음마저 내딛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가슴은 절망해 버렸다. 주변 어디를 돌아봐도 절망을 이길 한 줄기 빛은 보이지 않는 듯 삶의 발걸음은 자꾸만 절망의 나락으로 달려간다. 그렇게도 우리를 옥죄는 경제가 절망이고, 경제가 메마른 탓인지 사회가 사랑과 용서의 축복에서 일찌감치 탈선해 버린 것도 절망의 어두운 터널이다. 한더위 지난 때늦은 '삶과 희망의 가뭄현상'이라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내게 묻는다. 살아남은 나는 과연 살아있는가? 절망하지 않고 진정 살고 있는가? 남은 희망의 불씨 한 톨 부여잡고 뜨거운 호흡을 몰아쉬고 있는가? '그래도 나는 아직 살았다'고 말하는, '살고 있다'고 말하는 나에게 자꾸만 깊숙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절망한다. 우리는 너무 손쉽게 포기한다. 우리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희망의 불씨를 꺼뜨린다. 그리고는 길고 긴 변명의 이야기에 자신을 내어맡겨 버린다. 절망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절망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지 않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존 웨슬리가 말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것을,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한 모든 장소에서,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그렇다. 할 수 있는 한 해보자. 할 수만 있다면 최고는 아니어도 최선의 달음박질은 해보자. 그 결과가 메달권이든 아니든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해보자.

이 시대는 절망이 유혹하는 시대다. 절망해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는다. 나 같아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동조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외쳐야 하는 사람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절망에 저항하자. 이왕 던져버릴 목숨이라면 희망을 위하여 목숨을 던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항거하려면 희망을 덮어버리려는 절망과 좌절을 향하여 항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삶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그 어떤 물건이 아니다. 삶은 고귀하다. 내던져 버리기엔 너무 존엄하고 엄숙하다. 당신이 살아있음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망을 볼 수 있는 당신은 위대하다.

"…찬송하리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절망에 흔들리지 말라. 절망하는 일은 우리의 최후 선택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를 다시 살리지도 않는다. 우리는 산 소망의 사람이다. 삶과 희망의 폭우를 기대하면서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달려가야 할 사람이다.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절망의 신발을 희망으로 바꾸어 신은 사람이다.

황형택 강북제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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