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싹트지 못하게 방해하는 독초다
십자가는 모든 차별을 폐기한다

 

황대우 교수(고신대)
황대우 교수(고신대)

지금 대한민국은 갑질 문화와의 전쟁이 한창이다. 무시하지 말고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다. 차별은 무시의 다른 말이다. 역사적으로 차별이란 단어는 주로 성으로 구분하는 남자와 여자 간의 차별과 피부색으로 구분하는 인종 간의 차별 때문에 등장한 것이다. 이제 차별은 우리나라에서 차등으로 인해 겪는 모든 갈등을 총칭하는 단어로 보인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차별 받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차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그래서 평등과 공정, 그리고 정의라는 단어가 가장 핫한 사회적 이슈를 대변한다. 왜냐하면 이 세 단어는 곧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는 세 가지 방식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연설문에 해답이 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아마도이 문장은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라는 링컨의 명언에 버금갈 정도의 명언이리라.

지역갈등과 세대갈등과 같은 오랜 숙제는 해결될 기미조차 없는데, 빈부격차는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물림 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악화일로에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청년들에게서 나타나는 새로운 남녀갈등도 심각한 문제다. 사회적 갈등해소에 앞장서는 정치인은 없고 정치꾼만 득실거린다. 정치(正治)하는 정치(政治)가 필요하다. 국민 각자나 소수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국외와 국내의 사회적 문제나 거악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치가 아니던가?

차별은 비단 정치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선동에 쉽게 동조하는 국민도 문제다. 지연과 학연의 출신 차별은 더울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이뿐인가? 지금 온 세상은 코로나 사태와 백신을 두고 온갖 차별이 극성이다. 이런 극단의 대표주자는 백인우월주의와 자국우선주의다. 동양인에 대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인종차별적 폭력사태가 빈발할 뿐만 아니라, 백신을 둘러싼 자국우선주의가 당연한 듯이 여긴다. 강대국과 약국소의 차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금 코로나사태와 백신전쟁으로 악화일로에 있다.

세상의 모든 종류의 차별은 개인적, 민족적, 혹은 국가적 인식과 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비뚤어진 인식, 즉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이 차별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별은 어느 날 갑자기 타나나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익숙한 환경과 문화 및 교육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학습된 내면의 의식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결과다. 그렇다면 비뚤어진 인식과 의식을 바로 잡지 않는 한 차별도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드러난 차별 현상들만 심각한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모든 차별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특정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이다. 특별히 차별을 해소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고, 또한 가장 앞장서서 차별의 불공정을 외쳐야 할 단체는 교회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이유와 목적이 화해와 화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죄인과 하나님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화해의 자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들 상호간의 해묵은 이기심을 해소하는 화평의 자리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차별을 철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Photo by Markus Winkl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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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차별

역사상 시회적 차별의 출발점인 남녀평등의 문제는 어디까지 왔을까? 페미니즘(feminism. 여성주의)은 진보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다. 지금 이들의 주요 이념은 남녀평등 즉 양성평등을 넘어 성소수자의 보호와 권리를 주장하는 젠더평등 즉 성평등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낙태문제도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 문제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임신한 여성에게 아이를 낳을 것인지 낳지 않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아이를 낳느냐 낳지 않느냐 하는 문제가 임신한 여성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에 이런 선택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 자체가 남녀차별이다. 남성은 임신하지 않고 여성만 임신한다. 따라서 낙태의 유무를 결정할 권리를 여성에게 보장해야 평등하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아이는 여성의 부산물이 아니다. 새로운 생명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아이의 생존권은 여성의 권리에 무참히 희생되어도 좋은가?

성폭행에 의한 원치 않는 임신의 문제는 산모가 원할 경우 낙태할 수 있도록 이미 모자보건법에 의해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사실 이 경우도 아이의 생명권이 무참하게 희생되는 것은 사실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낙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인격에서 나타난다. 동물처럼 즐기면서 임신한 아이를 자유롭게 낙태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낙태는 아이의 생존권을 무참하게 짓밟는 살인행위일 뿐만 아니라, 산모에게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이다. 세상살이에 피치 못할 사정이 왜 없겠는가? 그래서 예외적인 경우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낙태를 법제화하자는 것은 이런 예외적인 경우를 일반화 하자는 뜻인데, 과연 그것이 인격의 품위에 걸 맞는 인간적인 행위인지 반드시 숙고해보아야 한다. 자유와 권리는 그것이 건전하고 건강한가?’의 문제를 반드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직업적 차별

영화 친구에 나오는 대사, “너거 아부지 뭐하시노?”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고질적인 차별 문제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옛날에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학생의 가족설문뿐만 아니라, 직장 이력서에도 부모의 학력과 직업을 적는 칸이 있었다. 부모의 학력과 직업이 왜 필요하고 중요했을까? 한 마디로, 의도는 정확한 신상 파악이었겠지만 결과는 차별이었다. 어떤 일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코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고 부모에게까지 소급되었다.

