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의 기억 속에 낡은 현수막처럼 걸려 있었을 뿐...

 

​정주채 목사/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
​정주채 목사/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

 

1950928일은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신 날이다. 그는 피난 권유를 뿌리치고 교회서 기도하던 중에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붙잡혀 가다가 여수 미평동의 어느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셨다. 올해는 그가 순교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회장 이성구 목사)에서는 손 목사를 추모하는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추진 중에 있다. 특히 올해를 손양원 기념관 방문의 해로 정하고 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과 초중고학생들의 방문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기념관 관람이 중단 된 데다 개관이 계속 연기되면서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있다.

 

손양원 기념관

손 목사님의 기념관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전라남도의 여수 애양원에 있고, 다른 하나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에 있다. 여수 애양원은 손 목사님이 한센인들을 위해 특수목회를 한 곳이고, 함안군의 칠원읍은 그가 태어나서(1902) 자란 곳이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구성리교회(현 칠원교회)를 다녔고, 결혼도 칠원에서 했으며(1924), 그리고 그해 10월에 구성리교회에서 집사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19397월에 여수 애양원교회(현 성산교회)로 부임하기 전까지 경상도를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손 목사님의 순교 후 여수 애양원은 한국교회의 성지처럼 되었으나 그의 생애 대부분을 보낸 경상도 지역에는 그를 기념하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다만 고신 총회에서 칠원교회를 손 목사의 순교기념교회로 지정한 바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산돌기념사업회에서는 칠원의 생가터에다 함안군과 국가보훈처 그리고 한국교회들의 후원을 받아 201510월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사실 그동안 손 목사님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원자탄, 순교자 손양원이란 타이틀만 교인들의 기억 속에 낡은 현수막처럼 걸려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한국기독교 역사연구 기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모 기관에서 발행한 한국기독교역사책에는 손양원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손양원 목사를 새롭게 발견하고, 널리 알리고, 그를 본받아 사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손양원 기념관
손양원 기념관

 

한국교회 자랑의 면류관

손 목사님은 그야말로 한국교회의 보배요 자랑이며 면류관이다. 세계기독교 2천 년 역사 속에서 이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어떤 성자들과 비교해도 단연 뛰어난 성자다. 위대한 인물들도 그들의 위대성이 대부분 한두 방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의 뛰어남은 남다르다. 그는 믿음과 경건과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사람이었고 또한 애국자였다.

그는 성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경건한 신앙인이다. 그의 신앙은 말씀대로 믿고 절대 순종했던 살았던 아브라함의 반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릴 만큼 위대한 사랑의 사람이었다. 그는 한센인들의 목회자요 아버지이며 친구였다. 그는 중환자실에 들어갈 때도 전염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복장까지도 거절하고 평상복 그대로 입고 들어가서 환처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병에 걸리기를 바랐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용서와 화해의 성자였다. 그는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다. 역사상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없다. 그는 그야말로 작은 예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구 선생은 손양원 목사야말로 진정으로 공산주의를 이긴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손양원은 또한 애국자였다. 그는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던 인물이다. 그는 1995년도에 정부로부터 반일애국투사로 추서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고귀한 인물이다.

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가 2018sus 6월 23일 경남 함안에 있는 손양원 기념관에서 2018 호국보훈의 달 기념 나라 사랑 음악회 “평화의 하모니 세상에 퍼지다”를 개최했다.
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가 2018년 6월 23일 경남 함안에 있는 손양원 기념관에서 2018 호국보훈의 달 기념 나라 사랑 음악회 “평화의 하모니 세상에 퍼지다”를 개최했다.

 

 

출생과 성장

손양원의 본명은 손연준이다. 연준은 1902년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에서 아버지 손종일과 어머니 김은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당시의 어린이들처럼 일반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문서당을 다니며 공부를 했는데, 그가 한문을 구사하고 한시를 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의 이런 공부가 밑받침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12살이 되었던 19144월에는 칠월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고, 이어 4월에는 서울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부친 손종일 장로가 1919년 칠원읍의 3.1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구속되면서 손양원은 중동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게 된다. 그 후 1921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스가모중학교 야간부 속성과에 입학하여 1923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돌아와 1924117일에 정양순 여사와 결혼하였다.

1909년에 부친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손양원도 자연스럽게 교회(현 칠원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7세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해 1917103일 맹호은(본명 F.J.L. Macra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손양원 목사 흉상
손양원 목사 흉상

 

 

부친 손종일 장로의 신앙

부친 손종일은 나이 38세 때인 19094월에 예수 믿기로 결단하였고, 5월부터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01217일에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그 교회의 집사로 임명받았으며 1919년에는 칠원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런 그의 회심과 이어진 신앙생활은 매우 획기적이고 드라마틱하였다. 그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면서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깎았으며, 그토록 즐기던 술과 담배도 하루아침에 끊어버렸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제사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등의 행동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미친놈이란 욕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기도와 아침저녁 가정예배, 십일조 연보와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지키고 실천하였으며, 전답을 처분하여 구성리교회당을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손종일은 그 교회의 장로였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유지로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칠원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의 옥고를 당했던 애국지사였다.

손양원은 이런 아버지 슬하에서 엄격한 가정교육과 신앙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후에 그의 생애와 사역에 나타난 철저하고 독실한 신앙생활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가정교육의 바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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