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세계 과거 700여 년간 이베리아 반도에서 꽃피웠던
안달루스 왕국 회복을 꿈꾸다

신성주/선교학박사, KPM 주. 라트비아 선교사
신성주/선교학박사, KPM 주. 라트비아 선교사

서바나(Spain)는 사도 바울이 꿈꾸었던 그의 마지막 선교 종착지였었다. 바울은 로마 교회를 베이스 캠프로 삼아 서바나 선교를 계획했었다(롬.15:23-28). “바울이 과연 서바나에 갔었을까?”라는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 논쟁의 여부와 상관없이, 서바나는 결국   기독교국이 되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화되면서 제국에 속해 있었던 서바나도 자연스럽게 기독교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의 마게도냐 환상(the Macedonian Vision, 행.16:6-10)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복음은 결국 로마제국을 통해 지중해의 서쪽 끝 서바나까지  확장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도 비시고트(Visigoth, 5-8세기)족이 지배하던 서바나는 교황청에 충성하는 강력한 기독교 나라로  남아 있었다.

그림1. 비시고트 왕국, AD 700
그림1. 비시고트 왕국, AD 700

 

그러나, 8세기, 우마야드(Umayyad) 왕조의 무슬림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면서 서바나는 이슬람화 되어 약 700여 년간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다행히, 기독교 세력이 부활하여 반도의 재정복 (Reconquista) 운동이 성공함으로써, 드디어 1492년, 마지막 무슬림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 (The Emirate of Granada)이 무너졌다. 그라나다의 무하마드 12세는 그들의 영광이 깃든 알함브라 궁전의 키를 카스틸(Castille)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Aragon)의 페르디난드 2세 국왕에게 넘겨주고 반도를 떠나 모로코로 넘어갔다. 이후로 서바나 지역은 다시 강력한 기독교(카톨릭)국으로 되돌아 왔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 것처럼, 20세기 중반 이후 서바나에는 또 다시 <무슬림 운동>이 꽃을  피우고 있다. 오늘날 아랍 세계는 과거 700여 년간 이베리아 반도에서 꽃피웠던 <안달루스 왕국> (Andalus) 회복의 꿈을 꾸고 있다. 현재 아랍권과 세계 각국에는 레콩퀴스타 이후로 반도에서 쫓겨나거나 추방된 무슬림 후손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선조들이 수 백년 동안 살던 스페인으로 되돌아 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귀향 운동을 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다양한 경로를   통해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무슬림들이 많다. 더 심각한 점은 오늘날 전통과 역사에 무지한 스페인 사람들 중에서 무슬림 안달루스 왕국도 역시 스페인 땅에 존재했던 자기들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서바나는 유럽 이슬람의 전진기지가 되고 있다. 서바나가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화를 다시 막아 내지 못한다면, 바울의 서바나 선교 비전은 유럽지중해 지역에서 사역하는 우리들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 운동과 그 상황을 점검해 보면서 <신(新)-서바나 선교>를 새로운 차원에서 다시 도전하고자 한다. 

본 고의 제1부는 스페인의 이슬람 운동에 관하여, 그리고 제2부에서는 포르투갈의 이슬람 운동에 관하여 다루었는데, 각각 선교적 평가를 덧붙였다.

 

Ⅰ. 스페인의 역사와 이슬람

일찍이 1981년, 뉴욕 타임즈는 스페인에 아랍인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경고음을 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에서는 그 누구도 이를 크게 문제로 여긴 자는 없었다. 새로이 들어선 정부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아랍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11년 2월 4일, 허핑턴 포스트(HuffPost)는 “사회주의 정권 집권 이래 급격히 세속화되고 있는 스페인에서 과거 이슬람의 영광을 재건하자는 살라피스트 운동이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 하에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2020년 현재, NYT가  경고한지 약 40년이 지난 지금, 존재도 없었던 무슬림 공동체는 지하드 운동을 일으키는 과격한 원리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살라피스트들과 함께 과거 8~15세기 스페인에서 영화를 누렸던 무슬림 왕국 <안 안달루스>(Al Andalus) 시대를 회복하려는 야무진 꿈을 펼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스페인 무슬림들은 <알   안달루스>의 후손들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여 ‘안달루시안 내셔널리즘’(Andalusian nationalism)의 부흥을 외치고 있다. 

