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락 오바마와 이명박 그리고 성도와 교회들에게 주는 권면

1. 탐욕의 시대를 살면서...

최근 한 자료를 접했다. 유엔 식량 농업 기구(FAO)에 의하면 현재 농업 생산력으로 120억명을 먹여 살릴수 있다고 한다. 현재 세계 인구는 62억이다. 그런데 현재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절대 빈곤층이 20억이다. 8억 5400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 결핍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5초마다 어린이 한 명이 굶어 죽는다. 매년 수천만명이 치료 가능한 질병과 기아로 죽어간다. 그리고 상위 1%의 소득이 세계 인구 57%의 소득을 능가하고 있다.

2. 제국의 꿈
바벨론 제국을 건설한 왕 느부갓네살이 제국의 장래를 생각하다가 꿈을 꾼다. 첫 번째 꿈은 금 머리와 은 가슴과 팔,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 철로 된 종아리, 철과 흙이 섞인 발의 형상이다. 이것을 다니엘이 해석한다. 금 머리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고 나머지는 이어지는 왕국들이다. 그러나 사람의 손에 띄우지 않은 돌이 이 나라들을 쳐서 흔적도 없게 만든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왕국이 금 머리와 같다는 해석에 기초하여 신상 전부를 금으로 만들어 세웠다. 두라 평지에서 온 나라의 신하를 불러서 절을 하게 한다. 금 머리인 자신의 제국을 영속하게 만들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벧느고라는 유대인 포로 출신의 관리들에 의해서 무너진다. 바벨론의 풀무풀이 삼킬 수 없는 영원한 권세자가 있다. 금 머리의 바벨론의 통치가 계속될 수 없다는 다니엘의 해석이 유효함을 말한다.

다시 느부갓네살은 나라의 장래를 고민하는 중에 두 번째 꿈을 꾼다. 하늘에까지 닿은 나무의 꿈이다. 다니엘이 다시 해석한다. 나무는 왕이다. 그런데 한 거룩한 감시자가 나무를 벤다. 결국 왕이 권세에서 쫓겨난다. 그러다가 일곱 때를 지난 후에 하늘을 우러러 보니 왕의 총명이 돌아오고 권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바벨론 왕국을 자신의 힘과 권세로 일으켰다는 교만한 생각을 교정한다 (단4:37).

3. 제국의 교만
일련의 꿈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이 깨달은 교만은 무엇인가? 그가 두 번째 꿈을 꾸고 다니엘로부터 해석을 들은 지 12달이 지난 다음이다. 바벨론 왕궁의 지붕에 올라서 이렇게 말한다. 단4:30이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왕이 이런 말을 하는 즉시 사람에게 쫓겨 나서 들 짐승과 같이 지내게 되고, 소처럼 풀을 먹고 하늘 이슬에 젖어 일곱 때를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독수리와 같은 새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그가 이런 일곱 때라는 적절한 기간을 지난 후에 하늘을 바라볼 때 그의 총명 즉 이성이 돌아오고 권력으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고백한다. 왕이 꿈에서 들은 대로 모든 세상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누구에게나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자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하늘의 왕을 찬양하면서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느부갓네살이 고백한 교만은 직접적으로 하늘의 왕에 대한 교만이다. 하늘의 왕이 모든 세상의 권세를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그런데 왕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 권세를 만들었다고 했기에 교만했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교만을 인정한 것이다.

세상에 권세를 나누어 주시는 하늘의 왕을 인정한 느부갓네살 왕은 도대체 어떤 경험을 한 것인가?

4. 제국의 교만의 실체가 무엇인가?
단4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총명을 잃고 들 짐승과 같이 되었던 일곱 때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정신병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최근에 짐승과 같은 모양은 음부에 이르는 죽음과 같은 심한 질병의 저주를 경험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해석들이 왕의 일정기간 유고를 해석하는 근거는 되지만 어떤 의미를 오늘의 현실에 줄 수 있을까?

왕의 교만은 단지 권세의 수여자에 대한 도전만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권세를 주시는 분이 하늘의 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아니면 권세를 주시는 분 즉 하늘의 왕이 세상 권세를 향해서 의도하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가?

