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왠지 우울하고 복잡하다. 들리는 소문이 무성하고 험악해서 도무지 새해의 포부를 말하기가 민망스럽고 조심스럽다. 구조조정과 대량해고 등의 이야기가 있고 2월말부터 시작될 것이라거나 3월이면 본격화될 것이라는 얘기도 흔히 들린다.

이런 살얼음 같은 상황을 대처하는 정치권의 모습은 국제적 망신을 당하고도 정신 차릴 줄을 모른다. 가슴이 조여들고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백성들의 염려쯤은 안중에도 없다. 전기 쇠톱과 쇠망치를 동원해서라도 정치적 목표만 달성하려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미 희망을 버렸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무엇이 우리의 대안인가?

이제는 우리끼리 마음 다잡고 살 길을 찾고 해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 우리를 신나게 하고 희망을 지니게 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고무시키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길 이외에는 없다. 사실 모든 실패의 밑바닥에는 사랑 결핍이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과거 역사의 경험을 통해 아무리 좋은 이념과 가치관도 사랑을 겸하지 못하면 결국은 실패한 이념이 되어 인류 사회의 엄청난 해악이 되었음을 잘 기억하고 있다. 자유의 이름으로 혁명을 시도했던 프랑스 혁명이 무자비한 단두대의 처형으로 일관하면서 결국은 온전한 성공을 이루지 못한 것도 자유가 인간에 대한 사랑, 범죄한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겸하지 못하면 역사의 건강한 동력이 되지 못함을 보여 주었다. 평등의 이념으로 출발한 사회주의가 전 세계의 빈곤을 가속화시키고 1억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채 몰락한 것도 사랑이 결핍된 이념이 가야 할 당연한 귀결이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사랑 없는 이념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나타난 신자유주의는 분명 자본주의 세계 질서의 새로운 대안이었다. 그러나 이 논리가 약육강식을 정당화하고 약소국의 경제에 대한 대안을 성실히 제시하지 못한 것 때문에 세계 경제는 무한 추락의 심판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예컨대 많은 아프리카 국가 여성들의 평균 수명은 40세를 밑돌고 있다. 만성적 영양부족과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 앞에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진국의 국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의약품들도 그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막강한 힘을 지닌 제약사들이 특허권과 지적 재산권을 이유로 하여 약값이 생산원가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된 것이 주된 원인이다. 만약 소수 제약사의 이윤을 지키는 것이 연간 600만명 가까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우리는 이런 사랑 없는 비정한 자본주의를 거절해야 한다.

이제는 이 비극들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날아올 날이 멀지 않았음을 자연과 역사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살벌한 세상의 해법은 무엇인가? 다가올 새봄의 위기를 이겨낼 사회적 대안은 무엇인가? 어떤 정책도 어떤 방법도 사랑이 결핍되면 결국 해악이 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사랑만이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의 방법이다.

그래야 내가 살고 그도 살 수 있다. 그래야 우리도 살고 그들도 살 길이 열린다. 그래서 주님은 죽음 앞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 길만이 주님의 눈에 비친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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