과거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제국의 영토로써 718년 이슬람화되기 이전까지 그리고 레콩퀴스타 (Reconquista)의 완성(1492) 이래로 언제나 전통적인 기독교(카톨릭) 국가였다. 하지만, 프랑코의 독재(1939-1975)가 종식되고, 사회주의 정권이 자주 집권하게 되면서 가톨릭의 영향력은 많이 약해졌다. 그리고 EU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정책에 따라 이주자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슬림이 증가하고 이슬람이 부흥하는 현상은 더 가속화되어 왔다. 물론,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연맹의 아낌없는 지원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1982년, 당시 사우디의 왕세자였던 살만(Salman)의 후원으로 남부 말라가(Malaga)에 큰 모스크가 세워지고, 1992년에 <마드리드 모스크>가 세워진 이래로, 1990년대에 와서는 스페인 전역에서 모스크 건축 붐이 일어났다. HuffPost에 따르면, 한 때 빌바오 시민들은 모스크 건축 헌금을 요청하는 지역 이슬람 단체의 통지서를 받았다고 한다. 통지서에는 “우리는 과거 우리의 스페인 영토에서 추방됐으며 알라가 지시하는 대로 이 곳을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알 안달루스>의 수도였던 코르도바(Cordoba)의 그랜드 모스크는 리콩퀴스타 이후 가톨릭에 속하여 <코르도바 대성당>이 되었는데, 코르도바를 다시 “유럽 무슬림들의 성지이자 서구의 메카”로 만들기 위해 대형 모스크를 세웠으며(1994), 마지막 무슬림 왕국의 수도였던 <그라나다>에서는 알함브라 (Alhambra) 궁전을 마주 바라보는 언덕에 그랜드 모스크(Mezquita Mayor de Granada, 2003)가 세워졌다. 무슬림들은 그 준공기념식에서 “유럽과 스페인에 이슬람의 회귀와 부흥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요 역사적 신기원”이라고 평가하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스페인에는 단 한 개의 모스크도 없었다. 하지만, 2018년까지 13개의 대형 모스크(Mega Mosque)들이 세워졌고, 전국에 약 1500여 개의 모스크들과 이슬람 센터들이 생겨났다. 1990년에 20만 정도이던 무슬림 인구가 2018년에는 거의 200만 명에 육박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1세대 안에 거의 10배가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 내에 있는 모스크들 중 약100여 개가 과격적인 살라피즘의 이슬람을 가르쳐 왔고, 그들은 자체적인 무슬림 종교 경찰을 조직하여 암암리에 무슬림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는 것도 발견되었다. 스페인 정보 당국은 100여 건의 무슬림 테러 모의를 사전에 적발하여 방지했다고 보도하였다.

스페인은 1975년 프랑코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 1982년 이래 3, 5대 총리가 <사회주의노동자당> 출신들이었다. 제4, 6대 총리는 <인민당>(People’s Party)이었지만 중도우파이다. 현재 제7대 총리는 사회주의노동자당 대표(2014-2016) 출신의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 2018~ )인데, 그는 2018년 6월 2일 취임하자마자 (무슬림) 불법이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스페인에서 무슬림의 증가로 이슬람이 부흥하는 것은 사회주의 정권들이 EU의 다문화주의 정책을 넘치도록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점과 아랍 이슬람 국가들의 지원들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하지만, 최근 심각해진 무슬림 테러와 이슬람 부흥으로 인해 유럽의 많은 학자들이 이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보니, 스페인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1. 이슬람에게 점령당했던 이베리아 반도(711-1492)

