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으로 흑백 갈등을 넘어 진정한 노예 해방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여야 갈등과 노사 갈등 외에도 불교계와 타종교와의 갈등, 그리고 정도를 넘어서는 감리교 초유의 갈등으로 경제위기보다 더한 내부 분열에 직면해 있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당사자 간에 과연 합의가 가능한 것인가? 더욱이 종교적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는 집단 간에 자신만이 하나님 편이라고 맹신하면서 타협하려 들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중재가 가능할 것인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내 삶에 이정표를 세워주신 성산 장기려 박사님이 떠오른다. 장 박사님을 뵌 것은 내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복음병원에서 인턴 수련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서울의 대학병원을 마다하고 굳이 송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언덕 위에 세워진 자그마한 부산복음병원을 찾게 된 것은 바로 장 박사님이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었다. 영국 케임브리지의대 출신으로 귀국한 뒤 결핵 환자들을 돌보셨던 배도선 선교사님이 제대로 의술을 배우길 원했던 내게 부산복음병원을 소개해주셨던 것이다.

인턴 시절, 지금 네팔에 선교사로 가 있는 양승봉과 함께 인턴 숙소에 살면서 병원 앞뜰에 사셨던 장 박사님을 자주 뵐 수 있었다. 검소한 모습과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시편 말씀을 들려주시고, 연세보다 훨씬 해맑은 목소리로 함께 부르시던 찬양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낙태 문제에 관해 얘기를 나눌 때는 단호한 어조로 결코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 주셨으며, 아침 일찍부터 회진하시며 환자를 돌보시던 모습은 인자한 내 어머니와도 같으셨다.

갈등 해법과 관련해 잊을 수 없는 장 박사님과의 에피소드를 소개할까 한다. 1991년, 고신의료원은 재단이사회와 교수협의회 간에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학교와 병원이 거의 마비 상태에 빠졌었다. 당시 학생처장보였던 나에게 내분은 고통스러웠다. 기독 교수로서 교수협의회 안에서는 재단측 인사로 오해받고, 재단측에서는 교수들을 의식화하는 인물로 오해받던 시절이었다. 양측을 오가며 화해와 중재를 시도했으나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기를 6∼7개월, 방황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장 박사님을 찾아뵈었다.

박사님께서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며 해법을 알려 주셨다. "양측 대표를 불러 모아 이렇게 질문해 보는 거요. 당신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들이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소? 이 첫번째 질문에 아니라고 한다면 그쪽더러 하나님 뜻에 맞다고 하는 쪽에 순종하라면 될 것이오."

나는 무릎을 치며 재단과 교수협의회 양측에 하나님의 뜻임을 질의하였는데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다시 장 박사님을 찾았더니 예상했다는 듯 환한 미소로 맞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양측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더 간단하오. 제비를 뽑으면 될 것이오. 제비로 뽑히는 쪽에 상대측이 순종하면 될 것 아니오!"

사심이 없는 장 박사님만이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양측에 이같이 제안했다가 모두에게 거절당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고신의료원은 당시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최근 갈등을 치유하며 발전을 거듭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다행이라 여겨진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비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장 박사님이 보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장 박사님의 순수함과 빈 마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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