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 글은 2021년 6월 6일 칠원교회당에서 드려진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행한 정주채 목사의 설교 원고를 정리한 것입니다.  사진은 순교 기념예배에서 설교하는 정주채 목사. 
이 글은 2021년 6월 6일 칠원교회당에서 드려진 손양원 목사 순교 70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제목으로 행한 정주채 목사의 설교 원고를 정리한 것입니다.  사진은 순교 기념예배에서 설교하는 정주채 목사.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 32:7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오늘은 거룩한 주일(6월 6일)입니다. 국가적으로는 특별히 순국선열들을 생각하고 추모하는 현충일입니다. 이 뜻깊은 날에 우리는 신앙적으로는 순교자요, 국가적으로는 애국지사이신 손양원 목사님을 추모하며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실제로 손 목사님의 순교70주년기념일은 작년 928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기념 예배를 계속 미루다가 오늘에야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한국교회에서 이런 귀한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영광이요 자랑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곳 함안군 칠원읍 칠원교회에서 이런 인물이 나왔다는 것은 함안군과 칠원교회의 큰 영광이고 자랑입니다. 이런 귀한 인물을 우리의 선배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성경은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generations)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앞서 살아간 조상들의 아름다운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본이 되고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역사에는 잘못들도 있고 부끄러운 오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반면교사로서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본문의 말씀대로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한국기독교의 역사는 어떠했는지? 어떤 귀한 인물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현충일이니까 먼저 6.25. 전쟁부터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 땅에 공산주의가 들어와서 일으킨 6.25. 전쟁과 이로 인해 겪어야 했던 참혹한 역사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6.25 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장애인이 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그 비극과 참상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악한 사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는지 모릅니다. 공산주의 사상이 얼마나 많은 인류를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소위 공산주의 혁명으로 피살되거나 죽은 사람들이 세계적으로는 무려 2억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젊은 세대들은 전쟁을 모릅니다. 6.25의 참상을 잘 모릅니다. 공산주의 사상이 세계 역사, 특히 우리나라 역사에 얼마나 처절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이 남긴 잿더미 속에서 우리 선배들이 어떻게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너무도 안타까운 사실은 사회주의에 경도된 역사가들이나 정치인들, 그리고 학교 선생들까지도 우리 역사를 왜곡시키고 민주열사들의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을 기억해야 하고, 역대의 연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후손들에게 잘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140년 전에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1) 이어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들이 세워지고 교회 옆에 학교와 병원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들어옴으로써 우리나라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 전래 이후 우리나라의 사회 전반에 일어났던 발전과 변화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발전과 변화를 가져온 기독교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좌파 지식인들 중에는 기독교의 역사적인 기여를 애써 무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더구나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런 역사적인 일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가 우리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이 자리에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만 몇 가지만이라도 간단히 소개하고 지나가려 합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 근대사에 미친 영향

1) 기독교는 흙 속에 묻혀 있던 한글을 다시 찾아내어 우리 국민들의 눈을 뜨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한글이 세계화되는 첫걸음이었습니다.2) 그리고 교회들에서는 매 주일 설교와 성경공부가 이루어졌고, 도처에서 사경회가 열렸으며, 한글로 된 성경교재와 소식지들이 나오고 신문들도 발간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한글은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선비나 관리들은 한글을 언문이라고 해서 멸시하였고, 상놈들이나 쓰는 글자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 한글이 백성들의 언어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서양의 르네상스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적인 계몽이 일어났습니다. 국민들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2) 기독교는 몇천 년 동안 계속되어온 반상계급, 남존여비, 종과 백정 등의 차별제도를 철폐시키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것을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893(지금부터 128년 전)에 설립된 서울 승동교회에서는 백정이었던 박성춘이 예수를 믿고 그 교회의 초대장로가 되고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는, 그야말로 혁명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박성춘이 승동교회의 초대 장로가 된 지 3년 후에 흥선대원군의 친척이요 왕손이었던 이재형도 장로(후에 목사가 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승동교회는 백정과 왕손이 같이 예수 믿고 장로로 시무하는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었습니다.