이베리아 반도는 일찍이 로마제국에 속한 땅이었지만, 로마의 멸망과 함께 5~8세기 초까지 서고트족(Visigoths)이 지배하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반도의 종교는 기독교로 통일되어 있었다. 하지만, 711년, 무슬림 우마야드(Umayyad) 칼리프의 침략에 의해 로데딕 왕(King Roderic)이 전사하고 기독교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무슬림들은 <알-안달루스>(Al-Andalus)라 불리는 <코르도바 칼리프국>(the Caliphate of Cordoba)을 세웠다. 그들은 북진하여 718년에는 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였으며, 그 후 파리를 점령하기 위해 더 전진하였으나 <뚜르 전투> (732)에서 <칼 마르텔>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후 다시 피레네 산맥 남쪽 반도로 물러났다. 

그림2. 무슬림 안달루스 왕국, 718
그림2. 무슬림 안달루스 왕국, 718

무슬림 지배하의 이베리아 반도는 디마(Dhimma) 즉, “이슬람의 보호를 받는 땅”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인들은 디미(Dhimmis)들로써 “이슬람의 보호를 받는 이교도들”이 되었고, 인두세를 내면서 정치-  사회-경제적 차별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 그래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개종을 해도 아랍 무슬림들과 동등한 신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종종 폭동이나 반란들이 일어났지만 무참히 진압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참수되었다. 다행한 것은 시간이 흐름과 함께 무슬림 사회 안에서의 분열이 깊어져 여러 분봉왕국으로 나누어지면서 기독교를 탄압할 힘이 점점 약해져 갔다는 점이다.

 

2. 레콩퀴스타(Reconquista) 완성 이후 카톨릭 제국하의 무슬림들

이베리아 반도의 운명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반도는 718년에 무슬림에게 완전히 정복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718년(혹자는 722년), 북부 산악지대 코바동가(Covadonga)에서 펠라요(Pelayo)라는 지도자가 등장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켜 무슬림군을 무찌르고 기독교 자치 지역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펠라요는 멸망한 서고트족 왕국의 로데릭 왕의 신하로써 귀족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왕은   전사하고 나라는 뺏겼지만, 그는 북부 산악지대에서 기독교 농민들을 규합하여 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펠라요는 북쪽 해안에 이르는 지역들을 확보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The Kingdom of Asturias)을 건설하고 무슬림과는 평화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점점 더 남하하면서 빼앗긴 땅을 회복하는 ‘리콩퀴스타’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시간이 지남과 함께 반도의 북부에는 레온(Leon), 카스틸(Castille), 아라곤(Aragon), 나바레(Navarre)와 같은 기독교 왕국들이 잇달아 세워지면서 무슬림들을 남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10-12세기에는 <안달루스>의 황금기를 맞이했으면서도 계속된 분열로 힘을 잃기 시작했다. 모로코의 <알모라비드>와 <알모하드> 왕조가 일어나 굳건히 지키는 듯 했으나, 결국, 톨레도(1085), 사라고사(1118), 코르도바(1236), 세빌(1248)이 연이어 무너지면서 남쪽 해안의 조그만 <그라나다 왕국>만 남게 된다. 드디어, 1492년, 약 10년간의 전쟁을 통해 그라나다 역시 항복하게 되면서 <알함브라> 궁전의 열쇠는 카스틸의 이사벨라 1세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세에게 넘겨주고 반도를 떠나게 된다. 이로써 약 770여 년간의 길고 긴 리콩퀴스타의 역사가 완성되었고, 이베리아 반도는 완전히 기독교 왕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라나다 정복 이후 <카스틸>에는 약 50만의 무슬림들이 살았었지만, 10여만 명은 전쟁과 함께 죽었고, 20여만 명은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며, 20여만 명 정도가 회복된 기독교 카스틸 왕국에서 살았다. 아라곤의 수도 사라고사의 인구의 25%가 무슬림이었고, 발렌시아 인구의 30%가 무슬림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카톨릭으로 개종하거나(Moriscos), 추방되거나, 개종하지 않은 채(Mudejar) 차별 속에서 살게 되었다. 기독교 토착 스페니아드들은 ‘모리스코스’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과거에 그들이 무슬림들에게 받았던 것과   같이 그들을 차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폭동과 반란을 일으켰다. 