느부갓네살이 교만함으로 경험했던 그 경험을 짚어보자.
단4:33절이다.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 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정리하자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같이 되었다. 소처럼 풀을 먹고, 왕궁이 아닌 들판에서 이슬에 맞고, 독수리와 같은 새가 되었다. 이런 모습으로 일곱 때 아니 적절한 변화의 때를 겪었다. 이런 모습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단4장의 느부갓네살 왕의 꾼 꿈의 내용과 비교된다. 나무가 하늘에까지 닿았다. 땅끝에서도 불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하고 열매가 풍성하다. 이런 나무 가지 그늘에 들 짐승들이 깃들이고, 가지에 새들이 둥지를 튼다. 또한 열매는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하다 (단4:12). 실제로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었다. 이 꿈의 내용에 등장하는 들 짐승과 새들이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 경험한 사건에 다시 등장한다. 꿈에서 나무인 왕의 권세 아래서 집을 구하고 먹을 것을 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왕이 교만하여 경험한 현실은 자기의 품 안에 있던 들짐승과 새와 같이 지내고 있다. 그리고 모든 육체가 왕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로 식물을 얻은 것과 비교되어서, 왕은 소처럼 풀을 먹는다.

꿈에서 나타난 모습은 왕의 권세가 땅끝까지 이른 모습이다. 그런 권세 아래서 있어야 할 한 전원적 풍경이다. 후자의 모습은 왕이 강제로 그런 모습에 던져진다. 그리고 다시 권세로 회복이 된다. 그런 와중에 권세의 교만이 언급된다.

하늘의 왕이 권세를 왕에게 주어서 이루고 싶은 나라의 모습이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들짐승이 그 그늘에 쉬고, 새들이 둥지를 틀고, 그리고 만민에게 식물을 공급하는 권세의 모습을 하늘의 왕은 기대하면서 권세를 나누어 준다. 그러나 왕은 교만하였다. 권세의 출처가 하늘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리고 쫓겨나서 자신의 권세가 품어야 하는 그 대상들과 충분한 기간(일곱 때)를 지내고 다시 총명이 돌아왔고, 권세가 돌아왔다.

총명은 이성 혹은 이해력이다. 왕의 이성, 왕의 통치 가치의 회복과 교만은 연결되어 있다. 왕이 자기의 품에 보호해야 할 대상과 왕의 통치 이념과 이성은 연결된다.

왕이 일곱 때를 지나면서 한 경험은 하늘의 왕에 대한 교만을 깨닫는 과정이며 동시에 자기 권세가 품어야 하는 대상의 발견과도 연결된다. 이런 임시적인 결론을 좀 더 확실하게 다듬어 보자.

하늘에 닿은 나무 열매는 만민의 식물이 될 만했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육체들이 나와서 식물을 삼았다. 이것이 왕의 꿈이다. 그러다가 나무가 잘린다. 그가 짐승과 함께 들의 풀에서 몫을 얻는다 (단4:15). 이것이 꿈의 내용인데, 다니엘이 해석을 이렇게 하였다. 단4:25절이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그리고 왕이 실제로 당한 경험은 단4:33절이다.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 떨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여기서 꿈과 해석의 일치점을 찾는다면 짐승과 함께 들의 풀에서 몫을 찾는다는 말은 소처럼 풀을 먹는다는 말이다. 왕이 소처럼 풀을 먹는다. 왕이 소처럼 풀을 먹는 경험은 무엇을 말하는가?

5. 구약에서 채식의 의미
풀을 먹는 것은 채식을 의미한다. 구약에서의 채식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서를 포함해서 구약성경에서 채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를 의미한다. 창1:29-30절에서 창조하신 제 육일에 사람과 짐승에게 채소와 과일, 그리고 풀을 식물로 주셨다. 타락한 세상이 고기를 식물로 먹기 시작했음을 창9:3절에서 확인한다.

또한 채식은 창조가 회복된 세상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사11:7-9절에 보면 이스라엘 나라에 이새의 자손인 다윗 왕이 다시 통치하게 되는 의로운 시대를 예언한다. 이때 사나운 짐승과 약한 짐승, 그리고 특별히 사람과의 평화가 있다. 독사 굴에 어린이 손을 넣고 장난을 한다. 그런 중에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이것은 사65:25절에도 반복된다. 특히 사65장은 17절에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한다. 완전하게 새로운 창조의 회복이 있는 시절을 예언한다.

