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규 목사(함양 상내백교회 담임)
노상규 목사(함양 상내백교회 담임)

 

주남선 목사님 이야기이다.

2020년 성탄절 전날 나의 영적 아버지 김주옥 목사님의 무덤을 찾았다. 2년 전 이곳 함양에 부임한 후에 종종 들려 무덤을 돌아보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곳이 되었다.

예전에 김 목사님의 무덤 주위에 주남선 목사님의 무덤이 있었는데,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었다. 그날은 시간을 내어 흔적을 찾아보고자 하여 근처의 무덤을 둘러보았다. 어떤 무덤은 묘비도 없이 무덤에서 자란 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있기도 하였다. 비석의 머리인 관석에 태극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애국투사 주남수 지묘였다. 비문을 찬찬히 읽어 보니 젊은 나이에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주남선 목사님의 동생이었다. 군정서 의용병에 출전하여 만주에서 순국하였다. 주남선 목사님의 3형제는 모두 애국자인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 주남선, 부인 남술람의 의 묘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 주남선, 부인 남술람의 의 묘

다시 주위를 돌아보는데 바로 옆에 천주교인들이 사용하는 십자가 모양의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아뿔싸! 십자가 아래 방패 모양의 비석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 주남선, 부인 남술람의 의 묘라는 비문이 있지 않은가! 주남선 목사님의 묘였다. 방패 모양의 묘비 뒤편에는 반라의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었다. 십자가가 천주교식이라는 것과 그 당시 묘비 뒷면에 반라의 천사를 부조한 것이 흥미롭다. 사연이 궁금하다. 낙엽으로 덮여 있는 돌무덤의 상판에는 무덤 속에 자는 자들이... 음성을... 오나니라는 성구가 낙엽에 가리어 부분적으로 보였다.

주남선 목사님의 무덤 바로 옆에 보훈처장 이름으로 세운 조그만 표지석이 있었다. “1997년 상훈 제000283호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시므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 묘역 제398호에 배위 남술람 여사와 함께 이장 안장함. 1995.4.12.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장이 그 내용이었다.

이장한 후 몇 년은 돌아보다가 그 후 몇 년째 관리가 안 되어 잡풀과 잡목들, 그리고 낙엽이 무덤과 주위를 덮고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주남선 목사님의 무덤과 비석은 질 좋은 석재로 만들어졌고, 주위에는 화강암으로 계단과 반월 모양의 병풍석도 둘려져 있다. 당시에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갔을 무덤이었다. 그런데 이 무덤이 방치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났다. 이장을 했기에 빈 무덤이니 가치가 없어 방치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관점이 다르다.

주남선 목사님이 그곳에 노회장을 통해 묻힌 때가 1951329일이었다(323일 소천). 이장일이 19954월이니 44년 동안 주남선 목사님의 시신이 묻혔던 곳이다. 이장 당시 현장에 없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살은 그 자리에서 흙으로 돌아가고 유골만 수습하여 이장하였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주남선 목사님의 육신의 흔적은 그곳에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남선 목사님의 무덤은 두 개가 되는 것이다.

기존의 거창 주남선 목사님의 무덤에 관한 자료를 찾을까 하여 거창교회 100년사”(2009. 거창교회 백년사편찬위원회)를 살펴보았다. 그 책에는 주남선 목사 기념관의 이모저모 109-112 pp.”가 있다. 그 중 무덤과 관련한 자료는 112p대전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있는 주남선 목사 선영이라 설명한 묘소 전경 사진과 묘비 뒷모습 사진이 전부이다. 나는 20201226일 국립 대전 현충원에 있는 주남선 목사님의 무덤을 직접 찾기도 하였다.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한 주남선 목사의 묘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한 주남선 목사의 묘

개인적으로는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한 것보다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함으로 명예를 드높일 수도, 국가가 관리는 해주니 편리성도 있을 것이다. 이미 이장을 했으니 돌이킬 수는 없다. 그러나 주남선 목사님은 애국지사보다는 목회자로서의 그 영향이 더 크다고 본다. 그것은 그의 평소의 삶과 말에서도 그랬거니와 과로가 겹쳐 간경화로 만63년의 생애를 마감하며 남긴 마지막 두 마디 유언에도 담겨있다. “쉬는 것도 목회입니다. 너무 과로하지 마세요. 나는 순교를 허락받지 못한 불충한 종이요.”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의 비석과 거창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약력을 보아도 거창의 것이 더 자세하게 나와 있고, 목회자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2021111일에 거창의 주남선 목사님의 묘소를 다시 찾았다. 낫과 전지가위, 삽과 빗자루, 갈고리를 챙겨갔다. 방치되었던 무덤과 주위의 잡목들과 잡풀을 전지가위로 잘라냈다. 그리고 갈퀴로 잘라낸 잡목들과 낙엽을 긁어 한쪽으로 치우고 빗자루로 쓸고 나니 무덤과 주위의 형태가 온전히 드러났다. 쉬지 않고 2시간을 작업하고 나니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 영하의 날씨 속에 작업을 했는데도 속옷이 땀에 배었다. 나는 이곳의 나의 기도처로 정하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시간을 내어서 이곳을 찾아 기도하기로 하였다. 나의 개인 기도처를 넘어 거창에 있는 이 주남선 목사님의 무덤을 더 잘 활용할 수는 없을까?