그림3. 연대에 의한 기독교 레콩퀴스타 반도
그림3. 연대에 의한 기독교 레콩퀴스타 반도

 

결국,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가짜 개종자들을 가려내기 시작했고, 적발된 자들은 즉시 추방되었으며, 반란 가담자들은 사형을 당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의 잔재를 지워감으로 인해 무슬림들은 모로코와 오스만 터키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대대적인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카톨릭 제국은 왕명으로 아랍어를 금지하였고, 모든 아랍어로 인쇄된 책들을 불태우게 했으며, 모스크들을 없애거나 교회로 바꾸었고, 이슬람교 자체를 불법화시켰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추방된 자들이 스페인으로 되돌아 온 자들도 많았고, 결국엔 19세기 초엽부터 무슬림 노예들도 다 해방되어 시민으로써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이슬람이 합법적 종교가 된 것은 아니었다.

 

3. 프랑코 독재 시대(1939-1975)의 무슬림

1931년, 알폰소 8세 국왕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연방제를 주장하는 다양한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퇴위되어 귀양을 갔다. 그리고, 과도 정부가 발표한 1931년 새 헌법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귀족들의 특권을 없앴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에게 주어진 특권들을 폐지하였고, 카톨릭을 거의 와해시키는 수준의 통제 조항들을 담았다. 그리고, 나라를 많은 연방정부로 나누는 의논들을 하기 시작하였다. 1936년에 소련의 후원을 받는 <인민전선당>(Popular Front, PF)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은 여러 장군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시민 전쟁>(1936-1939)의 승리로 정권을 잡은 그는 왕정을 복고하였고, 카톨릭과 보수주의를 반대하는 공산-사회주의자들을 몰아내었으며, <스페인 민족주의>(Spanish nationalism)를 강조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카톨릭 국가로 세워갔다. 그는 그 어떤 지방분권적 이념들을 허용치 않았다. 

 

그림4. 블라스 인판테
그림4. 블라스 인판테

그의 집권 전반기 동안 스페인에는 이슬람 집회가 허용되지 않았고, 단 한 개의 모스크도 세워지지 않았다. 더구나 프랑코는 블라스 인판테((Blas Infante, 1885-1936)를 제거하였다. 블라스 인판테는 ‘안달루시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데, <안달루시아 민족주의> (Andalusian nationalsm)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안달루시아의 자치 정부 획득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말라가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부터   무슬림 <알-안달루스 왕국>의 역사와 문화에 심취하였다. 그는 그의 고향 지역이 옛 안달루스 왕국의 역사와 문화가 깃들인 곳이라는 점에 빠져서 결국 자기 속에는 안달루스의  정체성이 내재해 있다고   믿었다. 그는 1913년에 결사체를 만들어 스페인을 여러 개의 자치 정부를 가진 연방 공화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고향지역 즉 남부 해안지역에 <안달루시아> 자치 정부를 세우고자 하였다. 1918년에는 <안달루시아 지방 총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는 직접 안달루시아 국가 깃발을 디자인하여 만들었고, 안달루시아 애국가도 만들어 불렀다.  그는 모로코를 방문하여 이슬람 신앙을 고백하여 무슬림이 되었다. 그는 작가요 정치가이기 이전에 혁명가였다. 그는 결국, 시민전쟁 중에 세빌을 점령한 프랑코 장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나라를 분할하려는 연방주의자요 사회주의 운동가로 정죄되어 총살당하였다. 

그러나 1964년, 프랑코는 비-카톨릭 종교의 존재를 공식 인정하는 법률을 발표한다. 그리고 1967년에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률도 발표한다. 그러나 수 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드디어 1971년 최초로 이슬람 학생들로 구성된 <스페인 이슬람협회>(The Islamic Association in Spain)가   공식 등록이 되었다. 1492년에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하고 반도를 떠난  이후 479년 만에 인정된 첫 이슬람 조직이었다. 그 협회는 몇 년 안에 말라가, 마드리드, 오비에도, 사라고사, 발렌시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스페인 사회에는 아직 이슬람의 활동은 거의 인식되지 않는 단계에 있었다.  