정리하자면 채식은 창조와 새로운 창조, 즉 구속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하는 상징어이다.

창1장이나 사11장의 본문은 모두 권세와 관련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통치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런 통치의 결과가 짐승과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했고, 첫 창조 때에 그대로 되었다고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평가를 받아 선을 이루었다. 선한 것은 의로움이다.

사11장의 내용도 약속된 다윗 왕의 의로운 통치의 일부분이다. 이렇게 채식은 의로운 통치와도 연결된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포로로 잡혀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식을 먹었다 (단1:12). 그 결과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보기에 더 좋았다. 이것은 창1:31절의 말씀과 동일하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이스라엘의 영역 밖인 바벨론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한 방식이다. 정부정의 율법과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과 회복의 구속을 소망하는 집약된 표현이 채식이었다.

6.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느부갓네살이 소처럼 풀을 먹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상적인 공의로운 통치의 시대를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시대라고 했다. 이사야 선지자가 담은 사자는 주로 앗수르를 의미한다. 이사야 시대의 주된 대적과 제국은 앗수르이다. 사자가 짐승의 왕으로서 위치하기에 강한 왕인 앗수르 왕을 상징한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암사자 같을 것이요 그들의 소리지름은 어린 사자들과 같을 것이라 그들이 부르짖으며 먹이를 움켜 가져가 버려도 건질 자가 없으리로다 (사5:29).

대영 박물관의 앗시리아 전시실에 가면 앗수르의 앗수르바니팔 왕이 사자 사냥을 하는 부조(relief)가 있다. 앗수르 왕궁에서 발견된 부조를 통째로 떼와서 전시한다. 거기서 사자 사냥은 왕만이 할 수 있다. 다른 부하나 군인들은 사자가 왕을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역할만 한다. 사자에게 활을 쏘거나 칼로 찌르는 일은 오직 왕만이 한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다. 이 사자들이 왕의 사냥을 위해서 갇혀 있다고 본다. 비록 앗수르와 바벨론이 시대는 다르지만 유사하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에 이것을 연결시켰다. 이스라엘은 흩어진 양이라 사자들이 그를 따르도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먹었고 다음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뼈를 꺾도다 (렘50:17).

앗수르 왕과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을 사자로 비유한다.

사자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급했듯이 양과 같은 짐승을 잡아먹는다. 그런데 이런 사자와 같은 느부갓네살 왕이 소처럼 풀을 먹었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경우, 즉 왕이 소처럼 풀을 먹는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7. 다니엘의 권면-공의와 자비
우리의 결론을 위해 다니엘4장의 말씀을 더 살펴 본다.

하늘에 닿은 나무가 왕을 의미하고, 하늘의 거룩한 자가 내려와서 나무를 베는 것을 언급했다. 그리고 쫓겨나서 일곱 때를 지내면서 교만한 왕을 낮추었다. 그런 중에 언급되지 않은 것이 바로 나무 가지와 잎사귀 그리고 만민의 식물이 될 만한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그 가지에 깃들이는 들짐승과 새들, 그리고 식물을 취하는 모든 육체 있는 생물들에 대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다니엘이 해석하지 않았다.

다니엘이 이 부분의 설명을 지나치면서 대신 왕의 꿈의 해석 말미에 이런 권면을 한다. 27절이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다니엘이 왕에게 구하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죄를 속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왕의 권세와 통치의 평안이 영속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왕의 꿈 중에서 해석되지 않고 지나친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는지 알 수 있다. 왕을 가리키는 나무가 거룩한 감시자에 의해서 베임을 입은 것은 왕의 권세에 대한 교만 때문이다. 그런데 그 교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자기의 권세 아래 돌봄을 받아야 하는 백성들과 가축들에 대한 죄가 있다. 왕의 나무가 만들어 내는 열매는 만민의 식물이었다. 그래서 짐승과 새들이 깃들이고, 모든 생명 있는 육체들이 거기서 먹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다니엘은 꿈의 해석 마지막에 권면을 한다.

왕이여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아 주십시오. 이것이 왕의 권세가 영속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죄를 속하는 길입니다. 이미 왕에게 죄가 있습니다. 그 죄의 내용이 공의가 없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지극히 거룩한 자가 권세를 마음대로 누구에게든지 주어서 맡긴 목적이 이것이다. 그 권세를 가지고 모든 가난한 백성을 먹이고 억울함이 없도록 바르게 통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왕이 궁중에서 진미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잔치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권력과 권세 아래서 백성들은 착취를 당하고 먹을 것이 없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양을 충분히 공급하셨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고 즐기는 권세들 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린다.