주남선 목사님은 거창교회 담임목사(5, 7), 고려신학대학원과 고신교단의 설립자, 거창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애국지사였다.

묘지 정리하는 노상규 목사
묘지 정리하는 노상규 목사

 

주남선 목사님과 거창교회

주남선 목사님은 1888(고종 25) 914일 한학자 주회현의 삼형 제 중 2남으로 태어났다. 17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주남선 목사님은 거창교회에서 예수를 믿고, 거창교회에서 반사, 집사, 장로, 전도사, 담임목사로 섬겼던 분이다. 1908년 복음을 받아들이고, 1912년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4510일 남술람 南述藍과 결혼하여 42녀를 두었다. 주남선 목사님의 원래 이름은 주남고 朱南皐였는데, 감옥에 있을 때에 남선南善으로 개명을 하였다.

191912월 거창교회 장로가 되었다. 192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2년 거창교회 전도사, 지방 권사로 활동하였다. 19304월 평양신학교 졸업. 그해 10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다음 해 거창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6.25 전쟁 때에는 교인들이 대부분 피난 갔지만 주남선 목사님은 교회를 지키며 기도하고, 피난 가 있던 교인들을 찾아 심방을 하였다. 주위에서 피난을 권유하면 나는 순교하는 게 소원입니다. 일정 때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해야지요.”라고 하였다고 한다. 과로로 병을 얻어 1951323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주남선 목사 묘 정리를 마치고
주남선 목사 묘 정리를 마치고

 

주남선 목사님과 고려신학대학원, 고신교단

주남선 목사님은 출옥 후 1945113일 경남노회장이 되어 경남노회 재건안을 채택하였다. 교회 재건 실천 방안으로 현 교직자들의 자숙 안 세 가지를 내었는데, 그것은 첫째,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단 사직하고 2개월 동안 자숙할 것. 둘째, 자숙 기간이 지나면 교회는 교직자에게 시무 투표를 하여 자신의 진퇴를 결정할 것. 셋째,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이었다.

주남선 목사님은 옥중에서 기도하고 준비한 신학교 설립을 하게 되는데, 1946620일 한상동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설립하고, 진해 해군수양소를 빌려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2개월 동안 신학 강좌를 한 후 920일 부산 금성중학교에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주남선 목사님과 거창군

주남선 목사님은 1905년 청년 시절 잠시 거창군수 비서관 일을 하였다. 194631일 해방 후 맞은 첫 3.1절에 거창공설운동장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를 하며 준비위원들이 주남선 목사님께 독립유공자 표창을 하기로 결정하고, 초청하였지만 나는 다만 이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해야 할 일을 한 것뿐 입니다.”라고 하고 표창을 거부하고, 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만 하면 될 정도로 거창지역에서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래서 거창의 유지들이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남선 목사님을 국회의원 후보로 추천하기로 결정하고 출마를 권유했는데도 목사는 목회만 하는 것!”이라고 하며 거절하였었다. 1953616일 설립한 거창고등학교의 설립자는 주남선 목사님의 장남 주경중 장로이다. 거창지역의 명문학교인 거창고등학교도 주남선 목사님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본다.

 

애국지사로서의 주남선 목사님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20일 오형선, 고운서 등과 함께 거창지방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해 8월에는 국권회복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독립군 자금지원과 의용군 모집에 깊이 관여한 혐의로 일제에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229일 가출옥 하였다.

193511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경남 거창, 함양, 합천의 각 교회를 순방하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38년 일제의 강압으로 담임목사를 사면하고, 구금 때까지 수시로 거창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고문을 당하였다. 1940716일 검거되어 진주 경찰서 구금, 부산경찰서를 거쳐 1941711일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5817일 출옥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거창교회, 거창군, 고신교단과 고려신학대학원이 머리를 맞대면 우리 당대와 후손들에게 좋은 신앙교육, 애국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우선 주남선 목사님의 후손들과 거창교회가 힘을 모아 거창군의 협조를 얻어 공원묘원(가칭, 애국지사 주남선 공원묘원)으로 조성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애국 교육의 좋은 장소가 될 것이다. 그 후 고신교단, 고려신학대학원이 함께 힘을 모아 이곳을 신앙교육 장소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곳에서 차량으로 20여 분 거리에 조성되고 있는 순교자 박기천 전도사기념관(기념관 설립자 : 박래영 목사)과 함께 서부 경남의 신앙유적지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또한 기존의 손양원 목사 생가 및 기념관(함안) 주기철 목사 기념관(진해) 호주선교120주년기념관(마산)과 연계한 경남선교&순교신앙루트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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