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천하가 통일되기 전에는 각 지방의 영주(城主)들의 힘이 막강하였으므로 영주들의 협력에 의하여 포교활동이 가능했다고 본다.


지방에 있는 영주들 가운데 야마구치(山口)의 성주인 오우치(大內義隆)와 오토모(大友義鎭), 고니시(小西行長), 다가야마(高山右近) 등이 크리스챤이 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특히 이들 가운데 분꼬(豊後)의 성주이었던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鎭)는 1578년에 세례를 받고 프란시스코라는 교명을 받기도 했다.  


그 지방의 영주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산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시기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절의 승려들이었다.  당시의 승려들은 최고의 권력자인 장군의 외교 비서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군의 비서로 있던 승려들이 자기들의 직위를 이용하여 계속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는 기독교에 대하여 호위적이었으나,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처음에는 관용하였으나 1587년 구주지방을 평정한 후에 갑자기 천주교도 추방령을 내렸다.  천주교에 대한 추방령의 원인은 봉건사회의 도덕에 부합하지 않으며 또한 봉건제 즉 독제정치를 하는데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천주교에서는 장군에 대한 충성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존경을 강조하였고, 장군을 위하여 활복순사(豁腹殉死)하는 것을 무사의 미덕으로 생각하지만 천주교에서는 죄악으로 공박하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기독교 탄압에 대한 승려들의 계속적인 간청이 실효를 거두게 된 것이라고 본다.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일본은 신의 나라이다. 천주교의 선교사들이 좋지 않는 가르침을 전하는 일은 해괴한 일이다”고 공포하여 기독교의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부분적인 박해 속에서도 1614년에는 일본 전국에 143명의 선교사들이 포교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이어서 장군이 된 도구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는 그의 외교비서관으로 있던 불승 수우덴(崇傳)의 기초에 의하여 그리스단의 금령에 관한 포고문을 1613년 12월에 전국적으로 공포하여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기독교의 박해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은 불교의 승려들의 진언을 들어서 불교를 어용종교로 삼고 기독교를 탄압하는 일을 강행하였고, 도구가와 막부의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기도 하였다.


독제정치란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기를 추종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인간의 평등과 민주화를 주장하고 독제체제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전파될수록 독제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도구가와 막부는 기독교에 대한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자기 보전을 위하여 철저하게 탄압을 하였고 또한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더욱 철저하게 탄압하였다고 본다.


또 한 편으로는 제외국간에 외교상의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한 중상과 모략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처음 포투갈 사람들이 먼저 들어왔지만 이를 경시한 스페인, 오란다, 영국 등이 나중에 들어와 서로 중상하고 모략하여 기독교에 대한 위신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선교사들이 신민지화를 위한 선발대라는 거짓말을 믿고 있었으며 막부에서는 이것을 위협하게 생각하여 기독교를 탄압하게 되었고 또한 쇄국정책을 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같은 교회들 끼리 서로 비난하는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일본에는 통일교나 여호와 증인으로 인하여 많은 교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은 이단종교에 대한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똑같은 종교단체나 교회라고 생각하므로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 더욱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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