 

4. 프랑코 독재 이후 <사회주의 노동자당> 시절 무슬림의 부흥 (1976-1985)

1975년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하자 보수주의자들과 카톨릭의 힘은 다시 급격히 약해졌다. 반-카톨릭적이고 반-중앙집권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1976년, 아랍 18개국 대표단이  마드리드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과도 정부와 아랍-스페인 관계 증진에 합의하였고, 마드리드에 <이슬람 센터>를 건립하는 것에 합의하여 20,000 평방미터의 땅을 제공받았다. 사우디 기반의 Muslim World League(MWL)가 중심이 되고, 이슬람 45개국에서 840명의 건축가들이 동참하여 453개의 프로젝트를 실행하여 이슬람 센터 건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실로, 아랍 세계는 스페인에서의 안달루스의 회복을 꿈꾸면서 한 마음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와 시민들의 반대 정서들로 인해 실제 건축은 1991년에 시작된다.

민주주의를 향한 2년여의 과도기가 지난 후 1978년에 새 헌법이 발표되었다. 이 헌법에서 스페인은 어떤 종교와도 특별한 관계가 없으며, 모든 종교와 협력한다고 하였다. 또 이 헌법에 따라 스페인은 17개의 자치주로 나뉘어 지방분권 시대로 들어갔다. 남부 해안지역에는 <안달루시아 자치주>가 생겨났다. 블라스 인판테의 꿈이 그의 사후에 성취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방분권주의를 강조하는 사회주의  노선의 정당이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블라스 인판테가 만들었던 깃발과 노래는   <안달루시아> 주정부의 공식 깃발과 노래가 되었고, 그는 ‘안달루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아버지’로 재조명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동상도 세워졌다. 깃발의 바탕은 녹색과 흰색으로 되었는데, 녹색은 아랍의 색깔이고, 흰색은 모스크의   흰 탑을 상징한다. 깃발의 중앙에 있는 문장에도 두 흰 기둥은 모스크의 미나렛(탑)을, 녹색 지붕과 기단 역시 아랍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림5. 안달루시아 자치주의 깃발
그림5. 안달루시아 자치주의 깃발

블라스 인판테는 옛 안달루스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무슬림들에게 추앙받는 존재가 되었으며, 그의 안달루시아 민족주의는 이슬람 안달루스 왕국 회복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 또한, 스페인 밖 아랍 연맹하의 이슬람국들은 그들의 영화가 깃든 <알-안달루스 왕국>의 땅이 <안달루시아> 라는 이름으로 자치주를 가지게 되어 대단히 고무되었으며, 디아스포라 무슬림 안달루시안들의 “귀향”을 자극하였다. 무슬림들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자치주가 무슬림 <안달루시아 왕국>이 되는 것을 꿈꾸고 있다. 

무슬림 단체들은 활발한 활동들을 전개하였다. 그 해 1978년,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이슬람 센터> (The Islamic Center in Spain)가 창립, 등록하였고, 이어서 <코르도바 이슬람협회>가 등록하였다(1980). 1981년, <스페인이슬람선전협회> (Religious Association for the Propagation of Islam in Spain)라는 단체가 등록하였다. 그들은 이미 1977년에 몇 명의 청년 무슬림들이 스코틀랜드로부터 그라나다로 파송되어 와서 그라나다와 안달루스의 회복을 위해 미등록 단체인 <스페인 이슬람회복협회>(Association for the Return of Islam to Spain)를 조직하였었다. 1982년, 사우디 왕세자 살만(현 국왕)의 지원으로 최초의 모스크가 말라가에 건립되었다. 이제 실로 무슬림들은 노골적으로 안달루스의 회복을 향한 그들의 꿈을 현실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림6. 마드리드 이슬람 센터
그림6. 마드리드 이슬람 센터

