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은 존재에 종속
사실에 큰 영향 받지 않는 세상, 그리스도인의 삶이 더 많은 영향
인식의 관점에서 사유하기 전에 존재론의 관점에서 사유해야
교리의 내용보다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더 중요해져

신요한 전도사(코닷 수습기자)
신요한 전도사(코닷 수습기자)

● 인식된 사실보다 존재론의 질문을 던지는 현대인

불가지론자이면서 친기독교주의자인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이 무신론 작가 샘 해리스(Sam Harris)와의 토론에서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흉악범에 비유해, “내 잘못을 인정하고 믿고 받아들입니다. 변화 되길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응답 받는 기도라고 답했다. 물론 성경적으로 불충분하지만 완전히 틀린 답은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 노력 없는 대리성취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에 수반된다.

문제는 피터슨의 의견에 의하면 기도가 심리학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런 ‘자유주의’적 접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로 다룰 필요가 없다.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훨씬 중대한 문제가 현대 교회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기도가 설명될 수 있다면 인격적인 하나님이 상실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피터슨에 의하면 흉악범의 기도의 응답이 ‘어디서’ 오는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교도소에서 교화된다고 가정할지라도 그의 죄에 대한 깨달음의 동인은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흉악범의 양심에 스파크가 ‘왜’, ‘어디로부터’ 튀었는지 알 수 없다.

분석심리학계에서는 개인의 신화가 영적 신비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양심에 반응을 일으킨다. 하지만 개인의 신화가 영적 신비를 만들어낸 것이 사실일지라도 어떤 개인신화가 진리이며 그것은 정말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지의 질문들이 따라온다. 신화의 사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물음표로 남는다.

근현대 인식론은 실증(實證)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모든 인식은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인식은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사실’을 증명하는 일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현대인은 ‘사실’에 관심이 적다. 되려 현대인은 신화가 주장하는 자아, 즉 ‘존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인식을 다루기에 앞서 언제나 존재론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의 삶이 실생활에서 가장 유용한가", 이 존재론적 질문이 현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옳음'의 기준이다.

 

조던 피터슨(맨 좌측)과 샘 해리스(맨 우측)가 대담하는 모습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jey_CzIOfYE)
조던 피터슨(맨 좌측)과 샘 해리스(맨 우측)가 대담하는 모습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jey_CzIOfYE)

신학의 대답: 전체성경의 메시지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Da Sein)로 정의했다. 현존재란 '거기에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거기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은 존재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시간과 공간에 어떻게 귀속되어 살아가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역사적 지평에 종속되어 살아가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종속된 역사적 지평은 비그리스도인들이 종속된 역사적 지평과 어떤 차별점을 갖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작금에 교회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문제는, 특히 보수적인 신학계일수록, 교리를 인식(지식)의 관점에서 사유하고 있을지라도, 존재론에서 교리적 인식을 사유하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칼빈신학자 헤르만 셀더르하위스에 의하면 칼빈에게 신학자의 임무는 "양심을 강화하는 것이다". 양심은 현존재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양심이 없는 사람을 향해 ‘인간’이라고 칭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낀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거기에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현존재처럼 현현하지만 존재의 의미를 왜곡시킴으로서 악의 통로가 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신학자의 임무가 양심을 강화하는 것이라면 신학은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존재성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피터슨은 성경이 66권의 내러티브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문장이나 단락이 아닌 전체로서 성경을 볼 때 성경의 메시지가 비로소 이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로 보아야 존재론적 규명이 이루어진다. 더 이상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 맞는지 아닌지는 - 물론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 현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존재론적 규명이 이루어져야 성경의 역사성을 다룰 수 있다. 우리는 부분교리가 아닌 전체교리에 주목해야 한다. 전체교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라는 인격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에 주목할 때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이 규명된다.

정통적인 신앙고백서 교육에도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 입장의 격차가 좁았던 중세와 달리, 니체와 하이데거로부터 사상구조의 혁명적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모든 존재가 균열되었다. 인식(지식)이 존재의 토대가 아니라 존재가 인식의 토대가 되었다. 이후 존재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현대에는 명제적인 지식만으로는 복음을 용해하는 수단으로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신앙고백서의 내용보다 신앙고백서를 가르치는 '사람'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존재론이 없이 교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 성경적 존재론의 각성

중국 우한에서 발발한 코로나19를 계기로 교회는 장장 2년 가까이 존재론적 도전을 받고 있다. 교회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염병으로 인해 교회가 문을 닫아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존재론적 균열’을 경험하지 못하는 다수의 기독교인들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국교회는 이에 대해 그 기독교인이나 그 교회의 '신학의 문제'라는, 틀리지 않지만 다소 불충분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제 교회는 ‘존재’에 대한 검토 없이 지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대안을 찾는 흐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토대 없이 인식론을 논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하이데거 사상의 지향점과 상관 없이 이 구조만 놓고 보면 성경과 상충되지 않는다. 성경은 현존재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인식할 수 없다고 명확히 가르친다(요 3:3). 청교도 설교자들도 존재론의 각성을 일으키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 없이 지식을 주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성경의 문장이나 단락이 아닌 66권 전체의 내러티브에 집중하면 그 메시지가 내게 주는 영향에 대해 - 삶에 대해서 특히 - 진지한 존재론적 숙고가 요해진다. 다시 말해 전체성경(Tota - Scriptura)이 회복되어야 한다. 더 간단히 말하면 ‘복음’이다. 더 명확히 천명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행 1:8). 

 

● 현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은 아무런 목적 없이 던져진, 피투(被投) 된 현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기투(企投)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현존재이다. 동시에 존재의 '영원한' 의미를 성령에 의해 깨닫게 된 현존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더 이상 스스로를 내던지지 않아도 된다. 대신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때문에 참된 안식과 위로를 누리며 산다. 불안과 허무함 자체를 실존의 원동력으로 삼은 실존주의 사상이 견줄 수 없을 만큼 기독교의 월등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현존재'이기 때문에 시공간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동시에 그는 똑같은 시공간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간다. 그는 공허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이 존재론이다. 교회의 존재론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교회의 목소리는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전체성경이 가르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은 시작된다. 다시 복음 앞에, 매일 복음 앞에 나아가는 것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현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증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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