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의 성숙은 사람에 대한 이해에 비례한다. 이것은 짧지 않은 목회 경험에서 쌓인 인생관이다. 지식의 높이나 인생의 연수가 결코 인격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경험적인 진리다. 신문의 냄새나는 기사 주인공들 가운데 높은 학식과 연륜을 자랑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견박식(淺見薄識)이라는 말이 있다. 얕게 보고 엷게 안다는 뜻으로 요즘 우리 사회를 단적으로 풍미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지금 전세계를 휩쓰는 경제 위기보다 우리 사회를 더 위태롭게 하는 것이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넘쳐나는 천박성, 특히 인간 이해에 대한 천박성이다. 이것의 결정적 증거는 인터넷의 엄청난 악성 댓글들, 소위 악플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생산되는 악플의 양이나 저질성은 감히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악플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몰이해요, 그 뿌리는 유물론적 사고다. 사람을 계량적 가치로 평가하고, 인간의 정신 현상을 물질적 작용으로 전락시켜 비인격적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예의나 죄책감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악플러들이 인격 살인도 서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대방의 영혼을 찢고, 정신을 처참하게 난도질하고도 어둠 속에서 포악한 웃음을 짓는 것이 악플러의 모습이다.

여기에 대해서 사회는 심리학자나 윤리학자 심지어 정치인들까지 합세하여 수많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악플의 근원적 해결책이 있다면 한 생명을 천하보다 낫게 여기는 유신론적 신앙관뿐일 것이다.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기꺼이 십자가의 제물로 올려놓았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에게 어찌 다른 사람에 대한 몰이해와 천박성이 뿌리내릴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교회의 건강성이 바로 사회를 책임지는 열쇠임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최근에 온 국민을 망연자실케 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예인들 기사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교회라는 말이 들어가고 있다.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목회자로서 심히 민망함과 자책감으로 가슴이 터질 지경이다. 그리고 목사로서 선포하는 복음의 본질과 능력이 어떠한지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피 묻은 복음과, 혼과 영과 관절을 쪼개는 말씀의 능력은 제대로 선포되고 있는가!'

한편으로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고생의 날과 환란의 떡'을 삼키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을 견디고 이기는 비결은 어두울수록 빛을 보려는 노력에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였던 맬콤 머거리지가 인생의 무력감과 패배감, 공허감에 사로잡혀 자살을 기도한 것은 그의 나이 마흔살 때였다. "나는 김빠진 술과 절망감에 취해 누워 있었다. 우주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유일한 위로인 죽음의 환상에 속아 내가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택은 죽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익사를 택한 그는 해변으로 차를 몰아 차갑고 어두운 물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넘기 직전 해변의 반짝이는 불빛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 순간 정신 없이 다시 해변을 향해 필사적으로 헤엄쳤고 "전에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주체할 수 없는 황홀한 삶의 기쁨이 나를 사로잡았다"고 고백했다. 그 후 머거리지는 고전적 자서전인 '잃어버린 시간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의 BC와 AD를 감동적으로 쓰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천박성과 이로 인해 창궐하는 악플들을 해결하는 길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데 있다. 아울러 교회가 건강해질 때 교회는 머거리지가 보았던 해변의 불빛처럼 세상의 광풍 속에서 익사 직전의 사람들조차 삶의 황홀한 기쁨으로 인도하는 빛의 소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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