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계절 11월을 맞으면서 우리는 감사의 절기를 보내게 된다. 교회들마다 그 형편에 따라 다소 시기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11월은 가장 대표적인 감사의 절기다. 신 개척지의 척박한 삶의 자리에서 눈물로 감사했던 옛 청교도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소박한 삶의 자세가 필요함을 느낀다. 사실 많은 것을 가지고 현재가 자랑스러워야 감사가 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과 같이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그래도 신심으로 사는 사람은 감사할 뿐이다. 존재 자체가 신비이고 믿음 안에 사는 것 자체가 축복이니 말이다. 각박한 생각을 하면 무엇인들 만족스러울 수 있으며 누구인들 마음에 들 수 있을까마는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모든 것이 신비롭고 누구나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번 감사절에는 하나님께 감사함과 동시에 오늘의 우리가 가능하도록 도움과 배려를 베풀었던 많은 이웃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함이 어떨까 싶다.

지난 10월에 있었던 소속 노회모임에 진귀한 손님들이 오셨다. 선교동역 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 장로교회의 시라큐스 노회 대표들이 오셨는데 그 일행 중에 그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한국 어린이들을 입양해 키우고 있는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오신 것이다. 참전용사의 대표 한분은 인사를 통해 "결혼한 지 1주일 만에 신부를 홀로 남겨두고 알지 못하는 나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한국에 왔었다"고 술회했다.

물론 미국의 한국전 참전에 대해 여러 다른 해석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이 전쟁으로 얼마나 큰 정치 경제적 이익을 미국이 남겼는지의 논란이 있음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결혼 1주일 만에 신부를 남겨두고 앳된 스물한 살 청년의 몸으로 이곳에 와서 전쟁을 수행하고, 반세기 만에 다시 이곳을 찾은 그 노병은 분명 우리의 옛 은인이었고 진객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 노병의 회고의 말에 숙연해졌고 옛 시절을 기억하는 회원들은 고마움과 미안함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는 고마운 분들이 한둘이 아니다. 사는 것이 바쁘고 생활이 힘겨워 그 고마운 마음 한번 제대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은 간곤한 삶을 우리가 살아왔지만 그래도 끝내 고마움마저 잊어버리면 우리는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 사는 것이 오죽 힘들고 삶이 각박했으면 그런 말이 다 생겼을까 하여 여유 없었던 우리 옛 삶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 각박함이 도리를 다하지 못함을 정당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경제가 어려워지고 냉엄한 국제 경제의 현실이 도미노처럼 우리를 위협한다. 모두가 움츠러들고 위축되어 여유와 배려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신자유주의 세계질서 아래에서의 생존방식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경쟁을 일상화하고 승자독식의 논리에 빠져들기 쉽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감사의 표현도 돌아올 실익을 계산하며 따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가져올 파괴적 미래를 점치는 것은 쉽지 않다. 배려와 감사의 마음이 무너진 사회는 터가 무너진 사회에 다름 아니다. 옛 시인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고 탄식했다. 이 가을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사랑을 기억하고 오랜 수첩을 꺼내듯 배려와 감사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래야 내가 사람 같은 사람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더욱 그렇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