1982, 세빌에서 <Yamaa Islamica de al-Andalus>(YIA)가 등록하여 여러 도시에서 이슬람 문화 행사들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YIA는 1984년 1월, 카톨릭 교회 주관으로 매년 열리는 <그라나다 회복   기념축제> 행사를 반대하는 데모를 벌였다. 결국, 사회적 문제가 되어 이 행사는 무슬림들을 배려하는 다른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또, YIA는 안달루시아에서 국제적인 무슬림 컨퍼런스들을 연이어 개최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5. 스페인의 EEC(EU) 가입(1986) 이후의 무슬림

1986년은 스페인의 무슬림들에게 역사적인 해였다. 스페인이 EEC에 가입하게 되면서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유럽의 가치들을 공유하게 되고, 유럽의 이주민법(Immigration Act)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89년, 스페인 정부는 결국 이슬람을 “notorio arraigo” 즉, 스페인에 ‘깊은 뿌리를 가진 종교’(deeply rooted religion)로 공식 인정하였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그 해 <제1회 안달루시안 국제대회>(The 1st International Congress of Andalusians)를 열어 전세계로 흩어졌던 알-안달루스의 후손들이 모여 큰 잔치를 가졌다. 

1992년에는 <스페인 이슬람협회>(The Islamic Commission of Spain)가 발족하여 무슬림들의 인권과 “특권”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종교시설을 가지는 것뿐 아니라, 스페인내의 이슬람 세습재산들의 보존권도 받게 되었다. 또, 모스크들이 각 도시마다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1992년에 마드리드 모스크를 시작으로, 1994년엔 <코르도바 모스크>가 건축되었다. 이 모스크에서는 25명의 학생들과 함께 <이슬람 대학>(Universidad Islamica International Averroes de al-Andalus)이 시작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스페인에는 단 한 개의 모스크도 없었지만, 1996년에 벌써 150개가 되었고, 그 중에 50개는 안달루시아에 세워졌다. 2003년, 알함브라 궁전을 마주보는 언덕에 <그라나다 그랜드 모스크>(The Grand Mosque of Granada)가 세워졌을 때, 아랍 신문들은 그라나다 함락 500여년 만에 다시 그랜드 모스크가 세워진 것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세속 자본주의 유럽 시스템을 향한 새로운 희망이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하면서 흥분하였다. 

