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가시적인 힘만으로 지배되는 곳이 아니다. 만일 물리력이 지배권을 보장하였다면, 명랑해전에서 불과 12척으로 그 열 배가 넘는 133척의 왜군을 물리쳤던 것이나, 남북전쟁 초기에 연전연패하던 급조된 북군이 남군의 정예부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지형과 조류의 흐름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상황을 조망하고 전세를 장악했던 이순신과 연방제에 대한 견해차로 인한 '남부와 북부의 갈등'으로 여겨졌던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선언을 통해 일순간에 '불의와 정의의 대립 구도'로 만들어 대의(大義)를 장악했던 링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분수령에서 이들을 역사적 인물로 차별화한 것은 현실을 돌파하며 미래를 선점하였던 전략적 사고였다. 위대한 전략적 사고는 에너지 누수를 막고 자원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효율성의 백미이며, 하나님의 자원을 가장 생산적이며 가장 창조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일수록 전략적 사고에 능해야 한다. 제한된 자원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것은 교회의 미래를 품는 모든 목회자의 마땅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바뀌려면 의식이 개혁되어야 하고, 의식이 개혁되려면 새로운 정보를 가져야 하고,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감각이 있어야 하며, 감각이 있으려면 생각이 젊어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나 교회는 나이가 들어도 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미래를 품는 전략적 사고의 기초가 아닌가 한다.

신앙인에게 전략적 사고는 일신(一身)의 보장이 아니라 육체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며, 세상적 꾀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이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며, 현실의 자구책이 아니라 미래의 차원을 여는 문이어야 한다. 순종으로 일신의 두려움을 뛰어넘어 300명의 용사로 10여만명의 무력을 제압하였던 기드온,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자 했을 때 개인의 부귀가 아니라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함으로써 이스라엘 역사에 전대미문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솔로몬, 유대 민족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기꺼이 순교적 전략으로 유대 민족에게 생명의 문을 열었던 에스라, 예수님에게서 구원의 길을 발견하자마자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소유를 모두 내어놓음으로써 온 집안을 구원으로 이끌었던 삭개오에게서 육신과 현실과 죽음마저 뛰어넘어 역사를 주도하고 비전을 실현하며 미래의 방향까지도 끌어가는 전략적 사고의 힘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미래의 영혼이 담겨 있는 전략적 사고를 품어내고 구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의 가장 큰 방해꾼이자 장애물은 현실과 유착된 '관성'이요 '습관적 사고'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현실에 붙들린 닫힌 눈과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는 미래의 담장을 넘어서기에 구조적으로 너무도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통찰을 가진 자의 비상한 긴장과 관성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충격적 미래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설득력에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잠재적인 역량까지 결집하여 선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글로벌 차원의 기독교적 싱크 탱크가 뒤따라야 한다. 미래는 그저 꿈꾸는 자의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 세대 이후를 통찰하는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실천하는 자의 것이다. 진정 소원하는 것은 한국교회가 현실에 안주하려는 관성의 법칙을 깨고 미래의 시간, 영토, 영혼을 품어 세계를 하나님께로 건져내는 영적인 강력한 허브(hub)가 되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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