기독교는 그 근본 교리에 만인 평등사상이 들어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당신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얼굴색이나 빈부귀천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가진 인격자들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생기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로, 전라북도 김제 금산교회(1905년에 ㄱ자 교회당 건축)에서 있었던 역사를 말씀드립니다. 김제에서 대지주였던 조덕삼이3) 먼저 예수를 믿고 그의 마부였던 하인 이자익을 전도하여 같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이자익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물론 많은 새로운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자익은 금산교회에서 그 주인보다 먼저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어 주인인 조덕삼도 장로가 되었는데, 조 장로는 이자익 장로를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깍듯이 모셨습니다. 이렇게 김제에서도 인간 평등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남녀차별이라는 남존여비 사상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것도 역시 기독교입니다. 100년 전만 해도 여성은 집 밖에서나 안에서나 하인들과 별다름이 없었습니다. 여자들은 서당에 다니거나 공부를 하는 것까지 금지하였고 어릴 때부터 가사와 농사일 같은 중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있었던 축첩제도로 인해 여성들이 성노예처럼 취급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이 이 땅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여성해방이라는 조용한 혁명이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기독교를 통해 첩을 들이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07년 평양에서 회개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교인들이 가장 많이 회개한 죄는 축첩한 죄였다고 합니다. 아내를 학대하고 첩을 들여 집안에 큰 불화를 일으킨 죄들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여자아이들도 공부를 시켰습니다. 일본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당시 칠백 수십여 곳의 학교들이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이 선교사나 교회들이 세운 기독교학교였습니다. 이렇게 신식교육이4) 이뤄지면서 남녀차별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주로 고아들이 공부했습니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경우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아무도 학교에 보내지 않았으므로 고아원에 있던 원생들이 바로 학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 중에 김점동이란 사람이 있었는데5) 여성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의사요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3) 한국기독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일찍부터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된 기독교인들이 나라 안팎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3.1독립만세운동에는 교회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 측의 지도자는 남강 이승훈이었습니다. 그는 105인 사건으로 옥중에 있다가 5년 만에 가석방되었는데, 그가 천도교 측의 제안을 받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천도교와 기독교 양측을 연결하여 3.1 독립만세운동을 거족적인 운동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미 잘 아시는 대로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 인사가 16, 천도교가 15, 불교가 2명이었습니다.

3.1운동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이후 이 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교통이나 통신 수단이 별로 없었던 때라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만세운동을 알릴 수 있는 - 그것도 비밀리에 - 연락망이 매우 열악하였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당시에 가장 빠른 연락망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독립만세운동은 주로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 함안 지역은 만세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 중의 한 곳입니다. 함안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은 39일에 칠북면 연개 장터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칠북에 있는 이령교회가 준비하였습니다. 그 후 323일에는 바로 이곳 칠원 장터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칠원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동한 사람은 바로 손양원 목사님의 선친 손종일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구성리교회(현 칠원교회)의 장로였고 그가 교인들과 함께 치밀하게 준비하여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323일의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43, 8, 13일에도 계속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 -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들이었던 이승만과 김구 선생이 20대에 예수 믿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후에 이승만은 건국 대통령이 되어 우리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운 분이고, 또한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낸 인물입니다.

 

4) 우리나라 역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기독교의 역할들에서 한 가지만 더 예를 든다면, 그것은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에 앞장선 일입니다.

지금은 한센씨병이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퇴치된 질병입니다만, 100년 전에만 해도 나병환자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고,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나병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고, 그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습니다6). 손양원 목사가 사역했던 애양원은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나환자병원이나 그들의 수용시설에는 한 군데도 빠짐없이 교회가 있었고,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었던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역사들을 다 열거할 수가 없어서 참 아쉽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옛날을 기억하고, 조상들의 역사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손양원을 추모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추모한다는 것은 단순히 돌아가신 분을 생각하며 그리워한다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추모는 훌륭한 조상들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그들을 본받아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함안에서 그리고 바로 이곳 칠원교회에서 배출된 손양원 목사님은 기억하며 추모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배우고 본받아 살아야 할 참으로 훌륭한 인물입니다. 손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보배요 최고의 자랑입니다.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그 어떤 사람들과 비교해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위대한 성자이며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는 기독교역사에 해와 같이 빛나는 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역사 속에 점점 묻혀가고 있습니다. 일반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것은 고사하고,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이 날 때마다 화가 나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기독교회사]에 손양원은 이름 한 번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역사를 무시하고 훼손하는 일입니다.

손 목사님은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위인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분입니다. 보통 훌륭한 분이라고 하면 한두 가지 공적이나 탁월성이 드러난 분들입니다만, 손 목사님의 경우는 여러 방면에서 그의 훌륭함이 크게 드러나고 있는 분입니다. 이 시간 몇 가지만이라도 다시 기억하며 그를 추모하고자 합니다.

 

1) 그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고 훌륭한 목사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의 신앙생활을 보면서 자랐고,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아주 강한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는 성경말씀과 기도에 생명을 걸었다고 할 정도로 독실한 분이셨습니다. 이것도 누누이 설명할 시간이 없으므로, 손 목사님이 설교나 심문조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한두 가지라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검속되어 일본 고등계 형사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그때 형사는 너는 성경에 대하여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손 목사님은 성경에 기록돼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나에게는 생명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록입니다. 성경은 나의 유일신조요 신앙의 목표입니다. 성경 중에 기록된 것은 전부 그대로 굳게 믿고 전부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 마지않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또한 기도에 대한 목사님의 말씀도 아주 많습니다. 손 목사님은 하루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라 하였고, “일 중의 일이요 생활 중의 생활이 기도라고 했습니다. “기독자의 성공과 실패가 기도에 있고 기독교의 흥망이 기도에 있으니 실로 기도 여하에 있다.”고 하였으며 나는 기도로 살다가 기도로 인생을 마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피난을 가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를 기어이 뿌리치고 자신의 말대로 강대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인민군에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2) 그는 일본의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반대하며 맞선 분입니다.

