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배를 드리기 전에 형제와 막힌 담을 허물어야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말씀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화해는커녕 온갖 비난을 퍼붓고 교회를 떠나거나 옮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음속에 미움을 간직한 채로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웃음도 주고 부끄러움도 줍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극작가인 두 친구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극작가 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동료들은 그들의 단합을 위해서 두 사람을 화해시켰습니다. 한 친구가 하는 수 없이 다른 친구에게 악수를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나는 자네가 나에게 원하는 만큼의 성공을 자네의 다음 작품에서 거두기 바라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발끈해서 주위 동료들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들 들었지? 이 친구가 또 시작하지 않는가?”

      

우스운 이야기 둘. 새해 전야에 두 친구가 만났습니다. A가 B에게 충고를 합니다. “자네 C와 화해하게. 이런 좋은 때에 친구끼리 원수처럼 지내서야 되겠나. 그건 매우 좋지 않네.” 그 말을 듣고 B는 C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I wish you A happy New Year!” 그리고 한 마디 덧붙입니다. “딱 한 번이야!” 영어의 a는 한 번인데 그것을 문자 그대로 강조해서 딱 한 번의 기쁜 새해를 보내라고 어깃장을 놓은 겁니다.

      

좀 새겨들어야 할 다른 종교인의 이야기입니다. 1947년 파키스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같은 힌두교인인 간디에게 와서 자기가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사람은 괴로워하면서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제가 그 아이 머리를 벽에다 박아 죽였습니다.” 간디가 묻습니다. “왜요?” 그 남자가 대답합니다. “그들이 제 아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 무슬림들이 제 아들을 죽였다고요.” 그 말을 듣고 간디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옥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죠. 아이 한 명을 찾으세요. 그 아이의 엄마와 아빠가 살해당한 그런 어린 소년을 찾아서 그 아이를 당신 아들처럼 키우세요. 다만 그 아이는 무슬림이라야 합니다. 또 한 가지, 그 아이를 무슬림으로 키워야 합니다.” 종교가 달라서 소개하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엄청난 도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첫 두 이야기의 주인공은 억지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억지 화해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요? 가만히 있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용기 있는 사람들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 화해의 첫 걸음이 시작되는 것 아닐까요? 그게 어디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자기의 용기 없음이나 자존심을 예수님의 말씀 위에다 놓아서는 안 되겠죠. 그런 걸로 불순종을 합리화시키기보다는 억지로라도 순종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라고 생각됩니다.

      

예물을 드리기 전에 화해해야 하듯이,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서로 막힌 담이 있으면 헐어야겠습니다. 형제와 막힘없이 개운한 마음으로, 원수까지도 품을 수 있는 넓은 마음으로, 새해맞이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