느부갓네살 왕의 죄 즉 교만의 실체의 다른 한 면이 이것이다. 공의가 없음이다. 즉 가난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가 없다. 힘없는 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긍휼이 없다.

이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를 권세에서 내어 쫓아서 고통 당하는 백성들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 들짐승과 함께, 소처럼 풀을 먹으면서 새처럼 지낸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다시 그의 총명 이성이 돌아온다.

총명은 이성이다. 통치자의 합리성이다. 권세의 바른 지향이다. 교만이 아닌 겸손이다. 교만이 보지 못했던 바른 지향점을 다시 찾게 된다. 이성과 이해, 그리고 지혜는 바로 권세와 권력과 힘을 통해서 가난한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는 의로서 다스리는 것이다.

왜 소처럼 풀을 먹었는가?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늘의 왕이 주신 권세가 바른 방향으로 사용되도록 하기 위해서 느부갓네살 왕이 소처럼 풀을 먹는 경험을 하였다. 느부갓네살이 그토록 소망하던 제국의 장래와 영원함은 바로 그가 소처럼 풀을 먹는 경험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8. 글을 마치면서
로마가 기독교로 변하는 중심에 이런 일이 있었다. 로마의 후견인 제도는 유명하다. 한 능력있고, 권세 있는 부자가 후견인이 되어 한 도시의 일부 무리들을 먹여 살린다. 그래서 그런 후견인의 고리가 연결되어 로마의 사회 조직이 형성된다. 이런 유사한 류들이 모여서 식탁의 교제를 나눈다. 그래서 이런 능력있는 후견인은 '그 도시와 그곳의 시민을 사랑하는 자들'로 불리워졌다. 여기에는 가난한 자들이 목표가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교회의 목사를 말하는 주교나 감독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물론 기독교의 타락 이전 이야기이다.

이런 배경이 로마 황제의 통치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
451년에 동서 로마의 황제였던 발렌시안 3세와 마르시안 황제가 이런 선언을 했다.

"자비로운 통치는 가난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보장하는 것이며, 결핍된 자들의 이익을 잘 돌아보아 주는 것이다" (유스티니우스 법전 1.2.12).

다음 주간 1월 20일에 미국의 대통령 바락 오바마의 취임식이 있다.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미국 내에서도 그러하고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11월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 날 소저너라는 기독 사회 운동의 대표자인 짐 왈리스가 기독인의 기도와 서약이란 제목의 메일을 독자들에게 보냈다. 거기에는 새 당선자에게 보내는 네 가지의 권고와 이를 위한 기독인의 기도제목이 있었다.

첫째는 10년 안에 미국내 빈곤을 반으로 줄이고, 2015년까지 유엔이 설정한 새천년 개발목표에 따라서 전세계의 절대 빈곤을 절반으로 줄이는 일에 힘을 써달라.
둘째는 전쟁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국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 이락이나 이란의 핵문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문제를 미국의 최상의 가치에 일관되게 접근해 달라.
셋째는 삶에서의 지속적인 윤리성의 회복. 공통 가치에 기반을 두고 낙태율을 획기적으로 줄이도록 노력해 달라. 미국의 낙태률은 2005년도 자료에 의하면 신생아에 22.6%에 이른다. 120만건 이상의 낙태가 있었다.
넷째는 기후 문제를 포함해서 일자리 창출 등에 있어 녹색 경제의 공약에 충실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독인의 서명을 받고 위해서 기도하기로 다짐하는 서약을 하자고 했다.

새롭게 미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바락 오바마의 길이 이러 권면에 귀를 기울이기를 소망한다.
우리 장로 대통령인 이명박 정권이 관심을 가지는 길이 마찬가지로 공의와 자비이기를 기도한다.

세상의 권세인 느부갓네살에게도 하늘의 왕은 자기 백성의 가난을 책임지도록 역사하셨다. 이것은 종말의 이상적인 통치자이신 메시야의 시대가 꿈꾸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의와 공평으로 통치하시는 선이 이루어지는 시대를 소망하는 성도들과 교회의 부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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