일제는 소위 황국신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절대 반대하다가 이 일 때문에 구속되어 5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가 체포된 것은 19409월이었는데 일제의 끈질긴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다가 19458.15 해방이 되면서 석방되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만, 동시에 그의 이런 행동에는 애국애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부친 손종일 장로님은 칠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일 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분입니다. 그 후에도 그는 만주로 이거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이런 선친의 신앙과 애국정신은 그의 장남인 손양원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그는 나병환자들의 목회자요 가족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는 소위 출세할 기회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실력과 열정을 갖춘 목사여서 대도시 큰 교회들로부터 몇 번이나 청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청빙을 거절하고 애양원교회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섬기는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또 당시에 김구 선생이 손 목사님을 불러서 그가 설립한 학교의 교장으로 와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것도 사양하였습니다. 6·25 때 그가 사람들의 간곡한 피난권유를 뿌리친 이유도 불쌍한 나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손 목사님은 자신도 나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나환자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 그들의 고통을 체휼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환자들의 환처를 입으로 고름을 빨아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7) 과연 누가 이런 분의 삶을 흉내라도 낼 수가 있을까요?

 

4) 그는 아들을 둘이나 죽인 청년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좌익에 속한 청년들이 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를 목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총살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손 목사님은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다가 아들들을 죽인 청년 안재선을 용서할 뿐 아니라 양자로 삼기로 결심합니다.

모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를 결행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사람을 계엄군사령관에게 보내 살인자인 안재선을 사면해 줄 것을 간곡히 청원하였습니다. 이런 청원을 받은 계엄사령관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스러워했지만 결국 그 청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말 그대로 사랑의 원자탄이셨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김구 선생은 공산주의를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하나님께 아홉 가지 내용으로 감사를 드렸는데, 이런 일은 그 언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두 아들이 순교하게 해 주심을 감사하고, 예수 믿다가 누워서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 순교함이리요.

홍정길 목사님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 이후에 이런 인물이 나온 적이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5) 그는 인민군들에게 잡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순교를 영광으로 여겼던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두 아들이 순교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란 죽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순교는 순교적인 삶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역사가들은 순교를 백색순교적색순교라는 말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백색순교란 순교적인 삶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우기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삶 자체가 바로 백색순교입니다. 진정한 순교는 백색순교에서 적색순교로 이어지는 순교입니다. 손 목사님이야말로 그 삶이 순교였고 최후의 죽음도 순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사명, 곧 나환자들을 위한 섬김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사라는 이유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잡혀 총살당했습니다.

 

결언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순교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비석을 세우면서도 자신들은 이런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과는 아무 상관 없이 살고 있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도 그 선지자들과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인 사람들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도 앞서간 이런 훌륭한 조상들을 입으로만 칭송하고 추모한다는 것으로 끝난다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아무 다를 것이 없는 위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본받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이 가졌던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그분들이 가신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우리 선조들에 대한 진정한 추모입니다.

이 땅에 손양원 목사를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한국교회에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제2, 3의 손양원이 계속 배출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 미주

1) 1884년에 의료선교사인 호러스 알렌이 입국하였고, 다음 해 부활절에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장로교 목사)와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감리교 목사)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

2) 한글을 세계적인 언어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서양문화와 영어를 가르쳐 달라는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1886년에 입국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였다. 그는 한글에 띄어쓰기를 도입하고 영어에서처럼 쉼표와 마침표를 사용케 함으로써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그는 한글 교본을 저술하여 미국에서 출간하였고, 중국인들을 향하여는 익히기 어려운 한자를 그만 버리고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1950년에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이, 2014년에는 한글날에 외국인에게는 최초로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그는 4선 국회의원이었던 고 조세형 씨의 할아버지였다.

4) 처음에는 학교에서 주로 고아들이 공부를 했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경우 부모들이 아무도 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았으므로 고아원에 있던 원생들이 바로 학생이 되었다.

5) 김점동은 1886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결혼하고 19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그녀는 미국에서 그곳의 전통대로 남편 박여선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로 개명하였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평양 기휼병원 등에서 일하다 아깝게도 35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6) 최초의 나병원은 1909년 광주에 설립되었고, 이어 부산(1911)과 대구(1913)에도 설립되었다. 당시 여수 애양원은 광주나병원의 분원처럼 시작된 곳이었다.

7)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에서는, 애양원에서 손 목사님을 만나 오랫동안 돌봄을 받았다는 김수남 권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이 내용을 확인한 바가 있는데, 그녀는 그 당시에는 나병환자의 환처를 입으로 빨면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이 그리하셨던 것으로 압니다.”라고 하였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