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개인전 갖는 휠체어 화가 탁용준씨

아름다운 신부, 꽃, 피아노, 새, 나무, 소년….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보고 있자니 정감이 넘치고 웃음이 묻어난다. 문득 순수함을 그리는 작가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제가 좀 많이 망가졌어요. 하하하." 서울 목동에 위치한 26㎡ 남짓의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도우미가 옷가지를 여며주고, 주변 정리를 마친 뒤에야 작가와의 유쾌한 인터뷰를 시작했다. 6∼11일 서울 양천문화회관 전시실에서 다섯번째 개인전을 여는 탁용준(48·사랑의교회 집사)씨. 의학적으로 그는 24시간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척수장애인이다. 그는 오른손 둘째·셋째 손가락 사이에 붓이나 연필을 끼우고 테니스 아대로 손가락을 고정한 뒤 작업을 한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잖아요. 궁하면 다 방법을 찾아 살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펜을 고정해서 컴퓨터 자판도 치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보냅니다." 그의 20대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든든한 직장에다 믿음의 배우자를 만나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가던 그였다. 1989년 여름, 임신 4개월의 아내 등과 함께 수영장에 놀러 갔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수심이 얕은 수영장에서 다이빙을 하다 경추에 치명적 손상을 입은 것. 폐에까지 물이 차 처음 찾아간 병원에서는 아예 살 가망이 없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세브란스병원에서도 뇌손상이 심해 살아도 장애가 심할 것이라고 했다. 병원에 누워있던 8개월을 그는 '악몽같은 터널'이라고 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특히 괴로웠다. 갓 태어난 아들 융(19)을 볼 때면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하루는 가족의 얼굴을 보는데 한 명도 웃지를 않는 거예요. 제가 사고를 당한 이후 모두 웃음을 잃은 것이지요. 그들은 제가 입을 다물면 같이 말을 안 하고, 제가 웃으면 그제서야 함께 웃었습니다. 장애인은 저 하나면 되는데, 저로 인해 가족 모두 장애인이 되어 갔어요. 그때부터 뭔가를 해보자고 결심했지요." 전신을 못 쓰니 입으로 그림을 그려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구족화가를 찾아가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화가를 만나고 돌아와 많이 울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데 제가 손은 못 써도 어깨는 약간 움직일 수 있었거든요. 재활도 되겠다 싶어 그때부터 어깨를 이용해 손가락에 연필을 끼고 선 그리는 연습을 했지요." 그림은 91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렸다. '섬김의 화가'로 유명한 박영 목사를 만나 5년간 지도를 받았다. 탁씨의 작품이 따뜻하고 순수한 데는 스승인 박 목사의 영향이 컸다. 그림을 시작한 지 4년만에 탁씨는 장애인미술대전에 입선했고, 이를 계기로 전문 작가로 거듭났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아내와 융에게 "10년 뒤 개인전도 열겠다"고 약속했다. 2000년 첫번째 개인전을 통해 마침내 그 약속을 지켰다. 그의 왕성한 창작열은 끊이지 않았다. 장애인전, 한국미술인선교회 협회전, 빛그림 회원전 등의 그룹전과 함께 3년마다 개인전을 꾸준히 열었다. 2004년에는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에서 우수상도 받았다. 올 봄에 이어 또다시 전시를 준비하는 그는 노래하는 신부의 모습을 새롭게 그렸다. 20년 동안 자신을 수발해온 아내 황혜경(47)씨를 화폭에 담은 것이다. 예수님의 넉넉한 품을 그린 '이만큼 사랑해', 나무 새와 어린 소년의 순수함을 표현한 '공중나는 새를 보라' 등 40여점이 내걸린다. 탁씨는 아내와 함께 최근까지 세브란스병원에서 복도찬양을 인도했다. 아내는 찬양을 부르고 탁씨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10년간 상담을 해온 것이다. "병원에 있어 보니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확 다르더군요. 믿음의 사람은 역경 속에서도 꿈을 찾고 기쁨을 발견하려고 애써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병원 한쪽에 모여 담배를 피우고 신세를 한탄하지요. 그들에게 저를, 또 나의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알려주고 싶어요. 욕심을 버리고 모든 걸 포기할 때 행복해진답니다." (국민일보제공 글·사진=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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