어쩌면 이런 사회적 관습과 인식이 오늘날 금수저와 흙수저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자녀에게 금수저를 물려주고 싶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그래서인지 이전 세대에는 자녀에게 금수저를 물려주지 못한 부모는 늘 죄인처럼 자신을 탓하며 자녀에게 미안해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자녀가 흙수저를 물려준 부모를 원망하는 시대다. 부모는 자녀에게서 잘 키우지도 못할 자식을 왜 낳았냐?’는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어쩌면 젊은 세대는 부모에 대한 원망을 자신도 들을까봐 결혼할 자신이 없거나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자녀를 잘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혼을 기피하거나 자녀를 낳고 싶지 않는 경향이 대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이들은 결혼도 자녀를 낳는 일도 적극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유행가 가사처럼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대세다. 비혼주의자와 일인가구의 수가 급증하는 것이 비단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현대적 귀차니즘편의주의의 영향도 있을 법하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상속 차이 때문에 빈부 격차가 더 이상 극복 불가능한 경우는 젊을수록 심각하다. 이 격차는 자신의 실력이나 좋은 직장으로 극복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도 점점 벌어지고 있다. 어느 대기업에서는 정규직 부모의 조기 퇴사 조건이 자녀의 정규직 채용이란다. 정규직이 바늘구멍이다 보니 별의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고위 공직자의 입사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LH사태도 단순히 선취 정보에 의한 투기문제로만 보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사회적 차별이다.

 

교회적 차별

누구에게나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는 교회에서는 차별 문제가 없을까? 교회 내에서의 차별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보다 더 심각하다. 차별이 공의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가시적이고 인간적인 차원의 문제지만 공의의 하나님을 믿는 교회에서는 세상적인 차원의 문제에다가 불가시적이고 신앙적인 차원의 문제까지도 추가된다. 공부를 못하는 것은 단순히 게으른 태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불성실한 신앙의 문제로도 평가된다. 교회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한 낙제 인생이라 치부한다.

사회적 성공은 교회 안에서 곧장 하나님의 성공으로 둔갑한다. 공부를 잘하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교사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일은 곧 자신에게는 은혜요, 하나님께는 영광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사회적 성공이 신앙적 승리와 같은 것일까? 전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등식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저 등식이 성립한다면 예수님보다 베드로와 바울이 훨씬 더 위대하다고 평가 받아야 한다. 120명 정도의 제자를 배출하신 예수님의 최종 성과와 하루만에 5천 명씩 결신자를 맺는 베드로의 성과는 비교불가가 아닐까?

성경에 기록된 교회 설립과 선교사역으로만 따지면 베드로보다 바울이 훨씬 더 위대할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훨씬 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이 과연 베드로보다 더 존경을 받았는가? 그럼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칭송 받았는가? 아니다. 왜 아닌가? 그것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실적보다 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믿음도 마음의 문제로 간주한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공을 평가하는 잣대는 마음의 믿음이다.

세상의 성공은 마음의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의 성공은 반드시 마음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세상의 성공과 교회의 성공, 즉 사회적 성공과 신앙적 성공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완전히 다르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수치로 환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양적 성공을 의미한다. 하지만 교회에서의 성공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에 결코 수치로 환산할 수도 없고 측량하고 평가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히려 측량하고 평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런 모순적인 일을 하고 있다.

양적 평가에 근거한 세상적인 차별은 결코 교회 안에서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세상과 다르다. 반드시 달라야 하고 결코 세상과 같을 수 없다. 무엇이든 차별은 그 자체로 정의도 공정도 아니다. 교회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의 지상공동체인 동시에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백성의 천상공동체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허무신 것이 바로 선민의식으로 세워진 차별의 벽이다. 우리 주님은 그 벽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허무셨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서 언제나 사랑공동체로 남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회 안에서의 차별은 그 자체로 불신앙의 결과다. 그 차별은 십자가의 사랑을 폐기처분하는 역주행이기 때문이다. 차별과 기독교 사랑은 함께 할 수 없다. 세상의 차별이 판치는 곳에는 사랑을 찾기 힘들고 십자가의 사랑이 넘치는 곳에는 차별이 사라지는 것, 이것이 신앙의 법칙이고 교회의 법칙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몸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그리스도의 충만은 곧 사랑의 충만이 아닐까?

교회는 어떤 종류의 차별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차별은 성도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사랑의 십자가를 무너뜨리는 믿음의 적이다. 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질병이다. 이 질병은 잘못된 인식과 습관에서 비롯되곤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습관,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는 인식이 차별을 낳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도 차별은 없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빈부의 차이도, 인종의 차이도, 지식이나 외모의 차이도, 능력이나 재능의 차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순간 모두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며 사랑의 능력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다. 기독교 신자는 사랑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이므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세상 속에서 사랑의 본을 보이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역시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것,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빛과 소금의 삶이다. 기독교는 최고로 이상적인 사랑을 먹고 사는 종교다. 왜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원수사랑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에게 원수사랑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원수사랑은 고사하고 이웃사랑조차도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자. 우리에게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는 비교의식과 차별의식부터 제거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차별은 나쁜 것이고 내게 별 큰 유익을 가져다주지도 못하는 물건이니 과감하게 버리자. 그것을 버리면 이웃이 보인다. 모든 영적 질병의 중심에는 이기적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차별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싹트지 못하게 방해하는 독초다. 우리 주님은 저 십자가 사랑으로 그 차별의 독초를 뿌리 채 뽑아내어 제거해버리셨다. 따라서 우리는 차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우월의식과 열등의식부터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별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의식 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의 차별적 파편들을 남김없이 뽑아내어 과감하게 폐기처분해야 한다. 물론 이 일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 반복해서 실행해야 한다.

 

십자가는 모든 차별을 폐기한다. 우리 주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어른도, 흑인도 백인도, 강자도 약자도, 부자도 빈자도, 금수저도 흙수저도,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모두 서로를 섬기는 지체일 뿐이다. 교회는 차이를 무시하지 않지만 차이로 차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자의 힘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가르친다. 누구든지 자신의 재능으로 다른 지체를 섬기되 더 많은 재능을 가진 자가 더 많이 섬기는 법칙,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받는 무차별적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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