2017년, 프랑스의 뉴스 잡지 <Current Value>(Valeurs Actuelles)는 스페인에서 이슬람이 부흥하는  현상을 “조용한 정복”(the quiet Conquest)이라고 하면서 스페인이 이슬람 문화센터, 대형 모스크들, 현지인들의 개종, 경제적 투자 등을 통해 조용히 “재이슬람화”(re-Islamizing)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2018년 5월 통계에 의하면, 스페인에는 1588개의 예배처소가 있고, 약 1500개의 모스크가 있으며, 그 중 13개는 대형 모스크들이다. 지금 스페인의 무슬림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써 전체 인구의 4.27 %이며, 무슬림 인구의 41%가 시민권자들이고, 나머지 59%는 아직 서류 미비 이주자들이다. 서류미비 이주자들 중 2/3는 모로코 출신이다. 현재 무슬림들은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안달루시아,   발렌시아 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매년 20%의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스페인 정보국에 의하면, 사우디, 모로코, UAE, 카타르, 쿠웨이트 등이 많이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1994년에 알 카에다의 지부가 스페인에 세워졌고, 10년 뒤 마드리드 지하철 폭파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이슬람에 대한 스페인의 반응
스페인에서 이슬람은 199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스페인 사회에서도 조금씩  이슬람에 대한 긴장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터진 <9/11 테러> 사건은  서구 세계로 하여금 이슬람에 대해 크게 우려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스페인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긴장이 고조되게 하였다. 그 긴장은 모스크들이 세워진 대도시들에서 더 고조되었다. 결국, 2004년 3월 11일, 마드리드에서는 연쇄 폭발테러 사건이 일어나 열차가 전복되고 200여명이 사망하고 2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결국, 스페인에서도 anti-Mosque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슬람공포증’ (Islamophobia)과 함께 무슬림들을 향한 적대감이 상승하게 되었다. 그래서, 2009년에는 “예배처소에 대한 법률안”(Law on centers of Worship)이 통과되었는데, 이미 등록된 교회나 모스크 외의 빌딩이나 집에서 종교행사를 하려면 그 건물에 대해 종교행사 허가를 받아야만 하게 되었다. 이 법률은 비밀리에 모여 과격주의 살라피즘을 가르치는 무슬림들 때문에 생겨났지만, 개신교를 포함한 모든 종파들에게도 같은 영향을 끼치는 파급효과를 만들어 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2017년 8월, 카탈로니아(Catalonia) 지방의 주도인 바르셀로나에서 연쇄   폭탄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카탈로니아는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고, 특히, 바르셀로나는 유럽 최대의 관광지역이어서 많은 무슬림 이주자들이 정착하려고 몰려드는 곳이다. 무슬림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는 곳인데, 동시에 현지인들의 반-무슬림 정서가 가장 강한 곳이기도 하다. 지역 모스크가 약 50여 개나 되는데, 그 곳들에서 이맘들에 의해 원리주의를 교육받은 2세 청년 무슬림들이 테러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더 무슬림들에 대한 안일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슬림들의 문제
스페인 무슬림들의 증가는 빠르지만, 그들에게도 문제들이 많다. 우선, 내부적으로 스페인 무슬림들은 하나가 아니고 다양한 그룹들이 있다. 오래된 안달루스의 후손들, 최근 다양한 나라들로부터 유입된 이주자들, 그리고 현지에서 개종한 스페니아드 무슬림들이 있다. 그들의 성향 또한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의견들이 상충되고 있다. 외부에서 들어 온 무슬림 그룹들은 대부분 과격하고 원리주의적이며 스페인(유럽)의 문화와   가치를 부정하면서 사회-문화적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아니, 통합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 안달루스 왕국 시절처럼 자기들이 유럽을 점령하려고 한다. 반대로, 개종한 유럽   무슬림들은 유럽적 가치 속에서 공존하는 온건한 이슬람을 추구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간격은 메워지기가 어려운 난제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Ceuta와 Mellilla 상황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그림7. 마드리드 열차폭파 테러, 2004
그림7. 마드리드 열차폭파 테러, 2004

 

6. 요약과 평가

스페인에서 이슬람이 다시 부흥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들이 겹쳐져 있다.

첫째로, 가장 큰 동기는 강력한 보수 우파 정권이었던 프랑코 시대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의  정권이 그의 사후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후계자들을 잘 준비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둘째,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등장은 스페인을 아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버렸다. 그들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여 <안달루시아>라는 이름의 지방자치주를 만듦으로써 <안달루시아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였다. 또한, 아랍권과 밀착관계를 발전시켜갔다.

셋째, 정권을 잡은 사회주의자들은 철저한 세속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카톨릭의 전통적 지위를 제거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기독교(카톨릭)의 독점적 지위를 와해시켰다.

넷째, 스페인의 유럽연합 가입 이후 종교적 다원주의, 인권, 난민정책, 다문화주의 정책 등으로 무슬림 이주민과 난민이 급속도로 증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무슬림 <안달루스 왕국>의 회복을 꿈꾸는 아랍 세계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여섯째, 무슬림 <안달루스 왕국>의 자산들이 현존하는 상황에서 스페인 사회는 그들의 역사에서의 이슬람의 위치를 부정하는 논리를 개발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유산과 문화를 찬양하였다.

일곱째, 이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더 치명적인 것은 그들의 역사 인식의 약화와 스페인인으로서의 정체성 약화이다. 그들의 기독교적 전통은 지난날의 역사일 뿐이고, 무슬림의 통치를 받던 악몽 같은 시절도 지난날의 악몽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해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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