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윌,다잉 윌

▲ 박상은 장로

서울서부지법 민사12부는 지난달 28일 식물인간 상태인 어머니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며 자녀가 낸 소송에서 자녀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적극적 안락사를 비롯해 말기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 행위를 일반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란 점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안락사를 인정한 국내 첫 판결이 나왔다는 점에서 사회적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인간에게는 살고 싶은 욕망과 죽고 싶은 욕망이 공존한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는 경우는 없으며, 아무리 불행한 자라도 살고 싶은 의지가 전혀 없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노년의 할머니가 죽고 싶다고 자주 말하지만, 막상 죽음 앞에서 생에 대한 집착은 젊은이 못지않은 것이다.

인간의 이 두 가지 욕망 중 우리는 당연히 삶에 대한 의지를 소중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인간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명제가 부정되기 시작한다면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의미한 치료 중단은 이러한 전제 위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도 이러한 치료 중단 결정은 본인이 살아 생전에 명료한 의식으로 서면에 명시한 경우에 한하여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의식이 있는 자에게 죽음에 대한 동의를 받아둘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면, 그 자체가 생명의 의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반증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법원의 결정은 가족과 판사들인 제3자가 본인 동의 없이 생명을 중단하라는 결정을 내린 예외적인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생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 단지 의학적으로 더 이상 회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 본인 생전의 뜻에 따라 자신의 장기를 타인에게 기증하기도 하고, 기계장치 속에 고독하게 죽지 않고 가족과 함께 고요히 죽음을 맞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무의미한 치료 중단은 소극적 안락사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는 인위적 삶의 중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죽음의 과정이며, 기계에 의한 죽음의 연장을 중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신중해야 하기에 회복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두 명 이상의 의사가 동시에 내려야 가능하도록 하며, 아울러 본인 생전의 동의가 필수적인 것이다.

이번 판결에서는 본인의 서면동의 없이 가족이 환자의 평상시 생각을 추정해 결정한 것이기에 확실한 본인 동의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특히 치료비 상당 부분을 가족이 부담해야 하는 우리 상황에서 본인 의사를 분명히 언급하기도, 가족의 경제적 부담을 무시하기도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치료 중단의 또 다른 중요한 전제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 있어서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모호한 표현은 향후 상당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어 염려된다.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회복의 가능성이 약간 있다는 뜻이며, 회복의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남아 있는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분명히 안락사 범주에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복 불가능하다는 기준에 대한 의학적인 분명한 해석과 이를 적용하는 분명한 지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무의미한 치료 중단에 대한 기준이 의학적·법적으로 정확하게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일회적이며 돌이킬 수 없기에 그 어떤 실수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며, 행여 회복될 수 있는 환자가, 또는 살고 싶은 의지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환자가 죽음으로 내몰려선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잉 윌(dying will)을 존중함에 있어서 리빙 윌(living will)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